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평부 조계산 송광산 불일보조국사 비명 병서
■ 선(禪那)의 가르침은 가섭파(迦葉波)에서 시작하였는데, 달마(達磨)가 이어받아 중국(震旦)으로 들어왔다. 전해 주는 사람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 주었고, 닦는 사람은 닦음이 없는 것으로 닦으면서 대대로 이어 받아 법등(法燈)과 법등(法燈)이 함께 빛났으니, 어찌 이처럼 기특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인으로부터 점차 멀어지자 법도 따라서 해이해져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진부한 말만 묵수하며 비밀한 뜻은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근본을 버린 채 말단만 좇게 되었다. 이에(마음을) 관찰하여 깨달음에 들어가는 길은 가시덤불로 막히게 되고, 문자(文字)로 부질없는 논란하는 폐단만 벌떼처럼 일어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거의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 이때에 한 사람이 있어(그는) 홀로 들뜨고 거짓된 일반적 풍조를 거스르고 참된 가르침을 사모하여, 경전을 공부하여 참된 이치를 찾는 것에서 시작하여 선정(禪定)을 닦음으로써 지혜를 드러내는 것에까지 이르렀으며, (와 같이) 자기 수양을 마친 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에까지 미쳐 무너진 선풍(禪風)을 다시 진작시키고 어두워져 가던 조사의 달빛을 다시 빛나게 하였다. 이런 사람을 가섭의 적자(嫡孫)요 달마의 종자(宗子)로서 잘 계승하고 잘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우리 국사(國師)께서 그런 분이시다.
■ 국사(國師)의 이름은 지눌(知訥)이고, 서울 서쪽의 동주(洞州) 사람이다. 일찍이 목우자(牧牛子)라고 스스로 호를 붙였고, 세속에서의 성(姓)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 광우(光遇)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이었고, 어머니 조씨(趙氏)는 개흥군부인(開興郡夫人)이다. (국사는) 나면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의원들이 치료하여도 효험이 없었다. 이에 아버지가 부처에게 기도하여 출가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곧 나았다. 나이 겨우 8세에 조계(曹溪)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일정한 스승에 국한되지 않고, 오직 도(道)가 있는 사람을 따랐으며, 뜻과 행실이 고상하고 늠름하였다.
■ 25세 되던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명종 12, 1)에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얼마 후 남쪽으로 길을 떠나 창평현(昌平縣)의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공부방(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마음을 일으키니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다 하여도 모든 사물에 변화를 주지 못하며 진성(眞性)은 항상 자재(自在)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미증유(未曾有)의 가르침을 얻게 되어 놀라고 기뻐하였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며(그 구절을) 외우고 생각하니 그 뜻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음에(세속의) 명리(名利)를 싫어하게 되어 늘 산 속에 숨어 살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도(道)를 구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잠깐 동안이라도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 후 대정(大定) 25년 을사(乙巳)(명종 15, 1)에 하가산(下柯山)으로 가 보문사(普門寺)에 머무르게 되었는데(그곳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읽다가 이통 현장자(李通玄長者)의 ≪화엄론(華嚴論)≫을 보고서 거듭 믿음을 내게 되었다. (이 책을) 깊이 파고들어 깊은 의미를 찾아내며 자세히 음미하자 전에 깨달은 바가 더욱 밝아지게 되었다. 이에 원돈관문(圓頓觀門)을 열심히 닦았고 또한 바른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초보자(末學)들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의 장애물을 없애 주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전에 알고 지내던 늙은 선승(禪僧) 득재(得才)가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간곡하게 와 주실 것을 청하므로 그곳에 가 머무르면서 여러 종파(宗派)의 명리(名利)를 버린 뜻있는 사람들을 널리 맞아들여 간곡하게 권하여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기를 밤낮으로 게으름 없이 여러 해 동안 하였다. 승안(承安) 2년 무오(戊午)(명종 27, 1 봄)에 선우(禪友) 몇 명과 함께 바릿대 하나만 가지고 수도할 곳을 찾다 지리산(智異山)에 올라가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은거하게 되었다. 이곳은 주변의 고요함이 천하에 제일이어서 진실로 禪을 닦을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이에 바깥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오로지 마음을 보는 것(內觀)에만 정진하였는데 쇠를 갈고 다듬어 날카롭게 하고 물길을 따라 근원을 찾는 자세로 하였다. 당시에(국사) 깨달음 얻은 것(得法)을 보여주는 상서로운 일이 몇 가지 있지만 말이 번잡하여 여기에 기록하지는 않는다.
■ 국사는 일찍이(이때의 경험을) “내가 보문사(普門寺) 이래 십여 년 동안 비록 바른 생각을 갖고 부지런히 수도하며 조금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지만 분별하는 생각(情見)이 없어지지 않아 마음속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마치 원수와 함께 지내는 것 같았는데, 지리산에 머무르면서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 語錄)≫의 '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도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이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參禪)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는 구절을 보았는데, 나는 여기에서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가슴 속에 걸리던 것이 없어지고 원수가 함께 있지 않아서 당장에 편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로부터(국사의) 지혜(慧)와 깨달음(解)이 더욱 늘고 대중들이 우러러 받들게 되었다.
■(승안) 5년 경신(庚申)(神宗 3, 1)에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이 주하여 제자들을 이끌고 가르침을 11년 동안 베풀었는데, 혹은 도(道)를 얘기하고 혹은 선(禪)을 닦으면서 안거(安居)와 두타(頭陀)를 한결같이 부처님의 율법에 따라 하였다. 이에 사방의 승려와 신도들이 명성을 듣고 달려와 성대하고 훌륭한 모임을 이루었는데, 명예와 벼슬, 처자까지 버리고 승려의 옷을 입고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어 오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왕공(王公)과 사서(士庶) 등(세속인)으로서 결사에 참여한 사람도 수백 명이 되었다. 국사는 도(道)를 널리 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성품이 인자하고 참을성이 있어 후진들을 잘 이끌었는데, 간혹 잘못하여 뜻을 거스르는 경우에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잘 보살펴 서 정리(情理)를 끊지 않았으니,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리광 부리는 아들을 대하듯 하였다.
■ 국사가 사람들에게 외우고 간직하라고 권한 것은 언제나 《금강경(金剛經)》이었고, 가르침을 베풀 때에는 반드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뜻을 두고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과 대혜선사(大慧禪師)의 《어록(語錄)》으로 함께 하였다. 가르침의 문(門)을 세 가지 제시하였으니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 등이며 이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하여 믿음에 들어선 사람이 많았으니 선학(禪學)의 융성함이 가까운 과거에는 비할 바가 없었다. 국사는 또 위의(威儀)를 잘 하였는데 소처럼 걸으며 호랑이가 바라보듯 하였고, 한가하게 있을 때에도 행동을 삼가며 조금도 게으른 모습이 없었다. 또(사찰에서) 일을 할 때에는 언제나 대중에 앞섰다. 억보산(億寶山)의 백운정사(白雲精舍)와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의 규봉난야(圭峯蘭若)와 조월암(祖月庵) 등은 모두 국사가 세우고 왕래하며 선(禪)을 닦은 곳이다. 지금 임금(熙宗)께서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국사의 명성을 흠모하시다가 즉위하심에 미쳐서는 칙명(勅命)을 내려 송광산(松廣山)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길상사(吉祥寺)를 수선사(修禪社)로 바꾸게 하고 그 현판을 친필로 써 주셨다. 그리고 나서 다시 수를 가득 놓은 가사(滿繡袈裟) 한 벌을 내려서 특별한 포상을 하였으니 그 돈독하게 공경하고 보호한 정성은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처음에 국사가 남쪽으로 떠날 때에 함께 공부하던 여러 사람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약속할 때 “나는 명리(名利)를 버리고 결사(結社)를 맺어 정(定)과 혜(慧)를 닦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으니(그들은) “지금은 말법(末法)시대로서(정과 혜를 닦을) 때가 아닌 듯하다”고 대답하였다. 국사가 안타까워하며 “때는 변화시킬 수 있지만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다. 교법(敎法)의 흥쇠(興衰)를 따지는 것은 삼승(三乘)의 방편적 가르침(權學)에 의한 생각이니 지혜로운 사람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탄식하자 대중들은 모두 탄복하여 “그러면 후일에 함께 모임을 맺어 반드시 이름을 ‘정혜(定慧)’라고 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 후) 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에 과연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세우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처음의 뜻을 이루었다. 결사를 송광사에 옮길 때에도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하였으나 뒤에 근처의 절에 같은 이름을 가진 것이 있어서 정부의 허가(朝旨)를 받아 바꾸었으니 수선사(修禪社)가 그것이다. 이 이름은 비록 달라졌지만 뜻은 같은 것이다. 국사의 뜻이 정혜(定慧)에 있었음은 이와 같다. 대안(大安) 2년(熙宗 6, 1) 봄에 어머니의 천도(薦度)를 위해 수십 일 동안 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수선사(修禪社)의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남아 법을 설할 날이 오래 남지 않았으니 각자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인 3월 20일에 병이나 8일 후에 돌아가셨으니 미리(죽음을) 아신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욕실에 들어가 목욕할 때 모시던 시자(侍者)가 게(偈)를 청하고 계속해서 질문하니 국사는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방장(方丈)에 들어가 문답을 계속하였는데 동이 트려 하자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다. “3월 27일”이라고 대답하자 국사는 법복(法服)을 갖춰 입고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서 “이 눈은 할아비의 눈이 아니며, 이 코는 할아비의 코가 아니다. 이 입은 어머니가 낳아 줄 때의 입이 아니며, 이 혀도 어머니가 낳아 준 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법고를 울려 대중을 모은 후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걸어서 선 법당(善法堂)에 이르러 평상시처럼 향을 피우고(설법) 자리에 올라 지팡이를 내리쳤다. 전날 밤에 방장(方丈)에서 문답한 말을 인연 삼아서 “선법(禪法)의 영험함은 불가사의하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그대들을 위해 다 말해 주기 위해서이다. 그대들이 어둡지 않은 한 가지로 물어보면 이 늙은이도 또한 어둡지 않은 한 가지로 대답해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좌우를 둘러보고 손을 쓰다듬으며 “산승(山僧)의 목숨이 모두 그대들 손에 달려 있으니 그대들이 옆으로 끌거나 뒤집어 당기는 것에 맡길 것이다. 힘이 있는 사람은 나오라”고 말하고 곧 발을 뻗어 상(床)에 걸터앉은 채 질문에 따라 대답하였다. 말이 조리 있고 의미가 상세하며 막힘이 없었는데 모두 《임종기(臨終記)》에 기록되어 있다.
■ 최후에 한 승려가 “옛날에 비야리성(毗耶離城)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질병을 보여(가르침을 베풀었는데) 오늘 조계산(曹溪山)의 목우자(牧牛子)가 병이 난 것이 그것과 같은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자 국사는 “너는 같고 다름을 배워 오라”고 말한 후 지팡이를 여러 번 내리치고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한 후 지팡이를 잡고 상에 걸터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편안히 임종하였습니다. 문도들이 향과 등을 차리고 7일 동안 공양하였는데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계속 자랐습니다.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니 유골은 모두 오색 빛을 띠었고, 사리(舍利)는 큰 것이 30립(粒)이고 작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수선사의 북쪽 언덕에 부도를 세웠습니다. 임금께서(국사의 입적을) 들으시고는 슬퍼하시며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감로(甘露)’라는 부도탑 이름을 내려 주셨습니다. 세상에 나신 지 53년이었고 스님이 된 지 36년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저술한 글에 《결사문(結社文)》과 《상당록(上堂錄)》, 《법어(法語)》, 《가송(歌頌)》 각 1권씩이 있는데(불교의) 종지(宗旨)를 드러내어 모두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혹자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인데 국사는 세상을 떠남에 여유 있게 하였으니 아마도 크게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한 도로서 얘기한다면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하면 노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문 것을 귀하게 여겼고, 장자는 기이한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는 등 과거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같게 하였다. 스스로 이상하고 기이한 자취를 남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존께서도 법 가운데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며 신통한 능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지만 쌍림에서 열반하실 때 ‘나는 지금 등이 아프니 곧 열반에 들것이다’고 말하고 곧 오른쪽 무릎을 발에 대고 돌아가셨을 뿐이다. 또 당나라 은봉선사가 거꾸로 서서 입적하자 비구니가 되었던 여동생이 이것을 보고 ‘오라비는 평생 동안 율법을 따르지 않더니 죽을 때에도 사람을 현혹시켰다’고 꾸짖었다. 지금 국사는 자리를 열어 설법한 것이 이 미 많은데 죽는 날에 다시 북을 두드려 대중을 모으고 자리에 올라 설법하고 상에 걸터앉아 입적하였으니, 이것은 그 도에 혹을 붙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나는 아니라고 답하고자 한다. 무릇 도(道)의 활용은 정해진 도리가 없고 사람의 행동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천하는 하나로 일치하지만 백 가지 생각이 다르고, 다른 길을 가도 가는 곳은 같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혹자의 얘기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또 역대의 선문조사(禪門祖師)들이 임종하며 법(法)을 부촉할 때 반드시 신이(神異)한 행적을 드러내었음이 ≪승사(僧史)≫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후대의 여러 승려들도 자리에 올라 설법하고 입적하였으니 흥선사(興善寺)의 유관(惟寬)은 자리에 올라 게(偈)를 설하고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고, 수산(首山)의 성념(省念)은 게(偈)를 하루 종일 설하고 자리에 올라 설법한 후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다. 또 서봉(瑞峯)의 지단(志端)은 머리를 깎고 목욕한 후 자리에 올라 대중에게 작별하고 편안히 앉아 입적하였고, 대령(大寧)의 은미(隱微)는 자리에 올라 게(偈)를 설한 후 입적하였으니 이들을 모두 비난할 수 있는가.
■ 슬프다. 말세의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 잘 믿지 못하니 먼저 깨친 사람이 좋은 방편으로 잘 인도하여(불법을) 흠모하는 마음을 내게 하지 않으면 비록 성인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여도 어렵게 된다. 국사의 마음을 살펴보건대, 이 또한 근기에 따라 사람들을 이롭게 한 한 가지 방편인 것이다. 국사가 입적한 다음 해에 법을 계승한 승려 혜심(慧諶) 등이 국사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올리고 후세에 보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자, 임금께서는 ‘그러라’ 하시고 신(臣)에게 명하여 그 비문을 짓게 하셨다. 나는 유학(儒學)을 공부했지만 제대로 이루지 못한 사람인데, 하물며 부처의 마음과 조사의 가르침, 세속 밖의 이야기를 어찌 제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임금의 명령에 쫓겨 사양할 구실이 없으므로 여기에 얻어들은 것을 다 하여 감히 그 훌륭한 아름다움을 그리게 되었다.
■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만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고 말로써 법(法)을 설명하지만 법(法)은 말에 있지 않다. 삼승(三乘)의 여러 가르침은 근기에 따라 차별이 있지만 지름길을 따라(徑截) 곧바로 들어가면 오직 한 문(門)뿐이다. 세존(世尊)이 꽃을 드니 가섭(迦葉)이 웃었고 달마(達磨)가 면벽(面壁)하니 혜가(慧可)가 팔을 베었다. 마음을 마음으로 전하니 둘이 아니고 법은 법과 더불어 다름이 없다. 참된 바람은 그치지 않으니 언젠들 이을 사람이 없겠는가. 국사의 몸은 새장에서 벗어난 학(鶴), 국사의 마음은 티끌 없는 거울이다. 하가산(下柯山)에서 길을 여시고 송광사(松廣寺)에서 얽매임을 벗었다. 선정(禪定)의 물은 맑으니 맑은 물엔 파도가 없고 지혜의 불은 빛나니 빛에 어둠이 없다. 뜰의 잣나무, 조사의 뜻에 대답하고 연못의 연꽃, 서방 극락을 얘기하네. 사중(四衆)이 섞여 둘러싸 있지만 부처는 침착하게 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죽고 사는 것을 허깨비로 보니 어찌 참과 거짓이 다를 것인가. 아, 국사가 지팡이를 흔드니 삼라만상이 모두 녹아버렸다. 바람이 버들 솜을 날리고 비가 배꽃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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