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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돈성불론 ①

 

1. 화엄과 선종의 성불론

■ 어떤 이가 목우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주장을 들어보면, ‘오늘날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날마다 사용하는 자기 무명의 분별종자를 모든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로 삼는 다음에 성품을 의지하여 선(禪)을 닦아야 비로소 묘미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한 ‘부동지’의 불과(佛果)는 본래 깨달은 이치로서의 부처(理佛)인가? 아니면 새로 이루어진(新成) 현상으로서의 부처(事佛)인가?

■ 예컨대 청량조사(淸凉祖師)는 『화엄경』의 「성기품(性起品)」에 의거하여, ‘부처의 지혜가 중생의 마음에 있다’는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부처의 지혜가 중생마다 스스로 있음이요(生生自有)이다. (이는 시교(始敎) 가운데 사지(四智)를 갖춘 깨달음의 종자(種子)와 『기신론』 가운데 물듬을 따르나 본성이 청정하다는 뜻을 취하여 여기에 의거하여 높이 판단하였다.) 둘째는 미래에 얻을 과위(果位)가 스스로 있음이요(當果自有)이다. (이는 중생이 미래에 얻을 부처의 과위가 현재, 미래, 과거 삼세(三世)를 융섭하기 때문에, 무명의 마음 가운데 있음이다.) 셋째는 다른 과위가 나에게 있음이다(他果在我). (이는 중생의 본래적 깨달음이 부처의 본래적 깨달음과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에, 로사나불(盧舍那佛)의 지혜가 이치를 따라 두루하여, 닦지 못한 중생의 생멸하는 팔식(八識)의 마음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원인도 짓고 결과도 짓는다. 이것을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일컫는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그대가 주장하는 바는 어디에 해당되는가?

■ 만일 다만 성품이 깨끗한(性淨) 본래의 깨달음(本覺)만을 반조하여, 부동지 부처의 과위로 삼는다면, 그것은 첫째에 해당할 것이요. 만일 일마다 걸림이 없음을 이룬 부처라면, 곧 둘째와 세 번째의 원융하게 성취한 부처에 해당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가에서 논하고 있는 ‘부처를 이루는 원융(圓融)과 항포(行布)의 뜻’은 바로 주초위(住初位)의 성불이다. 그러면 오늘날 마음 닦는 사람(禪宗)이 말하는 견성성불은 또한 역시 주초위에 오르는 것인가? 교가에서 논하는 믿음의 위계(信位)를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일만겁(一萬劫)을 지나도록 부지런히 닦아야 비로소 십신(十信)을 원만히 성취한다고 하는데, 오늘날 선종의 사람들은 이미 십천겁(十千劫)이 차서 주초위에 올라 성불한 것이 된다. 이것은 서로 너무 동떨어진 가르침이 되어 사람들의 공감을 받기가 쉽지 않다. 바라건대 이 같은 의심을 풀어주어 듣지 못했던 바를 듣게 하소서.

■ 내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산승은 젊어서부터 조사선에 투신하여 익힌 바가 (교종과는) 서로 다르다. 오늘날 강의하는 이들(교종)이 논의하는 ‘화엄의 성불론’에 관하여 어찌 내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선을 닦는 여가에 우연히 『화엄신론(華嚴新論)』을 얻어서 문득 음미할 만한 곳이 있기에, 그대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대는 마땅히 전에 배워 익힌 뜻과 이치로 구별하여 논쟁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잘 들어 밝히길 바란다.

■ 『화엄신론』이라 함은 과위(果位)를 얻으신 큰 성인이신 이통현(李通玄) 장자가 지은 것이다. 장자는 당나라에서 태어나 북경(北京) 방산(方山)의 토굴에 숨어, 용녀(龍女)가 공양을 장만하고 호랑이가 명령을 받았으며, 밤이면 등촉을 밝히지 않고 이빨(齒) 사이에서 광명을 내어 『화엄대론』 40권을 지었다. 그 문장은 질박하면서도 이치가 뛰어나 보통 규범을 넘어선 까닭에 이해하는 이가 드물었다. 내(지눌)가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지, 용장(龍藏) 속에서 그것을 찾아 감격하여 그 맛을 음미하면서 싫증을 내지 않고 그 취지를 궁구하였다. 오직 먼저 말을 잊고 뜻을 깨달으며,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은 자라야 우러러 믿을 수 있을 것이다.

■ 논주의 취지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요컨대 화엄경의 큰 뜻을 분석하여 말세의 큰 마음을 품은 평범한 사람(菩薩)으로 하여금 생사윤회의 길 위에서 모든 부처의 부동지를 단박 깨달아서(頓悟) 처음 깨달아 마음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므로 두 번째 법회에서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普光明地智)’로써 전각의 이름을 삼아 십신의 법문을 설하되, 바로 여래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큰 작용이 방소의 한계가 없이 중중하여 끝이 없음을 보이시어, 이것으로써 믿는 마음을 삼았다. 또 십색(十色) 세계와 십지(十智) 여래와 십수(十首) 보살을 들어 법을 내세워 보이며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먼저 동방의 금색 세계를 드는 것은 마음을 일으킨 자로 하여금 자기의 스스로 깨끗하고 때가 없는 법신(白淨無垢法身)의 이치를 믿게 함이요, 본래 섬긴 부처가 부동지의 부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무명(無明) 분별의 종자가 본래 모든 부처의 부동지임을 믿게 함이요, 상수(上首) 보살이 문수사리임은 바로 자기의 근본되는 지혜 가운데 잘 간택된, 모양을 초월한 오묘한 지혜(無相妙慧)를 믿게 함이다. 모든 중생 가운데 이 넓은 법을 듣고 마음을 일으키는 자는 하나하나 스스로 이 같은 법을 갖추고 있으니, 「광명각품(普明覺品)」에 이르되 ‘모든 곳이 금색(金色) 세계이며, 모든 곳이 부동지의 부처이며, 모든 곳이 문수라’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화엄신론』 가운데 널리 밝힌 것과 같다.

 

2. 연기문과 성기문

■ 오늘날 마음을 닦는 사람이 반조하는 부동지의 부처란 본래 깨달은 이치의 부처(理佛)인가? 아니면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부처를 말하는가? 만일 과지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비록 타과(他果)와 자과(自果)가 다르지만 반드시 원융문(圓融門)의 이치를 따르는 보편한 뜻으로써 그것을 논해야 하며, 또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융섭된다는 뜻으로서 논해야 한다. 그렇지만 만일 항포문(行布門)에 의거한다면, 이미 과지를 성취한 로사나불과 박지위(縛地位)의 닦지 못한 중생을 어떻게 외람되게 혼동하겠는가?

■ 대답하였다. 이 같은 의심에 굳게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니, 어찌 논주가 보인 바 관행의 문에 참여하겠는가? 모름지기 생각을 잊고 마음을 텅 비워 밝게 쉬고 융통하여야 비로소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문에서 보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동지는 또한 ‘두루 비추는 밝은 근본적인 지혜(根本普光明智)’이다. 이 근본이 되는 지혜를 이름하여 모든 부처의 과지라고 한다. 이 근본 되는 지혜가 이치와 현상, 성품과 모양, 중생과 부처, 나와 남, 오염과 깨끗함, 인행과 과위의 체성(體性)인 까닭에, 다만 오염을 따라 유전할지라도 그 가운데 성품이 깨끗한 이치를 잃지 않는다. 만일 화장세계의 주인에 의거하여 이름한다면 곧 이 근본 되는 지혜가 ‘로사나불’이 되고, 만일 금색세계의 주인에 의거하여 이름한다면 곧 이 근본이 되는 지혜가 ‘부동지의 부처’가 된다. 만일 큰 마음을 품은 중생이 돌이켜 비추어 보아 드러낸 자리를 의거하여 이름한다면 곧 이 근본이 되는 지혜가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부처(普光明智佛)’가 되며, 또한 자기 마음의 ‘움직이지 않는 지혜의 부처’이며 또한 자기 마음의 ‘로사나불’이다. 그러므로 한 이름을 드는 것을 따라서 다 삼신과 십신 등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 이 근본이 되는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 가운데 본래 나와 남, 중생과 부처, 오염과 깨끗함, 인행과 과위, 이치와 현상, 본성과 모양,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런 까닭에 『신화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부처님의 『화엄경』 법문은 큰 근기의 중생이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가 하나의 참된 법계(一眞法界)의 도임을 스스로 믿게 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러한 무리야말로 이 경을 감당하여, 감히 관행(觀行)이 서로 상응한다.” 또 말하기를,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는 ‘의지하고 머무름이 없는 지혜(無依住智)’와 허깨비 같이 장엄하여 머무는 문(幻住莊嚴門)으로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 하다. 법의 성품은 항상 시방 세계에 편만하여, 마치 그림자와 같이 색신(色身)에 상응하여 나타난다. 이는 자기의 몸과 같은 까닭이며, 본래 둘이 아닌 까닭이며, 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시방 세계 모든 부처의 지혜 몸이 그림자와 같고 말씀한 바는 메아리와 같다고, 이같이 믿고 이해(信解)하여야 마땅히 부처를 이룰 수 있다. 내가 지금 믿는 것도 또한 이같이 알며, 이같이 믿고 이해한다. 어찌 물러남이 있겠는가? 온 몸, 온 마음 그리고 일체 경계가 온전히 이 법신의 이지이다. 본래 의지하고 머무름이 없으며, 본래 얻을 바가 없으며, 일체의 언어와 분별이 허공 가운데 메아리와 같아서, 짓지 않는 인연에 응하여 소리를 이루어 본래 의지하여 머문 바가 없으니, 이와 같은 법을 깨달아 믿고 이해한다. 어찌 물러남이 있겠는가? 설사 습기(習氣)로 인하여 잠시 생각이 물러날 생각하였더라도, 신위(信位)와 주위(住位)는 한결같아 물러나지 않는다.”

■ 또 말하기를, “요컨대 항상 모름지기 스스로 자기의 몸과 말과 마음의 경계뿐만 아니라, 일체 모든 행과 분별이 다 여래의 몸과 말과 마음의 경계와 모든 행과 분별 가운데서 생하는 것이라고 믿으라. 그래서 그것들은 다 몸도 없고 성도 없으며 나도 남도 없으나, 다만 법계의 짓지 않는 자신의 성품을 반연(攀緣)하여 생겨나는 것이기에, 본래 근기(根機)와 처소(處所)를 얻을 수 없는, 성품(性品) 그대로 법계(法界)이여서 안과 밖과 중간이 없다. 응당 이같이 알며, 이같이 관찰하여 나를 관(觀)하고 남을 관함이 동일한 체성(體性)이다. 나와 나의 것이 없으니,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써 이같이 수행하고, 이미 스스로 알아 중생의 괴로움을 관하여, 스스로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를 마치 보현보살의 광대한 행원(行願)과 같이 해야 하니, 이것은 이 경의 오위(五位) 법칙에서도 한결같이 이와 같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이 경의 「여래출현품」에서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의 생각 생각마다 항상 부처가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니, 모든 부처와 여래가 이 마음을 여의지 않고 바른 깨달음을 성취함을 밝히는 까닭이다.

■ 또 말하기를, “일체 중생도 마음이 또한 이와 같아서 모두 다 여래가 성취한 올바른 깨달음이니, 이는 범부와 성인의 마음 자체가 맑고 깨끗하여 서로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다만 미혹됨과 깨달음이 있을 뿐, 터럭 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한 마음에 망령된 생각이 나지 않으면, 마음과 대상에 거리낌이 없어 성품이 스스로 생함이 없다. 그래서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어서 곧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니, 문득 이 법으로써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면 보현행(普賢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성품과 이치가 없는 오묘한 지혜로 일승(一乘)과 삼승(三乘), 인간과 천상계의 인과(因果)를 간택함을 이름하여 문수(文殊)라 하고, 차별의 지혜를 따라 동행하며 근기를 알아 중생을 이롭게 해서 쉬거나 멈춤이 없음을 이름하여 보현(普賢)이라고 하며, 큰 자비로써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기를 원함을 이름하여 관음(觀音)이라고 하며, 이 세 가지 마음, 관음보살의 자비, 문수보살의 지혜, 보현보살의 대원으로써 일시에 닦아 익힘을 이름하여 비로자나라고 하며, 마음에 익히어 익숙해짐이 성취됨을 이름하여 자재(自在)라고 하며, 법마다 밝지 않음이 없음을 이름하여 무애(無碍)라고 하며, 지혜가 근기에 따라 응하여 널리 시방 세계에 두루 하나 본성이 오고 감이 없음을 이름하여 신통(神通)이라고 한다. 닦음이 처음에 있으나 관습(慣習)을 모두 얻고, 미망(迷妄)은 여러 겁을 거쳐서 생겨나지만, 지혜의 태양은 옮겨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찌 짓지 않을 것인가? 배워 얻지 못하였더라도 오히려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나는 복보다는 뛰어날 것이지만, 어떻게 믿지 않고 닦지 않으면 괴로움과 궁핍함이 다하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 경은 부처의 과위문(果位門)이지만, 도리어 평범한 사람 가운데 즐거이 배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싫어하지 않는 자에게 생사윤회의 바다 가운데에서 일체의 지혜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실로 이승(二乘)이라면 부처님의 법회에 있을지라도, 귀머거리와 같아 듣지 못한다. 삼승보살(三乘菩薩)은 비록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하여 육신통(六神通)을 얻을지라도 괴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세간을 싫어하고 근심하여 정토(淨土)에 왕생하고자 한다. 설사 자비심이 있는 자라도 애착하는 습기(習氣)가 남아 있어서 세상에 머무르며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한다. 그래서 비록 이 가르침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믿는 마음을 내지 못한다. 이것은 경 가운데 스스로 밝힘과 같다. 이 경은 그렇지 아니하여 일체 중생이 모든 부처의 근본 되는 지혜로부터 나온 까닭에, 도리어 두루 비추는 밝은 근본의 지혜로써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시초로 삼는다.”고 하였다.

■ 위와 같이 논문의 뜻에 의거하여 세 번 반복해 깊이 생각해 보니, 논주가 밝힌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통하다’는 뜻은, 요컨대 마음을 관찰하여 도에 드는 자로 하여금 항상 스스로 자기의 몸과 말과 뜻과 경계의 모양이 다 여래의 몸과 말과 뜻의 경계로부터 생겨남(生)을 반드시 믿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다 몸이 없고 성품이 없어서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이고, 몸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다만 법계의 짓지 아니한 자기의 성품이 조건을 따라 생하는 까닭에, 인연과 인연의 모양이 온통 성품의 일어남(性起)이니, 성품이 그대로 법계(性自法界)이다. 안과 밖과 중간이 없음을 응당 이같이 알며, 이같이 관찰해야 한다. 그런즉 부처와 중생이 본래 두루 비추는 밝은 근본 지혜의 성품의 바다로부터 환처럼 나타남(幻現)인 까닭에, 중생과 부처가 그 모양과 작용이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온전히 두루 비추는 밝은 근본적 지혜의 모양과 작용이다. 그러므로 본래 하나의 몸이나 작용을 일으킴이 중중함이니, 곧 이는 성기문(性起門)에 해당한다.

■ 다른 곳(他處所論)에서 논한 바에 따르면,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통한다는 뜻은,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로사나불이 중생의 생멸하는 팔식 가운데 존재하고, 중생도 또한 부처의 지혜 가운데 있으며, 이치와 다르지 않은 한 현상(一事)이 온전히 이치의 성품을 융섭할 때, 저 이치와 다르지 않은 많은 현상(多事)이 의지하는 이치를 따라서, 모두 이 하나의 현상 가운데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곧 중생과 부처가 몸은 서로 다르나 이치를 따라 널리 두루함이, 마치 제석천의 그물 가운데 구슬과 구슬이 서로 몸이 다르나 비춤과 비춤이 서로 엮어지는 것과 같다. 이는 연기문에서 현상과 현상이 융섭함에 해당한다. 뜻과 이치를 가지고 논하고 또 논한다면, 비록 성기문과 연기문 양자가 일치하나, 관행하여 도를 얻는 문 가운데에는 뜻이 가깝고 멂이 있으니, 바라건대 모든 쟁론들을 버리고 묵묵히 생각해 보라.

■ 또 다른 곳에서 서술한 ‘성불의 의미’에 대해서, “먼저 비로자나의 법계를 깨닫고 뒤에 바다와 같은 보현보살의 행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비로자나의 법계를 밝히면 곧 널리 연기문 가운데의 현상과 현상이 서로 걸림이 없는 모양을 널리 펼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모름지기 생각을 일으켜 그것을 관찰할지니(起想觀之), 만일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불과의 장애 없는 원만한 덕을 잃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찌 불과의 원만한 덕이 망상으로 나타나겠는가? 만일 상으로 원인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것은 항상 되지 않은 법이다. 경에 이르지 않았던가? “만일 사람이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허공과 같이 깨끗이 해야 한다. 멀리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어서, 마음이 향하는 바에 전혀 걸림이 없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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