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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결의론 ②

 

4. 돈교와 선종의 말 떠남

■ 다시 물었다. 돈교(頓敎)에서 교설을 비판하며 벗어날 것을 권하고 형상을 부수어서 마음을 없애라 한다. 선문의 화두에서도 또한 잘못된 알음알이(惡知惡解)를 깨뜨리고 집착을 벗어나 진리를 드러낼 것을 강조한다. 돈교와 선문이 진리에 들어가는 행상이 서로 같은데, 어찌하여 돈교는 다만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될 뿐 막힘 없는 법계를 깨닫지 못하고, 선종에서 경절문의 분지일발(噴地一發)은 법계의 일심을 자세히 깨달아 저절로 원융한 덕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하는가? 똑같이 말을 떠나고 생각을 떠났는데, 어째서 하나는 치우치고 하나는 원만하다고 하는가? 만일에 자기를 옳다 하고 남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증거가 있다면 한두 가지를 설명하여 이러한 의심을 제거해 달라.

■ 답하였다. 교학하는 사람들이 선법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것은 다만 의심을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禪)에서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은 화두에 대하여 파병(破病), 전제(全提), 구내(句內), 구외(句外) 등을 말하지만 이는 모두 사어(死語)로서 올 가미가 된다. 삼구의 부림을 받고 열 가지 병에 빠진 것이니, 어찌 활구(活句)를 참구하는 것이 되겠는가. 선을 오롯이 공부하는 사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교학을 하는 사람이 어찌 의심이 없겠는가.

■ 또한 돈교에서 인용한 언교는 한 부류의 생각을 떠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진여의 이치는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었다는 뜻을 설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大乘 起信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음의 진여(心眞如)는 곧 법계의 전체 모습이고 법문의 바탕(法門體)으로서, 이른바 심성은 불생불멸하고 모든 존재(一切諸法)는 오로지 망념 때문에 차별이 있게 된다. 만일 마음을 벗어나면 모든 경계의 모습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 법은 처음부터 말의 형상을 떠났고, 이름의 형상을 떠났으며, 마음의 대상에서 벗어나서 끝내는 평등하여 변이(變異)가 없고 파괴할 수 없다. 다만 한 마음뿐이므로 진여라고 한다. 묻기를, 그렇다면 여러 중생들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 깨달아 들어갈 수 있겠는가? 대답하여, 만일 일체 법에 대해서 비록 말한다고 하여도 말하는 주체(能說)와 그 대상(可說)이 없고, 생각한다고 하여도 또한 생각하는 주체(能念)와 그 대상(可念)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수순이라고 한다. 만일 번뇌로부터 떠나면 들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생각을 떠난 근기(離念之機)의 사람들이 들어가는 마음의 진여문(心眞如門)이다.

■ 진실한 궁극적 가르침에 의하면, 망념은 원래 공(空)한 것이므로 다시 떠날 것이 없고, 번뇌가 없는 모든 법(無漏諸法)은 본래 참된 성품(眞性)이 인연에 따라 묘하게 작용(妙用)한 것이므로 영원히 끊이지 않으며 또한 깨뜨릴 필요도 없다. 다만 한 부류의 중생들이 헛된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므로 부처는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세속과 출세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깨뜨린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을 들은 사람은 평등하고 형상이 없는 이치를 따라서 말하는 주체(能說)와 말할 수 있는 대상(可說)이 없고, 생각하는 주체(能念)와 생각할 수 있는 대상(可念)이 없다고 이해한 연후에 다시 이러한 이해와 생각을 벗어나 진여문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돈교를 다만 증리성불(證理成佛)을 이룬다고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여는 법계의 전체 모습이고 법문의 바탕(法門體)이므로 모든 존재의 본성이 되고 또한 모든 행위의 근원이 된다. 어찌 보살이 마음의 진여(心眞如)를 깨닫고서도 본성의 연기하는 내용을 알지 못하겠는가. 현수조사(賢首祖師)께서 다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을 이름하여 곧 부처라고 한다”는 등을 인용하여, 언설을 떠난 설명으로 돈교를 세운 것은 교설로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선문에도 또한 다양한 근기의 사람들이 있어 입문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유심과 유식의 이치에 의거하여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간다. 이 첫 번째의 현문에는 원교의 모든 사물이 막힘없이 통한다(事事無碍)는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불법의 알음알이(知見)가 오랫동안 마음에 있어 벗어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본분사(本分事)에 의지하여 지견을 떨쳐버리고 구중현(句中玄)에 들어가 그 첫 번째 현문의 불법지견을 깨뜨린다. 이 둘째의 현문에는 경절 문의 뜰 앞의 잣나무, 마삼근 등의 화두가 있다. 삼현문을 세운 승고선사(承古禪師)는 본분사에 상응하는 화두가 병을 깨뜨리는 말이라고 하여 두 번째 현문에 두었다. 그런데 지견을 떨쳐버리는 말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생사에 자유롭지 못하므로 세 번째의 현중현(玄中玄)을 세워 잠깐 침묵하거나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고함지르는 것 등으로 남겨진 지견을 마저 깨뜨렸다. 그러므로 삼현(三玄)을 둔 것은 본래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 하지만 만일 옛 조사의 처음 뜻을 생각하면 옳지 않다. 승고선사는 “근래의 수도하는 사람들이 모두 천태의 화정(天台華頂)과 조주의 석교(趙州石橋)를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잠깐 머물 곳이지 최종적으로 몸을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보안도선사(普安道禪師)는 소양(昭陽)의 뜻을 이어서 삼구(三句) 외에 별도로 일구(一句)를 두어 말하였다. “딱 맞아 떨어진 그 사람이 일어나 외친다면 삼구(三句)로 어찌 다 포괄할 수 있겠는가? 누가 무슨 일인가 묻는다면 남악(南嶽)과 천태(天台)라 하리라.” 이 천태와 남악이라는 담백한 말은 삼구의 안에 있으면 병을 깨뜨리는(破病) 말이 되고, 삼구의 바깥에 있으면 병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온전히 드러내는(全提) 말이 된다. 그래서 장로스님(長蘆師)은 “산승이 때로 절반으로 나누고 셋으로 쪼갰지만, 종문(宗門)의 일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이제 절반을 잇고 셋을 깨뜨려 버리니 온전히 드러났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운문대사(雲門大師)는 어느 때는 삼구 안에서 설법하였고, 어느 때는 삼구 밖에서 핵심을 보였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옛 사람도 또한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서 혹은 삼구 안의 병을 깨뜨리는 말로 여기기도 하고, 혹은 삼구 바깥의 온전하게 드러내는 말로 여기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경절문(徑截門)의 화두를 가지고 병을 없애는 것이다(破病),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다(全提), 삼구의 안에 있다(句內), 바깥에 있다(句外)고 하는 올가미를 만드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 그러나 지금 근본으로 삼는 경산대혜화상(徑山大慧和尙)은 조계(曹溪)의 바로 밑으로 이어진 정통계승의 제17대 본분종사(本分宗師)인데, 그가 세우신 경절문의 어구(語句)로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무엇인가 하면 스님이 제시한 ‘뜰 앞의 잣나무’, ‘마삼근’,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등의 화두는 모두 제시하는 법의 단서가 없으며, 다만 맛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화두를 준 후에 곧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정식(情識)을 아직 깨뜨리지 못하면, 마음의 불이 활활 타오른다. 바로 이때에 당하여 단지 의심하는 바의 화두를 들라. 예를 들어 어떤 승려가 조주(趙州)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조주는 없다고 했다는 화두를 들고서 깨어 있기만 하라. 왼쪽으로 가도 옳지 않고, 오른쪽으로 가도 옳지 않다. 있고 없음으로 헤아리지 말고, 참된 없음의 없음(眞無之無)이라고 따지지 말라. 이치로서 알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려서 따질 수도 없다. 눈썹을 세우고 눈을 깜박거리는 곳에 머무를 수 없고 말에서 살 길을 찾을 수도 없다. 의근 속에 머무르지 말고 화두가 일어난 곳에 관심을 갖지도 마라. 문자로 인증(引證)할 수 없고 미혹으로 깨달음을 기다릴 수도 없다. 다만 마음을 쓰지 말고, 마음을 쓰는 곳이 없을 때에 공(空)에 떨어짐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곳이 바로 좋은 곳이다. 홀연히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곧 고꾸라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 이와 같이 주석한 후에 화두를 주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움직이거나 멈추거나 앉았거나 눕거나 간에 다만 화두를 들고 깨어 있을 뿐이다. 다시 심성의 이 치에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다는 이해나 연기에 막힘이 없다는 이해 등은 전혀 없다. 한 생각이라도 있으면 불법에 지해가 되어 곧 열 가지 지해의 병에 걸리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놓고서 다시 놓고 놓지 않음, 병에 걸림과 걸리지 않음과 같은 헤아림까지도 없게 되면 홀연히 맛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화두에서 분지일발(噴地一發)하게 된다. 그러면 곧 한 마음의 법계(一心法界)가 분명해지므로 심성에 갖춰진 수많은 삼매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미가 구하지 않아도 모두 갖춰진다. 앞에 서 얘기한 것과 같은 치우친 뜻의 견문과 이해로 얻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선종 경절문의 화두를 헤아려 깨달음에 들어가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고 한다.

■ 별교(別敎)에서도 비록 열 가지 신비한 막힘없는 연기의 법문(十玄無碍緣起法門)이 불사의승(不思議乘) 보살의 보안경계(普眼境界)라고 말하지만, 지금의 관행하는 사람들은 정식(情識)을 써서 듣고 이해하므로 먼저 견문과 해행이 생긴 후에 증입하게 된다. 증입하여서는 이전의 견문과 해행을 떨쳐서 또한 생각을 벗어나 진리에 일치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얘기하는 선종의 교학 밖에서 따로 전한(教外別傳) 곧장 바로 증입하는 가르침(徑截得入之門)은 생각과 헤아림을 초월한 것이므로 교학하는 사람들이 믿기 어렵고 들어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선종에서도 낮은 근기의 얕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제 두세 가지 깨달음에 들어가는 인연을 간단히 이 야기하여 믿지 않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문의 경절득입이 돈교와 다르고 또한 원종의 득입에서도 교학에 의지함과 벗어남, 늦고 빠름에서 크게 다름을 알게 하고자 한다.

■ 수료화상(水潦和尙)이 등나무를 캐는 곳에서 마조(馬祖)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마조가 말하였다. “가까이 오라. 너에게 말해주마.” 수료가 다가오자 마조는 가슴을 잡고 한 번 걷어차 넘어뜨렸다. 수료는 곧장 일어나 손뼉을 치며 깔깔 크게 웃었다. 마조가 물었다. “너는 무슨 이치를 보았길래 웃는가?” 수료는 말하였다.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이 미묘한 뜻을 오늘 한 터럭의 끝에서 모두 그 근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조는 더 이상 그를 간섭하지 않았다. 수료화상은 단지 마조에게 한 번 걷어차였는데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미묘한 뜻을 어느 곳에서 다 알게 되었단 말인가. 그런 까닭에 선종의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은 돈교에서 단지 언어가 끊어진 이치로서 생각을 떠난 근기를 위하여 설하는 것과 관계없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 또 영가진각대사(永嘉眞覺大師)가 조계(曹溪)에 이르러 물병을 들고 삿갓을 쓴 채 선상(禪床)을 세 바퀴 돌고서 석장을 한번 내리치고 우뚝 섰다. 조사가 말했다. “무릇 사문은 3천의 큰 위의와 8만의 세행을 갖춰야 하는데 대덕은 어느 곳에서 왔길래 큰 아만심을 내는가?” 진각(眞覺)이 말했다.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하며 빠릅니다.” 조사가 말했다. “어찌하여 태어남이 없고(無生), 빠름이 없음(無速)을 깨닫지 못하는가?” 진각이 말했다. “증득하면 곧 태어남이 없음(無生)이고, 깨달으면 본래 빠름이 없음(無速)입니다.” 조사가 말했다. “그렇다. 그렇다.” 진각이 곧 이별을 고하자 조사가 말했다. “돌아감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진각이 말했다. “본래 스스로 움직임이 없는데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조사가 말했다. “누가 움직임이 없음을 아는 것인가?” 진각이 말했다. “화상께서 스스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조사가 말했다. “자네는 태어남이 없음(無生)의 뜻을 잘 깨달았다. 하룻밤만 묵어가라.” 진각은 하룻밤을 지내고 조계의 문밖에 나서 깨달은 도(道)를 말로 표현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배울 것이 끊어진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애써 망상을 버리려 하지 않고 또한 애써 참됨을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며 허깨비와 같은 빈 몸이 곧 그대로 부처의 몸이다. 내지 설산(雪山)의 비니초는 잡초가 없어 제호(醍醐)만을 만들어내니, 내가 항상 먹네. 마음 거울이 밝아서 두루 비침에 장애가 없고, 확연히 밝아 모래알처럼 무수한 세계에 두루 사무친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원만한 광명은 안과 밖이 없다. 한 성품이 원만하게 일체의 성품에 통하고 한 법이 두루 일체의 법을 머금고 있다. 한 달이 널리 일체의 물에 나타나고, 일체의 물에 있는 달이 한 달에 융섭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니, 나의 본성이 도리어 여래와 하나로다. 한 경지가 일체의 경지를 갖추니 물질도, 마음도 아니며, 업행도 아니다. 손가락 튕길 때 팔만의 법문이 모두 이뤄지고 찰나의 순간에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을 없앤다.

■ 이로써 생각컨대 영가진각대사(永嘉眞覺大師)는 단지 조사의 ‘어째서 태어남이 없음을 체득하지 않는가’라는 한 마디 말에 즉시 통의 바닥이 빠지듯 법계를 단박에 깨우쳤다. 단지 ‘체득한 곧 태어남이 없고 깨달음에 본래 빠름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깨달음의 문(證門)에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문 바깥(門外)에서는 말로 내어 깨달은 경계를 노래하였으니 곧 ‘한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두루 통한다’는 등이다. 그러므로 이 스님의 보안경계(普眼境界)는 일과 일이 원융하며, 중생과 부처가 원융하며, 지위가 서로 원융하며, 팔만의 법문이 원융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법계의 다함없는 공덕과 작용이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어찌 돈교에서 ‘초지(初地)가 곧 팔지(八地)이다’ 내지 ‘적멸한 진여(眞如)에 어찌 차례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다만 이치에 의거하여 모두 없애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 또 경산대혜화상(徑山大慧和尙)은 경전의 게송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살이 머무는 곳은 생각과 말로 나타낼 수 없으니 그곳의 생각과 말은 다할 수 없다. 이 불가사의한 곳에 들어오면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음이 모두 적멸한다. 그러나 또한 적멸한 곳에서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일 적멸한 곳에 머무르면 곧 법계량(法界量)에 얽매이게 되니 교학에서 말하는 법진번뇌(法塵煩惱)인 것이다. 법계량을 없애고 갖가지 뛰어남을 일시에 모두 없애야 비로소 ‘뜰 앞의 잣나무’, ‘삼(麻) 세 근’, ‘마른 똥막대기’,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한 입으로 서강의 물을 모두 마신다’, ‘동산이 물 위로 간다’는 등의 화두를 잘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홀연히 한 구절 아래에서 꿰뚫게 되면 비로소 법계의 한량없음에 드는 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실천하며,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 곧 한 터럭의 끝에 부처님의 나라를 나타낼 수 있고, 작은 티끌 속에 앉아서 큰 법륜을 굴려 갖가지의 법을 성취하기도 하고 갖가지의 법을 타파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마치 힘센 장사가 팔을 벌림에 남의 힘을 빌지 않듯, 사자가 돌아다님에 짝을 구하지 않듯 한다.”

■ 이로써 생각컨대 선문의 화두를 자세히 살피는 사람은 법계량을 없애고 갖가지 뛰어남도 모두 없앤 후에, ‘뜰 앞의 잣나무’ 등의 화두를 참구하여 홀연히 한 구절을 꿰뚫으면, 비로소 법계의 한량없음에 드는 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고 하게 된다. 이때 곧 한 터럭의 끝에서 부처의 나라를 드러내고 작은 티끌 속에 앉아서 큰 법륜을 굴리게 된다. 그런즉 화두의 의심을 깨뜨려서 분지일발을 일으키는 사람이 막힘이 없는 법계를 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선종의 열 가지 알음알이의 병을 없애는 것으로 돈교의 한 부류 마음을 벗어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가르침에 해당시킬 수 있겠는가.

 

5. 화엄원교와 교외별전

■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종의 깨달음에 들어가는 사람은 비록 돈교의 근기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일과 일이 막힘없음을 깨달았으므로 원교에는 해당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원교 외에 별도로 비밀히 전하는 가르침(敎外別傳)의 근기가 있다고 하는가.

■ 답하였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원교에서는 열 가지 막힘이 없는 법문(十玄 無碍法門)이 비록 불사의승 보살의 보안경계라고 하지만, 지금의 보통 사람들이 이를 실천하는 관행 방법에는 들어서 이해하는(聞解) 말길과 뜻길이 있기 때문에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를 얻지 못하고, 반드시 보고 들어 이해하고 실천한 후에야 깨달음에 들어가게 된다. 깨달음에 들어감에 있어서는 또한 선문의 무념과 상응하므로 <<화엄론>>에서는 ‘먼저 듣고 이해하여 믿음에 들어가고 뒤에 무사(無思)로 딱 들어맞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문의 곧바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사람은 처음부터 법의(法義)를 감각과 인식으로 듣고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맛이 없는 화두를 다만 들고 깨어있을 뿐이므로 말길, 뜻길, 마음으로 헤아림 등이 없고, 또한 보고 들은 후에 이해와 실천이 생겨난다는 등의 시간적 선후도 없이 홀연히 화두가 분지일발(噴地一發)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심의 법계가 분명하게 완전히 밝아진다. 그러므로 원교의 관행하는 사람을 선문의 일발(一發)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교학의 안과 밖이 크게 다르고, 시간의 늦고 빠름 또한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학 바깥에서 별도로 전한 가르침(敎外別傳)은 멀리 교학의 가르침을 벗어나므로 얕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이다.

■ 선문에도 비밀한 가르침을 감당하지 못하는 중간이나 낮은 근기의 사람들이 있고, 혹 어떤 사람은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진리에 들어가지만, 눈앞의 연기하는 현실을 제대로 꿰뚫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산대혜선사는 “억지로 쉬고 쉬는 사람들은 생각을 잊고 고요함을 품어서 알음알이를 내는 사람이 다”고 꾸짖었다. 혹은 일상 범부의 마음을 지극한 도(至道)라고 잘못 알고서 오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 채로, ‘단지 탕탕하게 그대로 놓아 자유롭게 하고,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억제하지 말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본래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대혜선사는 다시 “이 사람들 또한 자연의 바탕을 지키는 것을 궁극적인 원리로 여기는 알음알이를 내는 사람이다”고 꾸짖었다. 선종의 어떤 사람들은 또 삼계가 오로지 마음이고 모든 존재가 오로지 식(識)에 의해 나타난 것이며 일과 일이 원융하다는 것으로서 관행의 방법을 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초현문(初玄門)에서 법안화상과 덕소국사가 세운 것으로 원교와 같으나 단지 법을 설함에 있어 자세함과 간략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 규봉종밀선사가 “부처의 가르침은 만대(萬代)의 의지할 바이므로 이치를 자세히 보여주었고, 조사의 말씀(師訓)은 그 자리에서 해탈시키려는 것이므로 뜻이 말 없이 통한다. 말 없이 통하려면 반드시 말의 자취가 없어야 한다. 말 가운데 그 자취를 남기지 않아서, 자취는 뜻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 근원에서 드러난다”고 말하였다. 그런 까닭에 종사들이 근기에 따라 보여주신 사사무애법문은 대단히 간략한데, 이는 곧바로 끊어 깨달음에 들게 하기 위한 바이지 주석을 붙여 알게 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불안선사(佛眼禪師)는 불자를 들고 말하였다. “대중이여! 과거 이래의 많은 현인과 성인이 모두 이 산승의 불자 끝에 계신다. 각각 큰 연화에 앉아 미묘한 법을 설하니 그 빛이 교차하여 서로 얽혀서 보배실로 짠 그물과 같다. 믿을 수 있는가?” 또 말산니(末山尼) 료연(了然)은 먼저 화엄대경을 공부하고 뒤에 조사의 가르침을 배워 생사대사를 밝혀내고서 송을 지었다. “오온산(五蘊山)의 꼭대기에 옛 불당이 있으니, 비로자나가 밤낮으로 백호의 빛을 뿜는다. 만일 이곳에서 같지도 다르지도 않음을 안다면 곧 화엄이 시방에 가득하리라.” 이와 같이 종사들은 일과 일이 막힘이 없는 법문(事事無碍法門)으로 학인들에게 보였는데 그 자리에서 당장 깨닫는 사람들이 계속하여 있었다. 이러한 가르침을 교학 중의 현문과 비교하면 이치는 더욱 넓고 깨닫는 지혜는 더욱 원융할 것이다. 그러므로 효공(曉公)은 ‘지혜로운 사람의 관행(觀行)은 바깥의 여러 이치를 잊고 안으로 자기의 마음을 구하므로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선문의 종사가 보여준 막힘없는 법문은 원교와 같으면서도 말을 생략하였으므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에 더욱 친절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 그러나 선문의 이와 같은 참다운 말을 교문에 비교하면 생략된 것이지만, 만일 경절문의 화두에 견주면 아직도 불법의 알음알이가 있으므로 열 가지 병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선사는 “무릇 배움에 참여한 사람은 반드시 활구를 참구하여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영원히 잊지 않지만, 사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자신을 구하는 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혜선사는 맛없는 화두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참구하게 하여 열 가지 병에 걸리지 않고서 즉시 깨우쳐 곧 삼구를 얻게 하고 삼구의 부림을 받지 않게 하였다. 그런데도 어찌 돈교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가르침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또한 현수국사(賢首國師)가 이 선문의 이러한 근기를 돈교에 포함시켰다고 한단 말인가. 청량국사(淸凉國師)와 규봉국사(圭峯禪師)가 모두 간략하게 선종을 교학과 구별하여 ‘선종의 이념(離念)과 무념(無念)은 역시 이 가운데 자취를 없애고 허물을 막는 것이지만, 다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비밀한 뜻을 전하는 것은 여기서 문자로 논할 바가 아니다’고 얘기한 것이 분명한 증거이다.

■ 선종에는 또 근원과 갈래가 전혀 다르다고 논의가 있다. ‘법이 다르고, 문이 다르고, 근기가 다르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잘못되었다. 다만 처음의 번뇌에 묶인 범부로부터 곧바로 깨달음에 들어가기에 이르기까지, 문이 다르고 근기가 다르다고는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대보살이 직접 깨달은 일심법계까지 다를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고덕은 ‘조사의 도를 깨달아 반야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말세에는 없다고’ 말하였다. 이 뜻에 의거하면 화두에는 참의(叅意)와 참구(叅句)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요즘의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은 대부분 참의를 살필 뿐 참구를 얻지 못하므로, 원돈문에 의거하여 바른 이해를 밝혀낸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관행과 용심에 여전히 보고 들음으로써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다. (물론 이것은) 다만 지금의 문자법사들이 관행문에서 안으로는 마음의 있음을 헤아리고 바깥으로는 여러 이치를 구하고, 더욱 이치를 구함이 자세하여 도리어 바깥의 형상에 집착하는 병을 얻는 것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어찌 참구로서 의심을 깨뜨려 직접 일심을 깨달아 반야를 발휘하고 널리 유통하게 하는 사람과 같게 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와 같이 깨달음의 지혜를 드러낸 사람이 지금 시대에는 보기 힘들고 듣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지 화두의 뜻을 살피는 참의에 의지하여 올바른 지견을 밝히는 것만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의 견처(見處)도 교학에 의지하여 관행하면서 정식을 떠나지 못한 사람과는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다.

■ 부디 엎드려 바라건대, 관행하여 세상을 벗어나려는 사람이 선문의 활구(活句)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증득한다면, 매우 다행할 것이다.(看話決疑論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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