간화결의론 ①
1. 법계연기와 간화선법
■ 어떤 사람이 목우자(牧牛子)에게 물었다. 화엄교학에서 이미 법계(法界)의 장애가 없는 연기를 밝혔다. 여기에 의하면, 다시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선문(禪門)에서는 십종병(十種病)을 배척하면서(揀) 다시 화두(話頭)를 참구하는가.
■ 이에 답하였다. 근래 대부분 공부하는 사람들이 선문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흔히들 이러한 의심을 갖는다. 만일 진성연기(眞性緣起)의 의리 분제(義理分齊)에 서서 논한다면, 선학자들이 어찌 이 열 가지 선병(禪病)이 화엄의 법계연기와 같음을 모르겠는가. 그런 까닭에 경산(徑山) 대혜선사(大慧禪師)도 말하였다. “평소에 지견(知見)이 많아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앞서 장애가 되므로, 자기의 정견(正知見)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장애도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별도의 일도 아니다.” 그러니 어찌 따로 가려 구별(揀)하지 않겠는가. 이른바 십종병이란 것도 깨달음(證悟)을 구하는 마음이 근본을 이룬다. 이미 이러한 장애가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 왔겠는가. 또한 별도의 일이 아니라면, 이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모두 성기(性起)의 덕(德)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원각경(圓覺經)에서도 “일체의 장애가 그대로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이요, 정념(正念)을 얻고 정념을 잃음이 해탈(解脫) 아님이 없다” 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물론 화엄에서 말하는 뜻과 이치(義理)는 가장 완전하고 오묘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식정(識情)에 의해서 듣고 이해하여 헤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문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경절문(徑截門)에서는 불법을 이해하는 언어적인 개념(知解)의 병통이라고(그것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무자 화두는 하나의 불덩어리와 같아 가까이 가면 얼굴을 태워버린다. 그런 까닭에 불법에 관한 지적인 이해(知解)를 둘 곳이 없다. 그래서 대혜선사(大慧禪師)는 “이 무자는 잘못된 앎과 지적인 이해(惡知惡解)를 깨뜨리는 무기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깨뜨리는 주체(能破)와 깨뜨려지는 대상(所破)을 구별하고 취하고 버리는 견해가 있다면, 여전히 말의 자취에 집착하여 자기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이것은 뜻을 얻어(得意參詳) 다만 화두를 드는(提撕) 사람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 또한 선문에서도 비밀리에 부촉한 가르침(密付)을 감당하지 못하고 교학을 의지하여 진리(宗)를 깨닫는 사람을 위하여 진성연기(眞性緣起)의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설하기도 한다. 그것은 저 삼현문(三玄門) 중에서 처음 선기(禪機)에 들어가는 체중현(體中玄)에서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한량없는 세계에서 나(自)와 남(他)이 터럭 끝만큼도 나뉘지 않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과 시종(始終)이 지금 여기 순간(當念)을 조금도 여인 것이 아니다” 하고, 또 “한구(一句)가 분명하게 밝다면 삼라만상을 포섭한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 선문에는 이와 같은 원돈신해(圓頓信解)의 참된 가르침이 항하사 모래알처럼 많지만 모두 죽은 말(死句)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앎의 장애(解碍)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 발심하여 공부하는 자들이 경절문의 활구(活句)를 아직 제대로 참구하지 못하기에, 성품에 맞는 원만한 교설(稱性圓談)로서 그들의 믿음과 앎이 물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그러나 만일 상근기의 사람으로서 비밀히 전하는 가르침을 감당하여 교학적인 앎의 웅덩이를 벗어난 사람이라면, 경절문의 담백한 말을 듣자마자 지적인 이해의 병에 걸리지 않고 곧바로 궁극적인 낙처(落處)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일러 하나를 듣고서 천 가지를 깨닫는 큰 다라니(大摠持)를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
■ 또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에 의하면 이 열 가지 지적 이해의 병도 진성연기(眞性緣起)이기 때문에 취하고 버릴 필요가 없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말길과 뜻길에 의해서 듣고 이해하고 헤아리는 바가 있으므로, 처음 발심한 사람은 믿고 배워서 행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경절문(徑截門)에 의하면, 직접 증득하고 비밀스럽게 계합함에 말길도 뜻길도 없어서, 듣고 이해하여 헤아리는 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비록 법계가 걸림 없이 연기한다는 이치조차도 오히려 말하고 이해하는 장애(說解之碍)가 된다. 그러니 만약 상근기의 뛰어난 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밝게 알아 능히 뛰어나겠는가. 그러므로 보통 공부하는 사람들이 경절문에 대하여 의심하고 헐뜯는 것도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또한 선종에서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화두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는 말(全提之語)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이해를 깨뜨리는 말(破病之談)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두를 잘 알고 화두를 드는(提撕) 사람은 진리를 드러낸다는 생각(全提之解)도 없는데, 하물며 잘못된 이해를 깨뜨린다는 마음(破病之念)을 가져 비밀한 뜻을 매몰시키겠는가. 한 생각이라도 진리를 온통 드러낸다든지, 잘못된 이해를 깨뜨린다든지 하는 견해를 낸다면, 곧바로 의식으로 헤아리는 병에 떨어진다. 어찌 활구(活句)를 참구하는 자가 되겠는가.
2. 지해(知解)의 장애
■ 다시 물었다. 이미 ‘법성(法性)이 원융(圓融)하여 연기(緣起)함에 막힘이 없다’고 한다면 비록 듣고 헤아림이 있다고 하여도 어찌 장애가 되겠는가. 이에 답하였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원각경>>에서 “어떤 사람이 번뇌를 영원히 끊고서 법계의 청정함을 얻으면 곧 청정함이란 견해에 의해 스스로 장애가 되어 완전한 깨달음(圓覺)에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법계의 청정함을 얻은 사람도 알음알이의 장애를 만드는데, 하물며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감각과 의식(情識)으로 연기가 막힘이 없음을 헤아리니 어찌 알음알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3. 선종의 이언절려
■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반야경(般若經)에서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라든지, 돈교(頓敎)에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는 것처럼, 이들 역시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는(離言絶慮)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답하였다.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는 것은 오교(五敎)에도 있다. 각 교설에 모두 하나의 말이 끊어진 경지를 제시하여, 언설을 잊고 참된 진리를 체득하도록 함이 있는 까닭이다. 소승(小乘)은 사람이 공하다(人空)는 진여(眞如)를 깨닫고, 대승(大乘)의 보살(菩薩)은 법이 비었다(法空)는 진여를 깨닫는다. 이것은 모두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은 것이다. 만일 말과 근심을 잊지 못했다면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돈교(頓敎)에서는 단지 진리의 본성이 말을 떠나고 형상을 끊었다는 것을 설한다. 이것은 별도의 한 부류의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니 곧 부처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다만 이치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證理成佛)으로 순전히 법신(法身)만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화엄은 법계가 막힘없이 연기한다는 것을 설한다. 보살이 듣고 익히면서 닦는 바로, 곧 십신(十信)의 경지에서 보고 듣는 것(見聞)으로 마음을 채워서, 이해와 실천(解行)이 이루어지면, 십신이 완성되어 십주의 처음(住初)에 이른다. 이것을 “깨달음에 증입(證入)한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화엄론>>에서 “먼저 듣고 이해하여 믿음에 들어가고, 뒤에 생각이 없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이미 생각이 없이 깨달아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역시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는 것이다. 청량조사(淸凉祖師)께서도 “부처의 깨달음은 말을 떠난다”고 하였고, 또 “성품의 바다인 진리 자체(性海果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진리의 바다(果海)는 마음을 떠나서 마음으로 전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두루 근기(普機)의 사람을 포괄하는 화엄의 큰 가르침도 깨달아 들어감에 있어서는 역시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는 것이 분명하다.
■ 선종의 초월적인 근기(過量之機)로서 화두를 참구하여 은밀한 이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열 가지 지해(知解)의 병을 갖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역시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선종의 근기는 분지일발(噴地一發)하면, 법계(法界)가 환히 밝아지면서 저절로 완전한 덕이 갖춰진다. 조계조사(曹溪祖師)께서 말씀하신 “스스로의 성품에 부처의 삼신(三身)을 갖추고 있어 네 가지 지혜(四智)를 밝게 이루니,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서 훌쩍 불지(佛地)에 오른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원교(圓敎)의 십신(十身)과 십지(十智) 등은 모두 삼신과 사지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 지금까지 모두 진리에 들어가는 사람이 깨닫는 경계의 치우침과 원만함(偏圓), 방편과 진실(權實)의 입장에서 논한 것이다. 오늘날의 겉모습에 집착하여 육안(肉眼)으로 소견을 내는 사람들은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니, 어찌 더불어 도(道)를 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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