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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돈성불론 ④

 

5. 성불론

■ 묻는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이 마음을 깨달아 부처를 성취하는 것은 구경인가, 구경이 아닌가? 만일 구경이라면 어찌 처음 마음(初心)이라고 이름하며, 만일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면 어찌 올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이름하는가?

■ 대답하였다. 지금 묶여 있는 범부가 생사윤회의 땅에서 나날이 사용하고 있는 무명 분별의 종자로써 문득 모든 부처의 근본이 되는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根本普光明智)를 성취한다는 것은 모든 부처의 근본이 되는 지혜가 중생의 무명의 마음과 본래 하나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범부가 근본이 되는 지혜의 과위의 바다로써 처음 깨달아 마음을 내는 근원으로 삼는다. 만일 자기 마음의 번뇌의 본성이 스스로 여의어 있고 지혜의 본성이 본래 스스로 온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몰록 깨달은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일불승의 원돈문 가운데 과위로써 믿음을 성취한 자라 이름하겠는가?

■ 론에 이르되, “근본이 되는 지혜로써 처음 마음을 내는 보리심으로 삼는다. 근본이 되는 지혜가 원만한 까닭에 어느 때나 널리 사무치고, 온갖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큰 본체이며 온갖 행을 성취하는 처음과 끝이며 온갖 법을 내는 근원적인 처음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온갖 행을 지혜가 먼저 이끄는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지혜의 바다, 온갖 행의 바다, 보리심의 바다, 대자대비의 바다가 모두 이 근본이 되는 지혜의 과위의 바다에서 생성됨을 알라. 삼승교(三乘敎)에서는 이것을 오위(五位)의 뒤에 두었지만, 일승교(一乘敎)에는 십신초(十信初)에 두었다. 다만 중생의 종성이 날카롭고 둔함이 같지 않은 까닭에 가르침을 근기에 따라 세웠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승의 원돈문에 의거한 자는 십신초에서 근본되는 지혜의 과위의 바다를 터득함이지, 십천겁(十千劫)을 경과하며 닦는 연후에 십신이 꽉 찰 때에 이르러서 밝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화엄신론 가운데 다만 한 생애에 공덕이 끝남을 밝히고 본래 십천겁이란 글은 없다. 다만 처음에 마음을 발한 범부가 인연을 만나서 바야흐로 자기 마음의 근본이 되는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를 요달함이지 점진적인 닦음의 공력이 이른 연후에 깨닫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치에 대한 지혜가 비록 나타나지만 여러 생애 동안의 습기가 생각 생각마다 여전히 침노하여 몸과 마음을 조작함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십신범부(十信凡夫)가 이해에 막힘이 되는 곳(解礙處)이라고 한다.

■ 그러나 자기 무명의 본래 신령스럽고 본래 참되며 애씀이 없는 큰 작용이 항상 자연스러운 법을 깨달은 까닭에 스스로 십신 가운데 방편으로써 지관을 닦아 자연스럽게 공덕을 성취하고, 정혜가 원만하게 밝음을 문득 이름하여 발심주發心住라 고 한다. 「범행품」에 이르되 “처음 마음을 낼 때에 곧 아뇩보리를 얻는다”라고 한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십주에 든 뒤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로써 항상 세간에 처하며 근기에 따라 널리 응하여 중생을 교화하되 물들거나 집착함이 없으며 자비와 지혜가 점차 밝아지고 공행이 점차 더하여져 필경에 보현행을 성취한다. 인행이 원만하고 과덕이 마쳐지면 과보로써 한량없는 상호와 한량없는 장엄을 얻는다.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이 항상 시방 세계에 두루 하나,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항상함도 아니요 끊어짐도 아니니, 큰 서원과 큰 지혜의 자재한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큰 작용의 자재로움은 처음 깨달은 근본이 되는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 가운데 항상 자연스러운 행을 여의지 않는다. 지혜 자체가 원만하여 시절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지혜도 또한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가운데 습기가 연마하고 치유되고, 자비와 지혜가 점차 원만하여지며, 계위의 차례에 오르고 나아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에 마음을 냄(初發心)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지혜의 문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록 구경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당초부터 옮기거나 바뀌는 것이 없다. 마치 왕의 보인(寶印)이 한 번 찍히어 문채가 이루어짐에 있어서 전후가 없음과 같다. 일체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같고 다름을 육상(六相)의 뜻으로 회통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매한 자가 “근본이 되는 지혜는 오위(五位)를 갖추어 수렴한다는 것에 의거하여 논한즉 화엄의 가르침은 점차적인 닦음의 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다만 총체적인 모양(摠相)만 아는 자이다. 만일 수행과 이해함에 있어서 올라감과 나아감, 계위의 점진적인 차례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시절도 움직이지 않고 지혜도 달라지지 않음을 허락할 수가 없다. 마치 왕의 보인이 한 번 찍히어 문채가 이루어짐에 있어서 전후가 있음과 같다. 이는 다만 개별적인 모양(別相)만을 믿는 자이다. 모두 분별적인 견해를 여의지 못하여 이치에 대한 지혜가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론에 이르되, “초지의 육상의 법문에 들어가는 자는 맨 처음에 범부로서 능히 광대한 서원과 수행을 일으켜 들어간다. 그런 까닭에 십지(十地) 이전의 수행과 이 해로 말미암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뜻을 명확하게 하여 가르침을 베풂으로써 수행에 있어서의 걸림과 막힘, 절차와 단계의 안전함과 위태로움을 갖추어 밝히었다. 그러나 발심이란 일시에 다 몰록 닦아서(頓修) 한 시절 한 행위 안에 머물지, 절차와 단계의 차례에 따라 닦아옴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총별, 동이, 성괴의 법으로써 원융하게 볼 수 있다. 이 여섯 자의 셋 쌍의 법 가운데서 한 자에 여섯 가지의 뜻이 있다. 또 사람의 몸에 의거하여 유추하면 나머지는 어림잡아서 알 것이다.

■ 예컨대 한 사람의 몸에 여섯 가지 의미를 온전히 갖추고 있으니 머리, 몸통, 손, 발, 눈, 귀, 코, 혀 등의 작용이 각각 다름은 별상이다. 온전히 한 몸인 사대는 총상이며, 한결같이 이들은 공허하여 실체가 없음은 동상, 이같이 다름이 없는 본성을 가지면서 각각의 작용이 특수함이 있음은 이상, 각각 이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면 성상이다. 다만 작위가 없는 인연을 따라 있으면서 각각 자체적인 본성이 없고 본체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음은 괴상이다. 또 일체의 모든 중생이라 이름하면 총사이요, 어리석음과 지혜를 구분하여 이름하면 별상이고, 모두 부처의 지혜를 한 가지로 갖추고 있음을 이름하면 동상, 집착을 따라 업이 다름을 이름하면 이상, 지은 업을 원인으로 하여 과보를 받아 태어남을 이름하면 성상, 마음은 의지하는 바가 없으며 업의 실체는 본성이 없음을 이름하면 괴상이 된다. 또 시방 세계의 보신불을 이름하면 총상이요, 여러 보배로 장엄한 몸과 땅의 차별을 이름하면 별상, 동일한 법신의 이치와 지혜가 둘이 없음을 이름하면 동상, 지혜가 행을 따라 다름을 이름하면 이상, 중생을 성취시킴을 이름하면 성상, 주관과 객관이 다 공하여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음을 이름하면 괴상이 된다. 또 한 지혜가 오위를 갖추어 수렴함을 이름하면 총상이요, 수행과 이해가 올라감과 나아감을 이름하면 별상, 부처의 근본이 되는 지혜를 한 가지로 갖추고 있음을 이름하면 동상, 차별적인 지혜를 닦음을 이름하면 이상, 큰 깨달음을 성취하여 보현행을 갖춤을 이름하면 성상이 된다. 지혜의 본체는 의지함이 없어서 사용하되 작위가 없음을 이름하면 괴상이 된다. 또 삼세의 영구한 겁의 차별을 이름하면 별상이 되고, 지혜로써 널리 관조하여 한 찰나에 있음을 이름하면 총상이요, 업을 따라 좋고 나쁨이 있음을 이름하면 이상, 분별이 없어지고 견해가 다하여 좋고 나쁨의 때가 없음을 이름하면 동상, 지혜는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음을 이름하면 괴상, 근기에 응하여 법을 주는 것을 이름하면 성상이 된다.

■ 오늘날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를 깨달아 이해하는 부처의 과위는 법계를 증득한 곳에서 말을 여의는 까닭에, 비록 미리 말하지 못하나, 또 뒤에 닦는 연기문(後修 緣起門)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곧 원만하게 융통함과 수행의 차제라는 두 가지 뜻이 서로 성립되고, 구경의 경지와 그렇지 못한 경지의 두 가지 뜻이 서로 성립되며, 이치의 부처와 현상의 부처라는 두 가지 뜻이 서로 성립되고, 남의 과위와 나의 과위라는 두 가지 뜻이 서로 갖추어져 있는데, 십주에 이르러 부처를 성취함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다. 론에 이르되, “만일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인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경계 위에서, 옛날과 오늘을 존립시키고 멀고 가까운 시간의 구분을 하며 앞뒤의 삼세와 부처가 있는 곳과 없는 곳, 정법, 상법, 말법의 시기를 정하고,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에 대하여 옛 부처와 새로운 부처, 깨끗한 세상과 더러운 세상을 구별하는 자는 믿음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르되 “인행 가운데 모든 불과의 덕에 계합하되 터럭 끝만큼도 어긋나지 아니한다는 것을 믿어야 바야흐로 신심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일컬을 수 없으며, 크게 삿된 견해를 지닌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되 “처음 비로소 보리심을 일으킴에 근본지혜의 크게 원만하고 밝은 거울을 지니고 널리 모든 법을 비춘다” 하였다. 이러하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자기의 본성을 돌이켜 비추어보아 십신의 초심을 일으킨 범부의 지위는 논한 바와 같이 색각하기 어려운 과위의 덕을 갖추었다. 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에 무명이 머무는 땅의 번뇌로서 문득 모든 부처의 움직이지 않는 지혜를 삼기 때문이다.

■ 서원으로 행을 일으킬 때에 망녕된 습관이 비록 다하지 못하더라도, 온전히 이 근본 지혜의 운위하는 법이 인연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그 지혜가 처음 서원으로 일어나 공행이 다하고 서원이 꽉 차는 데 이르기까지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普光明智)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하므로 알아야 한다. 온전히 이 근본 지혜의 응용하는 법이 인연을 따라 항상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행이다. 모든 보신과 화신의 모양과 작용은 공행이 없는 지혜의 큰 자비의 행이다. 일체 중생에게 보는 바에 임하여 서원으로 말미암아 실천을 일으킨다. 자비의 선한 근기의 힘이 크고 작은 인연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양으로 일어난다. 마치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숨거나 나타남에 자재하여 허공 가운데 메아리가 사물에 따라 소리를 냄과 같아서, 항상 하지도 무상하지도 않다. 심식으로 아는 바 경계는 온전히 근본 지혜의 큰 작용이다. 이른바 보현의 차별을 아는 지혜라는 것은 다만 근본이 되는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본체가 운위하는 작용에 의거하여 말로서, 앞이나 뒤가 없다. 때문에 이르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普光明智)는 그 크기가 법계나 허공계와 같아서 중간이나 끝이 없으며, 본체가 모든 중생의 마음과 같아서 항상 모든 중생을 따르니, 마땅히 무슨 몸을 보며 마땅히 무슨 법을 듣겠는가? 시방 세계에 항상 한결같이 대응하여 나타나며 때를 잃지 않는다.” 비록 이같이 처음으로 마음을 일으킴으로부터 서원을 말미암아 행을 일으켜서 공행이 마쳐지고 서원이 꽉 차는 데 이르기까지 이는 중생의 마음 밖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르되 “부처는 중생의 본체를 증득하여 중생의 작용을 사용한다” 하고, 또 이르되 “부처는 중생의 마음속의 부처이고, 자기 근기에 따라서 감당할 뿐 다른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일체 중생의 무명 망상은 스스로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 온전히 이 중생심은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의 세 가지 몸과 네 가지 지혜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일체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자기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라”하였다. 근본 지혜의 부처는 스스로 삼대, 성상과 이사의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만 자기의 업에 따라 숨거나 나타남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중생이 악을 지으면 악은 어긋나는 작용이므로 과보로서 오염된 몫을 얻는다. 간접적(依報)이고 직접적(正報)인 과보의 차별이 비록 어긋나는 작용이지만 역시 근본 지혜 가운데 있는 본래의 악한 작용인 까닭에 지혜의 모양과 작용이 감소하지 않는다. 모든 부처가 선함을 닦아 과보로서 장엄을 얻으면 선함은 순조로운 작용이기 때문에 모양과 작용이 깊고 자연스러우며 깨끗하고 맑다. 비록 행을 일으켜 과보로서 얻어진 것이지만 역시 근본 지혜 가운데 본래 갖추어진 선한 작용이기 때문에 더하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각각 자기 업의 선악을 따르는 까닭에 깨끗하고 더러움과 괴롭고 즐거움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지혜의 본체, 모양, 작용은 오염되거나 깨끗한 인연에 따라 일어남에 있어서 본래 증감이 없다. 항상 현저하게 드러나 있으며 이 치와 현상이 걸림이 없다.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통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움직이지 않는 지혜의 불과를 깨달아 이해한 세 가지 몸과 네 가지 지혜 등은 원돈에 속한다. 육조가 설한 바의 “세 가지 몸이 원래 나의 몸이요 네 가지 지혜가 본래 마음의 밝음이다”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아 과보를 얻음과 서로 다르지 않다.

■ 이 근본이 되는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불과가 중생과 부처의 본 바탕이기 때문에 이치와 현상, 본성과 모양, 선함과 악함, 오염됨과 깨끗함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 소멸되어 있다. 이것은 원효 대사가 세운 하나의 큰 법신불과 같다. 지혜의 본체는 본래 삼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단지 본성이 깨끗한 본각의 이치의 부처일 뿐인 것이 아니다. 지혜의 본체는 본래 십세의 멀거나 가깝거나 더디거나 빠름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결과가 융섭되어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 지혜는 나의 마음의 부처이기 때문에, 다른 불과가 나에게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현수와 청량이 판단한 「성기품」 가운데 “부처의 지혜가 중생의 마음에 있다”는 말씀의 뜻은 장자의 론의 취지와 다소 다르다. 그러나 만일 연기문 가운데 융섭의 뜻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곧 오늘날 중생이 깨달아 이해한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 가운데 중생과 부처가 원만하게 융통하기 때문에, 다른 불과가 나에게 있다(他果在我)고 이르더라도 또한 옳으며, 십세가 원만하게 융통하기 때문에 미래의 결과가 스스로 있다(當果自有)고 이르더라도 또한 옳으며, 오염됨을 따르더라도 본성은 깨끗함이 있기 때문에 중생마다 스스로 있다(生生自有)고 이르더라도 또한 옳다. 그러나 오늘 몰록 깨달은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부처는 원만하게 융통함과 수행의 차제가 있는 연기문에 의거하여 논할 바가 아니다. 법계를 증득한 곳에 불과를 어찌 미리 말하겠는가?

■ 이 가운데 논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먼저 닦아서 나중에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이다. 비록 이것은 해오이지만, 단박에 깨달음을 일으키는 자리인 까닭에 언설로서는 설할 수 없는 과위의 본성의 바다와 같다. 또 일승의 불과는 십신의 초심에서 법이 그러하기에, 미래의 결과가 융섭된다는 논의는 아니다. 만일 뒤에 닦는 연기문 가운데 공행이 마쳐지고 서원이 원만해진 과위의 덕에 의거하여 논하면, 또 본 지혜의 본체 가운데 삼세의 일에 원만함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곧 미래의 과위가 각자 스스로에게 있음이 또한 미륵의 누각 가운데 나타난 미륵의 삼세에 걸친 인행과 과위와 더불어 같다. 그러므로 론에 이르되, “지혜에는 삼세, 고금, 내외, 원근의 헤아림이 없다.” 하고, 또 “참된 마음의 바탕이 원만하여 십세의 일이 서로 교철하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뜻이 비록 갖추어져 있으나 오늘의 몰록 깨달음은 전자의 뜻(解悟)에 해당한다. 만일 점진적인 닦음의 연기문에 의거한다면 곧 십신의 초심에서 먼저 깨달은 뒤 부지런히 지관을 닦아서 몸과 마음의 번뇌가 모두 다하여, 주초에 이르매 선정의 힘이 이미 성취되어 이해(解)함의 장애가 모두 없어진다. 깨달음을 증득하여 오위에 들어가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를 차례로 닦아서 등각위에 이른다. 이러한 닦음은 자기의 업으로 보는 참된 본체 가운데 나타나는 자기의 삼세에 걸친 인행과 과위 및 보신불의 경계 등을 눈앞에 대함과 같다. 그러므로 논에 이르되, “이 가르침은 비로자나 보신불이 설한 바이다. 문수사리가 기원정사로부터 각성에 가서 이 가르침을 전하여 설하였다. 보신여래는 다함이 없는 장엄과 공덕을 스스로 수용하는 몸이므로, 범부의 인간계나 천상계나 삼승이 볼 바가 아니다. 큰 마음을 품은 중생은 다만 그 가르침만 듣고 그 몸은 보지 못한다. 오직 여래의 가피지의 힘에 의지하여서는 볼 수 있고, 자신의 업력에 의해서는 볼 수가 없다. 큰 마음을 품은 중생은 각성의 동쪽 문수사리의 처소에서 상세히 들어서 가르침을 얻었다. 만일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하여 한 생애에 공행이 마쳐지면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가 눈앞에 대함과 같을 것이다. 곧 선재가 미륵 자씨(慈氏)의 누각 가운데 이르러서 본 부처의 경계가 바로 이러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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