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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돈성불론 ③

 

4. 선과 돈교

■ 물었다. 지금까지 그대가 말한 바는 이미 상세히 들었다. 그러나 고금의 선문에 통달한 자는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고 한다. 이것은 한쪽 측면(一分)의 성품의 깨끗한 바탕으로서,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영가진각대사가 조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본래의 마음을 깨닫고 노래를 지었는데 듣지 못했는가?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마음 거울이 밝아서 두루 비침에 장애가 없다. 확연히 밝아 모래알처럼 무수한 세계에 두루 사무친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원만한 광명은 안과 밖이 없다. 한 성품이 원만하게 일체의 성품에 통하고 한 법이 두루 일체의 법을 머금고 있다. 한 달이 널리 일체의 물에 나타나고, 일체의 물에 있는 달이 한 달에 융섭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니, 나의 본성이 도리어 여래와 한 가지로 합한다.” 또 영소무가 본래 마음을 깨닫고 게송을 지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시방 세계가 가지런히 한 터럭 끝에 나타나며, 화장 세계가 중중하여 제석의 구슬 그 물에 끝이 본래 없다.”고 하였다. 또 대혜선사가 불자를 잡아들고, “부처의 성품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관찰할 것이니, 시절이 만일 지극하면 그 이치가 스스로 드러난다. 또 미세한 먼지와 같이 무수한 모든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여 왕궁에 강생하고 도량에 앉으며 법륜을 굴리고 마군을 항복시키고 중생을 제도하고 열반에 듦이 다 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만일 믿어 얻는다면, 끝이 없는 세계가 나에게나 남에게나 터럭 끝만큼도 차이가 없음이요, 십세와 고금이 한결같이 현재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본래 마음을 깨달아 자기 마음의 거울 안에 제석의 구슬 그물처럼 중중하여 끝이 없는 법계를 본 이는 선종 전기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리석은 자는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의 어록을 보지 못하며 또한 화엄대론의 취지를 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참선하는 이가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이르되, ‘한낱 성품만 깨끗한 부처(性淨佛)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크게 어리석고 미혹된 것이다.

■ 하지만 화엄교학이 이치를 다 설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배우는 자가 말의 가르침에 의한 뜻과 이치의 한계에 걸려, 능히 뜻을 잊고 마음을 요달하여 속히 보리를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마가 서쪽에 와서 달이 손가락에 있지 않으며, 법이 곧 나의 마음임을 알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깨뜨려 근원을 드러냄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에 의한 뜻과 이치를 시설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깨뜨리는 언구가 있는 곳에는 이치의 성품에서 말을 여의고 생각을 떠난다고 하는 일분의 의미와 가깝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매번 비슷한 어례를 가지고 문득 돈교와 같다고 말한다. 이는 크게 그렇지 않다. 설사 화엄의 끝이 없는 법계의 거듭 깊은 법문이라도 법에 대한 애착을 내어 이해의 한계를 잊지 못하면, 또한 깨뜨릴 대상이 된다. 천태의 가르침에서도 또한 “원만한 가르침(圓門)에 애착을 낸다면 오히려 처음의 가르침(初敎)에서 깨뜨릴 바가 된다”고 하였다. 다만 성품의 바다인 과위는 법계를 증득한 자리이니, 미리 말하지 못하며 또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뜻으로 이해하여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청량조사가 또한 이르되 “원만한 소리(圓音)는 두드리지 않아도 항상 펼쳐지고, 과위의 바다(果海)는 생각을 떠난 마음으로 전한다”고 하고, 또 이르되 “부처의 깨달음(證)은 말을 떠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선문에 생각을 떠나 서로 전한다는 것은 단박 법계를 증득한 자리(頓證法界處)이다. 돈교 가운데에서 법의 모양을 설하지 않고 오직 참된 성품만을 보아,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一念不生)’을 곧 일컬어 부처라고 하는 것과 결코 같지 않다.

■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선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다. 첫째는 체중현(體中玄)이고, 둘째는 구중현(句中玄)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이다. 체중현에서는 ‘끝이 없는 세계가 나와 남이 터럭 끝만큼도 거리를 두지 않고, 십세와 고금은 처음과 끝이 현재의 즉한 마음(當念)을 여의지 않는다’ 등 현상과 현상이 서로 걸림이 없는 가르침(事事無碍法門)을 이끌어서 첫 근기가 깨달아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역시 말로 된 가르침의 이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는 까닭에, 구중현의 자취가 없고 평상하여 산뜻한 언구로써 집착을 깨트려 몰록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적인 이해를 잊게 한다. 그렇지만 이 구중현 역시 산뜻하다는 앎의 견해와 산뜻한 언구가 있는 까닭에, 현중현에서는 양구, 묵연, 방할 등의 작용으로써 단련한다. 이때에 당하여 문득 앞의 두 가지의 현문에서 보인 산뜻한 앎의 견해와 산뜻한 언구를 잊는다. 그런 까닭에 ‘뜻을 얻어 말을 잊는 것이 도에 친하기 쉽다’고 한 것이다. 이를 ‘단박 법계를 증득한 자리(頓證法界處)’라 한다. 이 가운데 삼현은 비록 임제선사의 본래의 뜻과는 다르다. 다만 승고선사(承古禪師)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 선문에도 또한 첫 근기의 열등한 사람을 위하여, 흐름을 따라 허망하게 물드는 가운데 성품이 깨끗하고 오묘한 마음이 있음을 가리켜 보여서, 쉽게 이해하고 믿어 들어가게 함이 있다. 믿어 들어간 뒤에 그 이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친히 증득함이 된다. 만일 이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고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解脫深坑)에 앉아 있게 되면, 온갖 행의 연기문 가운데에서 몸을 굴리는데 있어 걸림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 교문에도 또한 성품이 깨끗한 본래의 깨달음으로써 법계의 걸림 없는 연기의 근원이 있다. 예컨대 현수국사는 『화엄오지망진한원관(華嚴奧旨妄盡還源觀)』에서 먼저 한 본체를 내세웠다. 이른바 자기 성품이 청정한 원만히 밝은 체(自性淸淨圓明體)이다. 이는 곧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깨끗한 본체이다. 본래부터 본성이 스스로 원만하고 충족되어 있어 더러움에 처하되 때묻지 않으며 닦아서 깨끗해진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깨끗하다’고 함이다. 또 성품의 본체가 두루 비추어 어떤 깊숙한 곳까지도 밝히지 못한 바가 없으니, 그러므로 ‘원만하게 밝다’고 한다. 번뇌로 덮이면 곧 숨고, 지혜로 깨달으면 곧 나타난다. 이는 번뇌가 생겨날 원인(生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요, 오직 깨달음의 원인(了因)에 의해서 깨닫는 바이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의 자체의 본성은 큰 지혜의 광명이라는 뜻과 두루 법계를 비춘다는 뜻과 진실히 안다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고 널리 설하였다.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깨끗하고 맑으며, 원만하고 밝은 체’라고 한 것이다. 둘째로 앞의 깨끗한 본체에 의거하여 두 가지 작용을 일으킨다. 하나는 해인에 삼라만상이 항상 머무는 작용이다. 해인이라 말한 것은 진여의 본래 깨달음이다. 망상이 다하고 마음이 맑아서 온갖 형상이 가지런히 나타남이 마치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여 형상마다 나타나지 않음이 없음과 같다. 『대승기신론』에서 ‘한량없는 공덕을 간직한 법성의 진여바다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일컬어 해인삼매라고 한다. 둘은 법계의 원만하게 밝은 자재하는 작용(法界圓明自在用)이다. 이는 화엄삼매이다. 이르되 널리 온갖 행을 닦되 이치에 맞추어 덕을 이루고 널리 법계에 펴져 보리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법계의 원만하게 밝은 자재하는 작용’이라고 한다. 셋째로 세 가지의 변(遍)을 보인다. 앞의 두 작용에 의거하여 낱낱의 작용 가운데 널리 법계에 펴짐으로, 보편이라고 한다. 하나는 한 티끌이 널리 법계에 주행하는 보편이다. 둘은 한 티끌이 다함이 없이 두루 생겨나게 하는 보편이요, 셋은 한 티끌이 공(空)과 유(有)를 머금어 포용하는 보편이다. 이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걸림이 없음(事事無碍)을 밝히는 것이다.

■ 여기에서 현수국사가 세운 뜻에 의거한다면, 이와 같은 두 가지 작용(用)과 세 가지 보편(遍) 등이 널리 법계에 펴져 서로 포용되고 융합되며 걸림 없는 덕은 모두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자기의 성품이 깨끗하고 맑으며 원만하고 밝은 본체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화엄에서 논하는 ‘하나의 참되고 걸림이 없는 법계가 결코 중생의 마음 가운데 성품이 깨끗한 본래 깨달음’과 그 체가 각각 다른데도 현수조사가 이렇게 말씀하였다면, 곧 그는 눈멀고 귀먹은 사람을 속여 달래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풂이 상세함(廣)과 간략함(略)이 다소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이다.

■ 또 의상법사는 『법계도』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법의 본성이 원만하게 융통하여 두 모양이 없으며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모든 것이 끊어졌으니 증득한 지혜로 알 바요 다른 경지가 아니다. 참된 본성이 심히 깊고 극히 미묘하여 자기의 본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성취한다.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요 모든 것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가 모든 것에 즉(卽)하며 모든 것이 하나에 즉(卽)한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 세계를 머금었으며 온갖 티끌 가운데서도 또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겁이 한 생각에 즉(卽)하며 한 생각이 이 한량없는 겁에 즉(卽)한다.”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제일로서 먼저 ‘법의 본성이 원만하게 융통하여 두 모양이 없으며’라고 내세운 것은 현수국사의 이른 ‘자기의 성품이 깨끗하고 맑으며 원만하고 밝은 본체’에 상응한다. 또한 중생의 본래 있는 참된 성품으로, 원만하고 밝으며 깨끗하고 맑아 더러움에 처하되 때 묻지 않고 닦아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며, 번뇌로 덮이면 곧 숨고 지혜로 깨달으면 곧 나타난다. 생겨날 원인(生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깨달을 원인(了因)에 의해 깨달을 바이다. 만일 누구나 자기 마음의 깨끗하고 맑은 본성을 돌이켜 비추어 망상이 다하고 마음이 맑으면 온갖 모양이 가지런히 나타남이 마치 바닷물이 맑고 깨끗함에 모양마다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곧 이름하여 해인에 삼라만상이 항상 머무르는 작용이라고 한다. 그밖에 법계가 원만하고 밝으며 자재한 작용 내지 세 가지 보편 가운데 현상마다 서로 걸림이 없으며, 깨끗하고 맑은 깨달음의 본성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의상 법사의 세운 ‘법의 본성이 원만하게 융통하여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모든 대립이 끊어진다. 오직 증득한 지혜의 알바요 다른 경지가 아니다’라는 것도, 또한 친히 자기의 본성의 본래 깊고 고요하여 이름을 여의고 모양이 끊어진 곳을 증득하여 현상마다 걸림이 없는 법계의 근원을 삼은 것이다. 어찌 말을 떠났다고 그것으로써 돈교와 같다고 하겠는가?

■ 선문의 종사가 근기에 대응하는 가르침 가운데 방편으로 열등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비록 더러움을 따르는 마음 가운데 있는 깨끗하고 맑은 깨달음의 본성을 설명해 보이기도 하는데, 다만 배우는 자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돌이켜 비추어보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 이치를 설명하는 것의 깊고 얕음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만일 한 말씀 아래에 자기의 본성을 돌이켜 비추어보아 몰록 언어적인 이해를 잊는다면, 곧 자기 마음의 거울 안에 시방 세계의 간접적인 조건(依報)과 직접적인 조건(正報)의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차별이 환하고 가히런하게 나타나는 바의 법계가 걸림 없이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매한 자는 다만 원교의 막힘과 걸림이 없는 법계를 표방하여 이르되 “참선하는 사람의 논하는 바는 『대승기신론』 가운데 더러움을 따르되 본성이 깨끗하다는 뜻에 불과하며 또한 한 측면에서 이치의 본성은 말을 여의고 모양이 끊어진다는 일분의 뜻에 불과하다”고 한다. 모두 언어적인 가르침의 자취에 집착하고 막혀, 옛 성현이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풂이 상세함과 간략함이 비록 다르나 한 마음으로 돌아감을 가리키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만일 언어적인 방편과 의리의 분별을 몰록 잊고 그윽한 방에 고요히 앉아 가슴을 비우고 생각을 맑게 하여 자기의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보아 그 연원을 터득한다면, 곧 현재 지금의 한 생각의 본성이 깨끗하고 오묘한 마음으로 더러움에 따르는 본래 깨달음(本覺)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옳으며, 본성이 깨끗한 본래 깨달음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옳으며, 막힘이나 걸림이 없는 법계라고 하더라도 또한 옳으며, 움직이지 않는 지혜(不動智)의 부처라고 하더라도 또한 옳으며, 로사나불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옳다. 이치에 즉하고 현상에 즉하며 나에 즉하고 남에 즉하니,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기신론』의 본성이 깨끗한 본래 깨달음을 현수국사가 터득하여 곧 2가지 작용과 3가지 보편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돈교의 말을 여의고 모양이 끊어짐을 의상법사가 증득하여 또한 본성의 과위의 경지는 부처의 지혜로 아는 경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옅은 근기의 사람이 말에 따라 집착하면 곧 다르고 깨달은 선비가 뜻을 터득하여 이해하면 곧 같다. 하물며 오늘날 큰 마음을 품은 평범한 사람이 선지식의 개시(開示)를 만나서 빛을 돌려 돌이켜 비추어본다면 곧 영겁 이전부터의 무명이 머무는 곳의 번뇌가 문득 모든 부처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가 된다. 중생의 번뇌와 무명의 갖가지 허깨비와 같은 변화가 다 여래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普光明智)로부터 생기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돌이켜 비추어보는 것이 온전히 자기의 본체요 본래 다른 물건이 아니다. 맑은 물이 물결을 내매 물결이 온전히 물이며 꽃이 허공에 나매 꽃이 온전히 허공인 것과 같다. 그래서 원효는 “고요하게 비춤이 밝음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으니, 어찌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멸하여 지혜의 밝음을 얻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근본되는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를 깨달으면 곧 이르되 “첫 마음이 올바른 깨달음의 부처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론에 이르되, “보리의 오묘한 지혜로써 널리 도장 치면 삿된 생각과 망령된 행동이 스스로 날 곳이 없으니 이름 하여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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