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돈성불론 ②
■ 만일 열등한 사람으로서 자기 마음에 있는 부처의 지혜를 돌이켜 비추어보아 밝게 드러내지 못하는 자를 위해서, 관상하기를 권하여 우러러 믿게 하고 물러나지 않게 한다면, 또한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화엄신론』의 뜻은 그렇지 않다. 다만 큰 마음을 품은 평범한 사람(菩薩)이,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로서 하나의 참된 법계(一眞法界)의 도를 돌이켜 비추어 보면, 문득 로사나불과 부동지의 부처 등을 깨닫게 하고자 함이다.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가 비록 그 명호가 다르고, 세계(依報)와 몸(正報)의 장엄이 각각 다르나, 모두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모양과 작용과 다른 물건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는 그 크기(量)가 허공이나 법계와 같아서, 한 부처도 이 근본 지혜로부터 일어나지 않음이 없으며, 한 중생도 이 근본 지혜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부처 및 중생이 이 지혜에 의거하여 허깨비와 같이 나오며, 이 지혜에 의거하여 허깨비와 같이 머문다. 태어남도 시작되는 바가 없으며 멸함도 이르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화엄신론』에 이르되, “자기 마음의 경계와 자타가 널리 참된 줄을 통달하면, 곧 널리 중생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과 여래의 마음 및 그 몸이 서로 동일한 하나의 모양임을 두루 보게 된다. 모두 허깨비와 같은 모양이어서 생겨남과 머무름과 소멸하여 부서지는 모양(生住滅壞相)을 보지 않으면, 곧 가깝다고, 그러나 여기에 미혹되어 따로 구하는 바가 있으면, 멀어진다. 이 같은 법은 경에서 널리 밝힌 바와 같다.”고 한 것이다.
■ 또 논주는 게송으로 “부처는 곧 중생의 마음속의 부처이다. 자기 근기(根機)에 따라 감당할 뿐이지 다른 물건은 없다.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자기의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라”고 말한다. 이 송의 뜻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오늘날 마음을 관찰하는 선비가 자기의 무명을 깨달아 성취한 과지(果智)가 그대로 이치의 부처(理佛)이고 곧 현상의 부처(事佛)이며, 그대로 자기의 부처(自佛)이고 곧 남의 부처(他佛)이며, 그대로 인행의 부처(因佛)이고 곧 과위의 부처(果佛)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처음의 물과 나중의 물이 동일한 성품의 물이다. 인행의 부처와 과위의 부처가 동일한 본성의 부처이다”고 한 것이다. 이미 ‘부처는 중생의 마음 속의 부처이고, 자기 근기를 따라 감당할 뿐, 다른 물건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성취한 과지의 노사나불의 바다와 같은 열 가지 몸이 온전히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부처이다. 다만 근기에 따라 감당하여 외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세계(依報)와 몸(正報)의 장엄이 본래 다른 물건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는 크기가 법계나 허공계와 같아서 모습과 작용이 자재하여, 능히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으며,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중생이 될 수도 있고 부처가 될 수도 있으며,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남이 될 수도 있으며, 드러날 수도 있고 감추어질 수도 있으며, 당겨질 수도 있고 펼쳐질 수도 있으며, 거스를 수도 있고 따라갈 수도 있으며,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오염될 수도 있고 맑을 수도 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큰 빛의 창고는 모든 법을 함섭하며 온갖 변화의 근원이 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노사나불이 평범한 사람의 경지(凡夫地)로부터 비로소 스스로 발심하여 보살도를 행해서 과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로사나불이 갖추고 있는 큰 자비, 큰 지혜, 큰 서원, 각각의 모든 생각, 각각의 모든 행, 각각의 모든 법, 각각의 모든 순간, 각각의 모든 처소가 다 자기 마음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작용이다. 보광명지(普光明智)가 크고 환하며 비어 있고 맑으며 영험하고 오묘하며 한계가 없으며, 위대한 작용이 자재하여 법답게 항상 자연스럽다. 바야흐로 어떤 한 가지 법이 조건을 따라 생겨나면, 자기 마음의 성품이 일어난 공덕이 아닌 것이 없다. 총상(摠)과 별상(別), 동상(同)과 이상(異), 성상(成)과 괴상(壞)이 동시에 자재한 까닭에, 지혜로써 비추면 볼 수 있을 것이요 분별된 의식으로 생각하면 알지 못할 것이다. 또 자기 마음 안에 있는 모든 부처의 보광명지로써 널리 일체 중생을 비추어 보면, 중생의 모양이 곧 여래의 모양이며, 중생의 말이 곧 여래의 말이며, 중생의 마음이 곧 여래의 마음이다. 나아가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일이나 물건을 만들어 내는 따위(工藝技術天文算數等)의 기예가 다 여래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가 운영하는 모양과 작용으로 전혀 특별한 차이가 없다. 다만 이 중생이 스스로 짓고 스스로 속아서, 스스로 평범함과 성스러움, 자기와 타인, 원인과 결과, 더러움과 깨끗함, 본성과 모양 등을 보아서 스스로 분별을 내고 스스로 물러남을 내는 것이지, 결코 보광명지가 이와 같은 것을 지은 것이 아니다. 만일 용맹한 마음을 내어 자기의 무명이 본래 신령스럽고 본래 참되며, 공이 없는 큰 작용이 한결같은 법을 깨달으면, 곧 문득 이것이 모든 부처의 부동지이다. 그러므로 논주는 크고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간절히 “일체 중생이 본래 모든 부처의 근본되는 지혜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니, 다시 근본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를 보리심을 일으키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자기의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라”고 하였다. 어찌 지혜가 있는 자로서 옛 성현의 이 같은 간곡한 말씀을 듣고도 믿음을 내지 않고, 또한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지 않으면서 언쟁으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겠는가?
3.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
■ 물었다. 그대가 설명하는 바를 들으니 심히 깊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처와 중생이 동일한 몸(同體)이라는 의미요, 서로 다른 몸(異體)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 시방세계에서 몸(正報)과 세계(依報)가 물든 연기(染緣起)와 깨끗한 연기(淨緣起)로서 분명하게 차별이 있어 자타의 상속이 각각 다르다.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로사나불을 어떻게 한결같이 자기의 부처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주장은 『화엄경』을 주석한 제가들이 논하는, ‘로사나불의 과지가 의거하는 이치와 중생의 생멸하는 팔식이 의거하는 이치가 하나의 몸인 까닭에, 의지하는 이치를 따라서 닦지 않은 중생의 마음 가운데서, 원인을 짓기도 하고 결과를 짓기도 한다’고 하는 것과 같지 않다.
■ 대답하였다. 앞에서 이미 논하였다. 다만 마음을 쉬어 쟁론만 하지 말라. 생각을 비워 안으로 비춰서 오묘한 과위를 성취하는 것이 요긴하다. 어찌 다시 묻는가? 이미 질문을 제기하였으니 내가 다시 말하고자 한다.
■ 만일 연기문에서 융섭의 의미를 논한다면 진실로 그대가 비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논주(李通玄)의 지취(性起門)는, 몰록 부처의 지혜를 깨달은(頓悟) 큰 마음을 지닌 평범한 사람을 위하여, 바로 모든 부처의 보광명지 과위의 바다인, 하나의 참된 법계(一眞法界)의 도를 곧바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말을 여의(離言)한 운데 어쩔 수 없이 설명한 것이다. 만일 말에 따라 집착한다면, 같음 가운데 다름이 없고 다름 가운데 같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말한다면 곧 남이 아니요 남을 말한다면 곧 자기가 아니다. 만일 뜻을 얻어 이해한다면, 동일함이 곧 그대로 차이에 맞아떨어지고, 자기가 곧 그대로 남이 된다. 이제 뜻을 얻어 이해한 자를 위하여, 차이가 있는 모습에서 동일한 모습을 갖추고, 남의 부처(他佛)에서 자기 마음의 부처(自心佛)가 갖추어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또 오늘날 몰록 깨달은(頓悟) 자의 입장에서 법계를 원만히 비추어볼 때, 자기 마음의 경계가 본래 나와 남, 범부와 성인, 인행과 과위를 본래 갖추고 있으며, 다만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가 부처님의 과위임을 설한 것이다. 구경에는 말을 떠난 경계이기에, 같지도 않고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그대가 만일 오늘날 범부와 성인의 상속이 각각 다르다는 견해에 집착하여, ‘나의 부처와 남의 부처 혹은 같은 모양과 차이가 있는 모양을 함부로 혼동할 수 없다’고 한다면, 곧 이는 완전하게 치우친 생각으로, 감정과 분별된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니, 어느 때에 중생과 부처가 원만하게 함께 갖추어 동일(同)과 차이(異)에 자재한 본래 지혜의 경계를 터득하여 들어가겠는가? 만일 오직 인과문만 논한다면 종일토록 입씨름만 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관행문에 의거해서, 보리를 속히 증득하고 세상의 티끌과 수고로움을 벗어나서 널리 미혹된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혜명을 잇는 자라면, 항상 자기의 한 마음에서 범부와 성인, 인행과 과위, 의보와 정보의 차별을 융회하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육상의 뜻이 갖추어지지만, 감정과 분별된 지식으로는 알 바가 아니다. 나중에 마땅히 다시 밝히려니와, 이것이 이 『화엄신론』의 요지요, 모든 성인의 온전한 가르침이다.
■ 「여래출현품」에 이르지 않았는가? “보살마하살이 이 법을 듣고, 큰 관찰로서 삼 세의 모든 부처가 동일한 몸의 성품인 것을 알며, 능히 선한 근기의 회향하는 지혜로 널리 이 같은 법에 들어간다.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며, 한 가지 법에도 반연하지 않는 채로 항상 한 법으로써 일체의 법을 관찰한다. 부처의 제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 같은 공덕을 성취하면 적은 노력으로 스승이 없는 자연의 지혜(無師自然智)를 얻는다.” 또 경에 이르되, “삼라만상이란 바로 한 법이 도장(印)을 찍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현수(賢首法藏國師)가 이르되, “한 법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한 마음이다.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융섭하니, 곧 한 법계의 총체적인 모습에 대한 법문의 요체이다. 오직 망령된 생각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일 망령된 생각을 여의면 오직 한 진여이다. 그러므로 해인삼매라고 말씀한 것이다. 해인이란 것은 진여의 본래 깨달음이다. 망령된 생각이 다하고 마음이 맑으면 온갖 모양이 가지런히 나타나는 것은, 마치 큰 바다에서 바람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다가 바람이 그치어 바닷물이 맑고 깨끗해짐에 따라 온갖 모양이 다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해인삼매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 만일 다만 한 중생의 마음 가운데에 입각해서 논하여 삼대가 동일하게 한 것과 처음 깨달음과 본래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의 뜻을 온전히 밝히면, 곧 저 『대승기신론』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한 바의 법이란 것은 중생의 마음을 일컫는다.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융섭한다. 이 마음에 의거하여 대승의 뜻을 드러내 보인다” 등과 같다.
■ 만일 한 중생의 마음에 입각해서 논하여,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섭한다(生佛互融)는 것과 인행과 과위가 동시적이라(因果同時)는 것의 뜻을 온전히 밝히면, 곧 화엄론주가 이르되 “부처는 중생의 마음속의 부처이다. 자기 근기의 감당함에 따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자기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라”라고 한 것과 같다.
■ 또 「여래출현품」의 게송에 이르되, “부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서 두루 중생의 마음에 있으되, 망녕된 생각에 얽힌 바가 되어 깨닫지 못하고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가 큰 자비로써 그로 하여금 망녕된 생각을 제거하게 하려 하고 이같이 출현하여 모든 보살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낱낱의 중생의 마음 가운데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섭하여 항상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 또 논에 이르되, “비록 10신 및 5위의 차제를 세운다고 할지라도, 필경에 보현행을 이루어 인행이 원만해지고 과위가 끝마쳐지며, 시기(時)도 옮기지 않으며,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관행에 이른 자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안다. 이 열 가지의 믿는 마음으로써 부처의 과위에 곧바로 이르고 보현행이 원만해지며 일시에 모두 이해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믿는 마음(信心)이라 한다. 이것이 오늘날 큰 마음을 품은 중생이 처음 믿는 마음을 내는 바의 인행과 과위가 동시적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뜻을 살피건대, 화엄과 기신론에서 논한 바의 일심과 삼대의 뜻이 상세(廣)하거나 간략(略)하거나, 펼쳐지거나(開) 합하여지(合)는 등은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지만, 모두 오늘날 평범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포섭된다는 뜻이다. 다만 언어의 가르침에 따라 종일토록 쟁론해서 자기의 오만과 이기고 지는 마음을 키우고 늘려 헛되이 일생을 지내면서, 돌이켜 비추어 부지런히 범행 닦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가? 옛 성현이 법이라고 일컫는 것이 모든 부처의 마음임을 어찌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부처의 지혜가 보살의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지 알지 못하고, 정녕코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것이 그대로 하여금 입을 벌려 종일토록 쟁론하고 관행을 닦지 않으면서, 도리어 다시 생사윤회에 빠져들게 하고자 한 것이겠는가? 만일 믿음의 근기가 있다면 세 번 반복해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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