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정혜결사문 ④
8. 수행과 정토
■ 묻기를, ‘요즘 수행하는 자들은 비록 선정과 지혜를 오로지 한다 하나 대개 도력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만약 정토(淨土)를 구하지 않고 이 더러움이 가득한 곳에 머무르면, 온갖 고난을 만나 아마도 물러나 잃게 될까 한다.’라고 하였다.
■ 답하기를, ‘이 또한 각각 그 사람에게 달린 일이므로 한 가지 예로 취급할 수 없다. 만일 큰 마음을 가진 중생이라면 이 최상승 법문에 의지하여, 사대(四大)는 마치 물거품이나 허깨비와 같고 육진(六塵)은 하늘 꽃과 같아서 자기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요 자기의 성품이 바로 법의 성품으로서 본래부터 번뇌의 성품이 스스로 여의어 성성(惺惺)이 바로 성성(惺惺)이며 역력(歷歷)이 바로 역력(歷歷)인 줄 확실히 신해(信解)한다. 이러한 신해(信解)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자는 비록 무시습기(無始習氣)가 있더라도 의지함과 머무름이 없는 지혜로 다스리면 근본 지혜가 돌아온다. 누를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어서 비록 방편의 삼매로써 혼침과 산란을 여의는 공이 있더라도 반연하는 생각의 분별이 바로 진성(眞性) 가운데 연기(緣起)하는 것임을 아는 까닭에 성품의 청정함에 맡겨 취하거나 거둬들이는 상(相)이 없다. 비록 바깥 인연이 거스리거나 따르는 경계를 만나더라도 모두 다 오직 마음인 줄 알아 자타(自他)와 능소(能所)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 분노와 기쁨이 가만히 놔둬도(任運)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에 맡겨 습기를 고루 다스려서 이치에 맞는 지혜를 더욱 밝게 하고, 인연을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여 보살의 도를 행하면 비록 삼계 안에 처하더라도 법성(法性)의 정토(淨土) 아닌 곳이 없다. 비록 세월이 지나더라도 몸은 시간을 여의지 않아 큰 자비의 지혜에 맡겨서 법으로써 인연을 따른다. 까닭에 이 사람은 비록 한 번에 지위로 뛰어올라 신통력을 구족한 뛰어난 옛 분보다는 못하더라도, 숙세(宿世)에 심은 선근(善根)으로 그 종성(種性)이 매우 날카로워 자기 마음이 본래 고요한 가운데 작용이 자재하여 성품은 고칠 수 없음을 깊이 믿는다. 까닭에 온갖 세상의 어려움에서도 어디에 물러나거나 잃어버릴 걱정이 있겠는가. 『화엄론(華嚴論)』에 이른바, ‘큰 마음을 가진 범부는 능히 믿음을 내어 증득해 들어가는 까닭에 여래의 집에 나니, 이미 부처의 집에 난 큰 보살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지금 이와 같이 마음을 닦는 자는 상근기라 할 것이다. 혹 어떤 수행자는 자기 마음이 청정하고 묘한 덕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 믿고 즐거워하여 닦아 익힌다. 그러나 옛부터 ‘나’라는 생각(我相)에 굳게 집착하여 습기가 편중하여 온갖 의혹과 장애(惑障)를 만나 정을 잊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공관(空觀)을 구족하여, ‘나와 남의 몸과 마음과 사대(四大)와 오음(五蔭)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나와서 헛되고 거짓되며 실답지 않음이 마치 뜬 물거품과 같아서 그 속은 텅 비었으니, 무엇을 「나」라 하고 무엇을 「남」이라 하는가.’라고 추적하여 논파해야 한다.
■ 이와 같이 깊이 관조하여 정진(情塵)을 잘 씻어내며 마음을 항상 겸손하고 공경하게 하여 교만을 멀리 여의고, 현행(現行)을 억제하여 선정과 지혜에 힘입어 점점 밝고 고요한 성품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만약 자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닦아 놓은 선행이 없다면 아마도 굽히거나 막히게 된다. 이런 경우라면 그저 부지런히 삼보에 공양하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도를 행하고 예배하며 참회와 발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폐하지 않아야 한다.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순후(淳厚)한 마음 때문에 부처님 위력에 가피를 입어 능히 업장을 녹여 선근이 물러나지 않게 한다. 이와 같이 자기 힘과 남의 힘으로 안팎이 서로 도와 위없는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둔다면 어찌 완성을 보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안팎으로 서로 돕는 가운데 두 부류의 원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하나는 자비의 원이 무거운 자는 이 세계에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여 자비와 지혜를 증장(增長)시켜 큰 보리를 구하여 태어나는 곳마다 부처를 뵙고 법을 듣는 그것으로 원을 삼는다. 이 사람은 따로 정토(淨土)를 구하지 않더라도 어려움을 만났을 때 뒤로 물러나거나 잃어버릴 걱정이 없다. 또한 청정함, 더러움, 괴로움, 즐거움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무거운 사람은 자신이 닦은 선정과 지혜와 모든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서 부처를 뵙고 법문을 들어 속히 물러나지 않음을 이룬 다음 중생에게 와서 제도하는 그것으로 원을 삼는다. 이 사람은 비록 안으로 비추어 보는 데 오로지 뜻을 두더라도 인욕의 힘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 예토(穢土)에 머무르면 온갖 고난을 만나 물러나거나 잃어버릴 걱정이 있을까 두렵다. 이렇게 안팎으로 서로 돕는 두 종류 사람의 뜻과 원이 성인의 가르침에 깊이 화합하여 모두 도리가 있다. 이 가운데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자는 밝고 고요한 성품 가운데서 선정과 지혜를 닦은 효과를 보아 저 부처가 안에서 증득한 경계에 멀리 계합한다. 까닭에 단지 명호(名號)만 부르고 거룩한 부처의 얼굴을 생각하여 왕생하기를 희망하는 자를 비교해보면 우열을 가히 알 수 있다.
■ 지자대사(智者大師)가 임종 때에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불수레(火車)의 모양이 나타나도 한 생각에 고쳐 뉘우치는 자는 오히려 능히 왕생한다. 하물며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훈습(薰習)하여 수행한 도력의 공이 허황되게 버려지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명경(淨名經)』에 이르기를, ‘불국토(佛國土)를 청정하게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따라서 불국토가 청정해진다.’라고 하였다. 『법보기단경(法寬記壇經)』에 이르기를, ‘심지(心地)에 부정(不淨)함만 없으면 서방 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다. 성품이 부정(不淨)한 마음을 일으키면 어떤 부처가 곧 와서 맞이하기를 청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수선사(壽禪師)가 이르기를, ‘마음을 알기만 하면 유심정토(唯心淨土)에 나겠지만 경계에 집착하면 반연하는 경계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불조(佛祖)께서 설한 바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뜻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인데, 자심(自心)의 근원을 여의고 어디에서부터 들어가려 하는지 모르겠다. 『여래부사의경계경(如來不思議境界經)』에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는 소유한 바가 없어 오직 스스로의 마음에 의지한다. 보살이 만약 능히 모든 부처와 법이 오직 심량(心量)인 줄 밝게 알아 수순하는 인(隨順忍)을 얻으면, 혹 초지(初地)에 들어가 사신(捨身)하여 속히 묘희세계(妙喜世界)에 나기도 하며, 혹은 극락의 청정한 불국토 가운데 나기도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비록 염불하여 왕생하기를 구하지 않더라도 다만 오직 마음임을 밝게 알아 수순하게 관찰하면, 자연스럽게 피안(彼岸)에 나는 것이 틀림없이 정해져 의심할 것이 없다. 근래 이치를 따져가며 공부하여 명리를 버리고 도를 구하는 사문들이 많으나 모두 바깥 현상에 집착하여 얼굴을 서방으로 향해 소리 높여 부처를 부르는 것을 도행(道行)으로 여긴다. 이전부터 배워 익혀 마음 자리를 밝힌 불조(佛祖)의 비결을 명리(名利)를 위한 학문이라 한다. 또한 분수에 맞지 않는 경계라 하여, 끝내 마음에 두지 않고서 일시에 버리고 떠나가니 이미 마음을 닦는 비결을 버린 것이다. 돌이켜 비추어 보는 공능(功能)을 알지 못하고, 다만 총명한 지혜의 마음만을 가지고서 평생의 힘을 허비하여 마음을 등지고 상을 취한다. 그러면서 성인의 가르침에 의지한다고 하니 지혜 있는 자라면 누구나 어찌 애통해하지 않겠는가.
■ 고산지원법사(孤山智圓法師)의『아미타경소(阿彌陀經疎)』 서문에 이르기를, ‘저 심성(心性)의 본체는 밝고 고요한 하나일 뿐이다. 범부와 성인도 없으며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도 없으며 목숨을 늘림과 재촉함도 없으며 청정함과 더러움도 없다. 그러나 그 심성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임에 있어서는 인연을 따라 변하여 곧 육범(六凡)이 되며 사성(四聖)이 되며 의보도 있고 정보도 있다. 의보와 정보가 이미 만들어지면 몸의 수명은 늘림과 재촉함이 있으며 국토는 청정함과 더러움이 있게 된다. 우리 부처님, 큰 성인께서는 밝고 고요한 그 하나를 얻은 분이다. 자(慈)라는 길을 빌리고 비(悲)라는 숙소에 몸을 의탁하여 장차 미혹된 뭇 중생들을 몰아서 그 근본을 회복하게 하고자 하신다. 이에 몸이 없지만 몸을 나투시며 국토가 없지만 국토를 나타내어 그 수명을 늘리고 그 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한다. 그 수명을 재촉하고 그 국토를 더럽게 하여 그들이 싫어하게 한다. 이미 기뻐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다면 그것은 점차적으로 깨우쳐주는 계획이 시행된 것이다. 비록 보배로 된 누각과 금으로 된 못이 눈을 즐겁게 하는 감상꺼리는 되지만 더 이상 그것이 마음을 혹하고 어지럽히는 색이 될 수 없기에 능히 오직 마음뿐이요 경계가 없음(唯心無境)을 통달한다. 비록 바람, 나무, 새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즐거움이 있더라도 그것이 시끄러운 소리(惉懘)가 아니므로 능히 삼보를 염하여 귀의하게 된다. 대저 이와 같다면 밝고 고요한 본체를 회복하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나는 지원법사(智圓法師)가 우리 부처가 베푸신 선한 방편의 본말을 깊이 아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껏 번거로운 글을 인용한 이유는 요즘 정토를 구하는 자로 하여금 부처의 뜻을 알고 수행하여, 공을 그르치지 않게 하려는 바램에서이다. 부처의 뜻을 아는 자는 비록 부처의 명호를 염하여 왕생하기를 부지런히 구하더라도, 저 부처의 경계가 장엄한 일들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오직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나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생각생각마다 혼침과 산란을 여의고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하여 밝고 고요한 성품에 어긋나지 않으면 나누어도 한 올 터럭만큼도 떨어지지 않는다. 감응하고 교통하는 것이 마치 물이 맑아 달이 나타나며 거울이 맑아 그림자가 분명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 이르기를, ‘부처가 실제로는 오신 것도 아니며 마음이 또한 간 것이 아니지만 감응하고 교통함은 오직 마음이 스스로 나타난 것이다.’라 하며 그 게송에 이르기를, ‘예배하는 이나 예배받는 이나 성품이 비고 고요하니 감응하고 교통하는 것은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반드시 마음 바깥의 경계를 취하여 모든 계교나 전도된 집착을 일으켜 온갖 마구니의 일을 초래하여 부처의 뜻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수도자들은 부디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 혹 어떤 수행자는 이름과 모양에 굳게 집착하여 대승(大乘)의 오직 마음이라는 법문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부처가 밝고 청정한 성품 가운데 본원력(本願力)으로 몸과 국토를 방편으로 나타내어 환주장엄(幻住莊嚴)으로 중생들을 거두고 이끄시며 중생의 눈과 귀가 기뻐할 만한 것을 보고 듣게 해줌으로써 유심무경의 이치를 통달하여 그 근본을 회복하게 하는 선한 방편을 쓰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도리어, ‘염불하여 왕생함에 오온으로 된 몸을 가지고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망정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에 혹 선정 닦는 이를 보면, ‘이 사람은 염불하여 왕생하기를 구하지 않으니, 언제 삼계를 여의겠는가.’라고 말한다. 이들은 성인의 가르침에서 밝힌 바, ‘마음이 청정한 까닭에 곧 부처의 국토가 청정하다’라는 뜻을 알지 못한다. 또 ‘닦은 바 마음의 바탕은 비고 밝아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 ‘몸에는 즐거움을 받을 곳이 없다’라고 하여 공에 떨어져버릴까 두려워하니(落空去) 공(空)에는 본래 공(空)도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원만하게 깨달은 여래의 밝고 청정한 마음만이 허공과 같이 법계에 두루하여 빈틈없이 중생의 마음을 싸안는다. 무명(無明)에 의해 분별하는 모든 중생의 마음은, 그 본바탕(當處)이 비고 맑아서,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와 동일한 지혜의 바다이며, 동일한 법성이다. 다만 중생들이 종일토록 그 가운데 밟고 다니면서도 스스로 그 은덕을 등질 뿐이다.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는 자는 집착하고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부처의 경계를 구하니, 그것은 모난 나무를 가지고서 둥근 구멍에 넣으려는 것과 같다. 어떤 수행자는 품성이 들떠 있고 거짓되어, 이러한 마음 법문을 듣고는 믿고 즐겁게 닦아 익힌다. 그러나 조금 얻고는 만족하여 더 이상 결택(決擇)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견(知見)이 원만하지 못하여 전적으로 본성만을 믿고 만행(萬行)을 닦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토를 구하는 것도 아니어서 왕생하기를 구하는 자를 보면 가볍게 여기는 교만을 낸다. 이상 두 부류는 불법 가운데 마음을 선하게 쓰지 않아 막히는 일이 많으니, 정말 슬프고 애통하다. 최하의 근기를 가진 사람도 지혜의 눈은 멀었으나 부처의 명호를 부르면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칭찬할 줄 아는데 어찌 부처가 뜻한 바의 수행을 모른다 해서 허물을 삼겠는가.
■ 어떤 수행자는 타고난 기운이 강대하고 정연(情緣)이 매우 깊어 이러한 마음 법을 들으면 어디에 뜻을 두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도 저 부처의 백호광명(白毫光明)을 관하며 혹은 범자(梵字)를 관하며 혹은 경전을 외거나 염불을 한다. 이와 같은 수행문에 마음을 오로지 하여 어지럽혀지지 않아 능히 망상을 조정하여 미혹되거나 막히지 않고 범행(梵行)을 성취한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사행(事行)으로 출발하여 감응하고 교통하여 마침내 유심삼매(唯心三昧)에 들어가는 까닭에, 역시 부처의 뜻을 잘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비석화상(飛錫和尙)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高聲念佛三昧寶王論)』에 이르기를,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자는 이미 수많은 냇물을 다 써본 자이듯 부처의 명호를 염(念)한 자는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또한 마치 맑은 구슬을 흐린 물에 넣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는 듯, 염불을 혼란한 마음속에 던지면 혼란한 마음이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계합한 뒤에는 마음과 부처가 모두 없어지니, 모두 없어지는 것은 선정이요, 모두 비추는 것은 지혜이다. 선정과 지혜가 이미 고르게 되면 어느 마음인들 부처가 아니며 어느 부처인들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이미 그러하면 온갖 경계와 온갖 인연이 삼매 아닌 것이 없으니, 누가 다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높은 소리로 부처를 부르는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수소설반야경(文殊所說般若經)』 가운데, ‘염불하여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얻는다’라고 밝힌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뜻이다. 이 뜻을 요달(了達)하지 못하면 도리어 견애(見愛)의 정을 가지고 저 부처의 모습을 관하거나 저 부처의 이름을 염(念)한다. 그리하여 세월이 오래되면 대개 마구니나 도깨비에 포섭되어 넘어지고 미쳐 날뛰면서 수고롭게 헛 공부로 일생을 뒤집는다. 근래 이와 같은 사람들을 빈번히 보고 듣는다. 모두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의보(依報)․정보(正報)와 선악의 인과는 오직 마음이 지은 바여서 가히 얻을 만한 본체가 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 앉은 가운데 천인상(天人像), 보살상(菩薩像), 혹은 상호(相好)를 구족(具足)한 여래상(如來像)이나 단정한 남녀와 온갖 공포스러운 모습들이 모든 갖가지 허깨비와 혹할 만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혹은 비록 밖으로 드러난 모습은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 마구니 일을 따라서 나쁜 깨달음과 그릇된 소견을 내니, 모두 나열할 수 없다. 이때에 혼미하여 살피지 못하고 스스로를 구제할 지혜가 없어 마구니의 그물에 마구 걸리니 참으로 슬프다. 『기신론(起信論)』에, ‘바로 한 생각이 유심이 되면(當念唯心) 경계가 그 자리에 서 소멸하여 마침내 번뇌꺼리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또, 이르기를, ‘수행자는 항상 지혜로 관찰하여 이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마땅히 바른 생각을 부지런히 하여 취하지 말고 집착하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가르친 뜻이 이와 같거늘 어찌 경계를 따르고 마음을 등지고서 부처의 보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요즘 수행자들은 대부분, ‘염불하여 왕생만 하면 그 다음엔 무엇이 있는가.’라고 한다. 이는 구품(九品)의 계급이 모두 자기 마음의 신해(信解)에 따라 크고 작고 밝고 어두움으로 발현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경전 가운데, ‘제일의 진리(第一義諦)를 알아 부지런히 수행해 나아가는 자를 상품으로 삼는다. 어찌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으로 기꺼이 우둔한 근기가 되어 제일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명호만 부르는가.’라고 하였다.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 이르기를, ‘구품(九品) 왕생(往生)이 위․아래로 모두 통하니, 화국(化國)에 놀면서 부처의 응신(應身)을 보기도 하고 보토(報土)에 나서 부처의 진신(眞身)을 보기도 한다. 혹은 하루 저녁에 상지(上地)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겁이 지나도 겨우 소승(小乘)을 증득하기도 한다. 예리한 근기도 있고 둔한 근기도 있으며 정(定기)에 든 자도 있고 산란한 의식을 가진 자도 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예나 지금이나 통달한 자는 비록 정토(淨土)를 구하더라도 진여(眞如)를 깊이 믿어 선정과 지혜에 전념하는 까닭에 저 빛깔․모양으로 장엄한 등등의 일이 오고 감이 없고, 구분과 한계(分齊)를 떠나 오직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나며 진여를 여의지 않음을 안다. 이들은 전식(轉識)이 나타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고 색의 구분과 한계(分齊)를 취하는 범부나 소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함께 정토에 난다고 하더라도,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수행하는 모습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하다. 어떻게 하면 요즘 대승의 유심법문을 배우는 자와 같이 선정과 지혜를 오로지 하여, 마음 밖에서 색의 분제를 취하는 범부나 소승의 소견에 떨어짐을 면하겠는가. 만약 조종(祖宗)의 문하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하여 비밀한 뜻을(密意) 가르쳐 주는 곳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경계에 있지 않다. 기화상(琪和尙)이 이르기를, ‘능히 조사의 도를 깨달아 반야를 발휘할 자는 말세에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권수문(勸修文)』에서는 모두 대승경론(大乘經論)의 뜻에 의지하여 명확한 논거를 삼았다. 뿐만 아니라 현재 전해지는 법문을 믿고 알아 발명(發明)한 이유와 함께 태어나고 죽으며, 정토와 예토로 왕래하는 득실(得失)을 간략하게 분별하였다. 그리하여 결사(結社)에 들어와 마음을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말을 알게 하여 입으로 하는 모든 논쟁을 쉬고 그 권(權)과 실(實)을 분별하여 대승 법문(大乘法門)을 바로 수행하는 길에서 노력을 허비하지 않게 하였다. 바른 인을 함께 맺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며, 행원(行願)을 함께 닦고 부처의 경지에 함께 나며 함께 보리를 증득케 하였다.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다같이 배워, 미래가 다하도록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자재(自在)하게 유희(遊戱)하면서 서로 주인과 짝이 되어 함께 도와 이룬다. 바른 법의 수레를 굴려(轉正法輪) 널리 중생들을 구제하여 모든 부처의 막대한 은혜를 갚으려 한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부처의 눈으로 이 보잘것없는 정성을 증명해 주시어 널리 이 법계의 미혹된 중생들을 위하여 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고자 하는 원을 내게 하소서. 아아, 중생들이 왕래하는 바는 육도(六道)이다. 그 중에 귀신은 유수(幽愁)의 고통에 잠겼으며, 새와 짐승은 놀라 달아나야 하는(獝狘) 슬픔을 품으며, 아수라(阿修羅)는 성만 내고 모든 하늘은 즐겁기만 하다. 생각과 마음을 가다듬고 보리로 나아가는 능력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면서 하지 않으면 나도 어찌하지 못한다.
■ 내가 저번에 대승경전을 열람하여 요의승(了義乘)의 경론에서 말한 내용을 두루 살펴보니 삼학(三學)의 문에 귀결되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었으며, 삼학에 의지하지 않고서 성도(成道)한 부처는 하나도 없었다. 『능엄경(楞嚴經)』에 이르기를, ‘과거의 모든 여래도 이 문에서 이미 성취하셨으며,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각각 원만하고 밝은 데 들어가며, 미래 수학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이와 같은 법에 의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지금 아름다운 기약을 맺어 미리 비밀한 서약을 펴서 마땅히 범행(梵行)을 닦게 해야 한다. 그러면 참된 종풍(眞風)을 우러르고 사모하여 스스로 굽히는 생각을 내지 않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삼학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훈습하여 덜고 또 덜어서 물가와 숲속에서 성인될 태(胎)를 오래 기른다. 달빛을 보며 소요하고,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자재하여 제멋대로 두어도 남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어떤 장소나 시간에 처해서도 마치 물결 따라 가는 빈 배와 같으며, 마치 허공을 능멸하는 떨어진 새의 깃털과 같다. 형용(形容)은 천하에 나타났으나 그윽한 신령은 법계에 잠겨서 근기에 따라 감응함에 항상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내가 사모하는 바의 뜻이 여기에 있다. 만약 수도하는 사람이 명리(名利)를 버리고 입산하여 이러한 수행을 닦지 않고 거짓되이 위의(威儀)를 나타내어 신심(信心)이 있는 시주(施主)들을 현혹시키면, 차라리 명예와 부귀를 구하며 주색에 탐착하여 몸과 마음이 거칠어지고 미혹한 채로 일생을 허비하느니만 못하다. 여러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모두 그렇다고 여기며 말하기를, ‘뒷날에 능히 이 언약을 지켜 숲속에 은거하여 함께 결사(結社)를 하면, 마땅히 정혜(定慧)로 이름합시다.’라고 하였다. 이 일로 해서 맹세하는 글을 지어 그 뜻을 맺었다. 그 후에 우연히 선불장(選佛場)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미처 가약을 맺은 기일을 성취하지 못한 지 지금에 이르러 거의 10년이 채워진다. 지난 무신년 이른 봄에 결사(結社)를 맺었던 재공선백(材公禪伯)이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주석(住錫)하게 되었다. 전날의 서원을 잊지 않고 정혜사를 결사하려 하여 급히 글을 보내 나를 하가산(下柯山)의 보문난야(普門蘭若)로 청하되 재삼 간절히 이르렀다. 내가 비록 오랫동안 산골짜기에 살아 스스로 어리석고 둔함을 지키면서 마음을 쓴 바가 없었지만 전날의 약속을 추억하며 더욱 그 간절한 정성에 감동하였다. 이 해 봄날을 잡아 동행인 강선사(舡禪師)와 더불어 이 절로 거처를 옮겼다. 옛날에 서원을 같이 한 이들을 불러 모으니 혹은 죽고 혹은 병들었으며, 혹은 명리를 구하여 미처 만나지 못하였다. 겨우 나머지 승려 3, 4명과 함께 비로소 법석(法席)을 열어 옛날의 서원(誓願)을 갚고자 한다.
9. 서원
■ 엎드려 바라건대 선종(禪宗), 교종(敎宗), 유교(儒敎), 도교(道敎)할 것 없이 세속에 염증을 앓는 고인(高人)이 티끌 세상을 훌훌 벗어버리고 세상 밖에서 고아하게 노니면서 안으로 수행하는 도에 전념하여 이 뜻에 부합하면, 비록 지난날 결사를 약속했던 인연은 없더라도 결사문(結社文) 뒤에 이름을 넣기를 허락하고자 한다. 그들을 미처 한자리에 모여 수행하지는 못했더라도 항상 망념을 거두어 들여 관조하기를 힘써 바른 인연을 같이 닦고자 한다. 이는 ‘미친 마음이 쉬는 곳이 바로 보리다. 청정하고 묘하고 밝은 성품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경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문수게(文殊偈)』에 이르기를, ‘한 생각의 청정한 마음이 도량(道場)이다.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칠보탑(七寶塔)을 만드는 공덕보다 수승하다. 보배로 된 탑은 결국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의 청정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까닭에 잠깐이라도 생각을 거두어 들인 무루의 인(無漏之因)은, 비록 삼재(三災)가 두루 닥치더라도 수행한 업이 담연(湛然)하니 비단 마음을 닦는 사람이 그러한 이익만을 성취할 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공덕으로 위로는 성상의 수명은 만세(萬歲)하고 왕실의 수명은 천세(千歲)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천하는 태평하고 법의 수레는 항상 굴러 삼세의 스승과 존귀한 부모와 시방 세계의 시주와 널리 법계의 살아 있거나 죽은 이들이 함께 법의 비에 젖어 삼도(三途)의 고뇌를 영원히 벗어나고 큰 광명의 곳간에 뛰어들며, 삼매에 든 성품의 바다에 노닐면서 미래가 다하도록 몽매한 이들을 일깨워, 등불과 등불이 서로 이어져서 광명과 광명이 다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공덕이 또한 법성(法性)과 시종(始終)을 함께 하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선(善)에 즐거워하는 군자들은 이에 깊이 유의하고 생각해야 한다. 때는 명창(明昌) 원년 경술(庚戌) 늦은 봄에 공산(公山)에 은거하는 목우자(牧牛子) 지눌은 삼가 쓴다. 승안(承安) 5년 경신(庚申)에 이르러, 공산(公山)으로부터 결사(結社)를 강남(江南) 조계산(曺溪山)으로 옮겼다. 이웃에 정혜사(定慧寺)가 있어 명칭이 혼동되는 까닭에, 왕의 뜻을 받들어 정혜사(定慧社)를 수선사(修禪社)로 고쳤다. 그러나 권수문(勸修文)이 이미 유포된 까닭에 옛 이름 그대로 조판하고 인쇄하여 유포한다.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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