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정혜결사문 ①
1. 결사의 이념과 동기
■ 공손히 들어보니,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나라’ 하였다. 땅을 떠나서 일어나려는 것은 옳지 않다. 일심에 미혹하여 가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자는 중생이며, 일심을 깨달아 끝없는 묘용(妙用)을 일으키는 이는 부처이다. 비록 미혹과 깨달음이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모두 한 마음(一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는 것은 옳지 못하다.
■ 나(知訥)는 어려서부터 선종(祖域)에 투신하여 선방(禪肆)을 두루 참방하였다. 그러면서 불조(佛祖)께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신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인연을 끊고 마음을 비워서 가만히 계합하게 하였고, 밖을 향하여 찾지 않게 하였다. 이는 ‘누구든지 부처의 경계를 알고 자 하거든 마땅히 자신의 마음(意)을 허공과 같이 청정하게 하라’는 경전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무릇 경전을 보고 듣고 익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법(佛法)을 만나기 어렵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 말씀대로 닦아야 한다. 이래야 스스로 불심(佛心)을 닦고, 스스로 불도(佛道)를 이루어 부처의 은혜(佛恩)에 직접 보답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침저녁으로 행한 자취를 돌이켜 보면, 불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我人)을 구별하고, 재물을 탐내는데 바쁘고, 욕망의 티끌 세계에 골몰한다. 도(道)와 덕(德)은 미처 닦지 않은 채로 옷과 밥만 축내고 있으니, 비록 다시 출가(出家)하더라도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 슬프다. 대저 삼계(三界)를 여의고자 하면서도 정작 번뇌를 끊는 수행은 하지 않는다. 몸만 남자일 뿐 장부의 뜻은 없다! 위로는 도를 밝히는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가운데로는 네 가지 은혜(四恩)를 저버렸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내가 이 점을 길게 탄식해 온 지 오래되었다가, 임인년(壬寅年) 정월에 개성(開城)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올라갔다. 하루는 도반 십여 명과 더불어 약속하기를, ‘이 법회가 끝난 후에 마땅히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림(山林)에 은둔하여 함께 결사(結社)하자. 항상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고루 익히는 데 힘쓰며, 예불하고 전경(轉經)하고 나아가 일하고 함께 작업(運力)하는 데 이르기까지 각각 소임대로 살며, 인연을 따라 심성을 수양하여 한 평생을 구속 없이 지내면서 멀리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의 높은 수행을 따른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2. 정혜와 정토업
■ 여러 도반들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지금은 말법(末法)의 시대이다. 정도(正道)가 잠겨서 숨어버렸다. 어떻게 선정과 지혜로만 힘쓸 수 있겠는가? 부지런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念)하여 정토(淨土)의 덕업(德業)을 닦는 편이 낫지 않는가?” 내가 말하였다. “시대는 비록 변한다 하더라도 심성(心性)은 바뀌지 않는다. 법도(法道)가 흥망성쇠 한다고 보는 것은 바로 삼승권학(三乘勸學)의 소견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응당 이와 같은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대들과 나는 최상승(最上乘)의 법문(法門)을 만나서 보고 듣고 훈습(薰習)하였다. 어찌 숙세의 인연(宿緣)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경사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분에 넘친다는 생각으로 삼승권학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면, 옛 조사들(先祖)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끝내는 부처의 씨앗(佛種)마저 끊어버릴 사람이라 할 만하다. 물론 염불(念佛), 전경(轉經), 만행(萬行) 등은 사문(沙門)이 일상에서 지녀야 하는 법이므로 방해가 될 리 없다. 하지만 근본은 궁구(窮究)하지 않고 상(相)에만 집착하여 밖에서 구한다면, 지혜 있는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을 살까 두렵다.
■ 화엄론(華嚴論)에 이르기를, ‘일승교문(一乘敎門)은 근본지(根本智)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체지승(一切智乘)이라 한다. 시방세계(十方世界)는 허공과 같아서 그대로 부처의 경계(佛境界)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과 중생과 마음의 경계가 서로 상응하는 바가 마치 그림자가 겹치는 것과 같다. 부처가 있는 세계니 부처가 없는 세계니 말하지 않으며, 상법시대(像法時代)나 말법시대(末法時代)를 설하지 않는다. 이러한 때가 바로 항상 부처의 시대이고, 항상 정법시대라고 설하는 경이 요의경(了義經)이다. 그러나 이쪽은 예토(穢土)이며 저쪽은 정토(淨土)이고, 부처가 있는 곳과 부처가 없는 곳, 상법시대와 말법시대가 있다고 설한 경은 모두 불요의경(不了義經)이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여래(如來)께서 사견(邪見)으로 전도(顚倒)된 모든 중생들을 위해 출현하시어 복덕(福德)의 경계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여래께서는 오시지도 가시지도 않으셨다. 오직 도와 상응(相應)하는 자라야 지혜(智)의 경계(境)가 저절로 합해져 여래가 출현했느니 사라졌느니 하는 소견을 내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정(定)과 관(觀)의 두 문(門)으로 마음의 때(心垢)를 다스려야 한다. 망념과 상(相)을 남겨둔 채 자신의 소견(我見)대로 도를 구한다면, 끝내 상응하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지혜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스스로 교만을 꺾고 철저하게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바야흐로 정혜(定慧)의 두 문(門)을 결택(決擇)하게 될 것이다.’ 선대 성인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어찌 감히 방자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맹세코 요의(了義)의 간절한 말씀을 따르고, 권학(勸學)의 방편(方便)으로 베푼 말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문(沙門)들이 비록 말법시대에 태어나서 성품이 완고하고 어리석지만 그렇다 하여 스스로 퇴굴하여 상(相)에 집착한 채 도를 구한다면, 종전에 배우고 터득한 선정과 지혜의 묘한 법문은 다시 누가 한단 말인가. 행하기 어려운 까닭에 버려두고 닦지 않는다면, 지금 닦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여러 겁(劫)을 지나더라도, 더욱 닦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억지로라도 닦는다면, 닦기 어려운 수행이라도 닦아 익힌 힘 때문에 점차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옛날에 도를 이룬 사람 또한 범부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이가 있었던가. 또한 여러 경론(經論)에서 말세의 중생이라고 무루도(無漏道) 닦는 것을 금지한 곳이 있었던가. 『원각경(圓覺經)』에서 ‘말세 여러 중생이 허망한 생각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현세의 보살'이라고 말씀하셨다. 『화엄론(華嚴論)』에서는, ‘이 법을 범부의 경계가 아니라 보살이 행할 바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의 지견(知見)을 없애고 정법(正法)을 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수행할 것이다. 설령 수행하여 얻지 못하더라도 선근 종자(善種)를 잃지 않아서 오히려 내세에는 좋은 인연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듣고서 믿지 않아도 부처 종자와 인연을 맺을 것이며, 공부하여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인간 천상에 태어날 복은 넉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말법과 정법의 시대가 다름을 따지지 말며, 자신의 마음이 어둡거나 밝다고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신심을 내어 분수에 따라 수행하여 정인(正因)을 맺으면 겁약(劫弱)을 멀리 여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세속의 즐거움이란 오래가지 않으며 정법(正法)은 듣기조차 어려운데, 어찌 헛되이(因循) 인생을 보내는가.
■ 생각해 보건대, 아주 먼 과거로부터 일체의 몸과 마음이 큰 고통을 받아서, 아무런 이익도 없이 현재에도 한량없는 핍박을 받고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뇌도 한이 없다. 버리기 어렵고 여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이 몸의 목숨은 나고 죽음이 무상하여 한순간도 지키기 어려우니, 부싯돌의 불이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아서, 무너져가는 파도나 석양의 햇빛으로도 비유할 수 없다. 세월은 회오리바람처럼 갑작스럽게 늙음을 재촉한다. 심지를 밝히지도 못한 채 차츰 죽음의 문에 다가간다. 옛날에 함께 놀던 이들을 생각해 보면, 현명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 오늘 아침 손꼽아 보니 열에 아홉은 죽었다. 산 자도 저와 같이 차례로 쇠잔해 가는데 앞으로 얼마나 남았다고 다시 맘대로 탐욕, 분노, 질투, 아만, 방종으로 명예와 이익을 구하느라 세월을 헛되이 보내면서, 의미 없는 말장난으로 세상을 논하는가. 계율을 지킨 공덕도 없으면서 공연히 신도의 보시를 받아들이며, 남의 공양을 받으면서도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구나. 이와 같은 허물들이 한량없는데도 덮어 감추며 애통하게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만약 지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조심하여야 한다. 몸과 마음을 채근하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알아서 참회하고 조유하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많은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불조의 성실한 말씀만을 밝은 거울로 삼고 의지하여, 자신의 마음이 본래부터 영명하고 청정하며 번뇌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비추어 봐야 한다. 나아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결택하는 데 부지런히 하여 자기의 소견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서 단견을 내지 않고 공유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깨달은 지혜가 항상 밝아서 범행을 정밀하게 닦으며 큰 서원을 발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하니, 일신의 해탈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간혹 세간의 갖가지 일로 끌려 다니고 얽매이거나 병고(病苦)에 시달리거나 사악한 마구니에 의해 공포에 떨기도 한다. 이런 일들로 몸과 마음이 불안하다면 시방세계의 부처 앞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하되, 예불과 염불을 똑같이 행하는 소식의 때를 알아야 한다. 일상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 어느 순간에서든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은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서, 물거품이나 구름이나 그림자처럼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으며, 온갖 비방과 칭찬, 시비 소리가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나오되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나 바람소리와 같음을 밝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허망한 자타(自他)의 경계에서 그 근본 연유를 살펴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온몸을 고요하게 하고, 마음을 성(城)처럼 굳게 지켜서 밝게 비춤(觀照)을 증장시키면, 고요하여 돌아갈 곳이 있고 활연하여 간격이 없다. 이때가 되면 애증이 자연히 묽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더욱 밝아지며 죄업(罪業)이 자연히 끊어지고 공행(功行)이 자연히 증진된다. 그래서 번뇌가 다하면 생사가 끊어진다. 생사가 소멸된 까닭에 적조(寂照)가 앞에 나타나고 응용(應用)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이것이 일을 마친 사람의 ‘차례가 없는 가운데 있는 차례’이며, ‘공용(功用)이 없는 가운데 있는 공용’이 되는 것이다.
3. 수행과 신통력
■ 어떤 승려가 물었다. ‘스님이 지금 해설(解說)한 것은, 우선 자신의 성품이 청정하고 묘한 마음임을 신해(信解)해야 비로소 성품에 의지하여 선(禪)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로부터 스스로 불심(佛心)을 닦아 불도(佛道)를 이루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 선을 닦는 사람들은 신통한 지혜를 내지 못하는가. 만일 신통력을 드러낼 수 없다면 어떻게 여실(如實)한 수행자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신통한 지혜는 스스로 불심을 바르게 믿는 법력에 따라 가행(加行)하여 공을 들여야 얻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거울을 닦을 적에 때가 없어짐에 따라 점점 밝아지면서 완전히 밝아지면, 마침내 거울에 비친 영상(映像)의 천차만별이 나타남과 같다. 만일 신해(信解)가 바르지 못하고 공행(功行)이 깊지 못하여 혼미한 채로 졸고 앉아서 묵묵함을 지키는 것(守黙)을 선이라 한다면, 어떻게 신통력이 스스로 생기겠는가. 선덕(先德)께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자기 성품의 바다(性海)를 향하여 여실하게 닦으면 그만이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바라지 말라. 왜냐하면 이것은 성인에게는 주변적인 일(末邊事)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을 깨닫고 근본을 통달하기를 구한다면, 근본만을 얻을 뿐이지 그 주변적인 일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산인(史山人)이 규봉종밀선사(圭峰宗密禪師)에게 묻기를, ‘무릇 마음(心地)을 닦는 법이란 마음만 깨치면 그만인가. 아니면 별도로 수행하는 법문(行門)이 있는가. 만일 수행하는 법문이 따로 있다면 무엇으로 선문돈지(禪門頓旨)라 하며, 마음만 깨달아 요달했다면 왜 신통한 광명을 내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 규봉이 답하였다. ‘얼어붙은 연못이 전부 물인 것은 알지만 햇볕을 쬐어 녹아야 물이 된다. 마찬가지로 범부가 바로 부처임을 깨달았지만 법력(法力)을 밑천으로 닦아 익혀야만 하는 것이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 적셔야 비로소 논에 물을 대거나 물건을 씻는 공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망상이 다하여 마음이 신령스럽게 통하여야 비로소 신통한 광명의 영험을 발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 것 이외에 별도로 수행하는 법문(行門)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해 마땅히 알라. 상호(相好)나 신통력을 근심하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아 신해(信解)를 참되고 바르게 하며,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떨어지지 않고, 선정과 지혜의 두 문에 의지하여 마음의 모든 때를 다스려야 한다. 만약 신해(信解)가 바르지 못하면 닦은 바의 관행(觀行)이 모두 허사(無常)가 되어 끝내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를 두고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觀行)이라 한다. 어찌 지혜로운 사람의 행(行)이라 하겠는가. 다른 교가(敎家)에서도 관행의 심천(深淺)과 득실(得失)을 가려낸다. 비록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지만 그것은 학인(學人)에게 언변만 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현의 경지라고 높이 미루면서, 스스로 능히 안으로 마음을 찾지 않거나 오랜 시간 연마하지는 않고, 그 효과만을 알려 할 뿐이다. 또 원효법사(元曉法師)는 말하였다. ‘세간(世間)의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觀行)은 안으로는 마음이 있다고 계교를 내고 밖으로는 온갖 이치를 구한다. 이렇게 이치를 구함이 더욱 치열해질수록 도리어 바깥 상만을 취한다. 까닭에 멀리 갈수록 더욱 이치를 등지는 결과가 되어서, 마치 하늘과 땅 사이와 같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끝내는 물러나 포기하여 끝없는 생사의 윤회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의 관행은 이와는 밖으로 모든 이치를 잊어버리고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찾는다. 마음 찾기가 궁극에 이르면 이치마저 모두 다하고, 취한 바까지 모두 놓아버려서, 취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없어진다. 이러한 까닭에 능히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에 이르게 되고 끝내 물러나지 않아서, 머무름이 없는 열반(無住涅槃)에 머물게 된다. 한편 소승의 성인(小聖)은 마음에 먼저 나는 성품(生性)이 있다고 계교를 내는 까닭에 미세심(微心)을 거쳐서 마음이 아주 없어지게 되어 지혜도 없으며 비추어 봄도 없으니 허공의 경계(空界)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大士)은 마음에 본래 나는 성품(生性)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세상(細想)을 떠나 마음이 모두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대신에 진여에서 나오는 관조의 지혜가 있어서 법계(法界)를 증득해 안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 있는 사람, 소승 및 대승인의 관행(觀行)의 득실(得失)을 변별(辨別)하여 털끝만큼도 숨기지 않았으니, 선종이나 교종에서 예나 지금이나 뜻을 얻어 관행을 한 사람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에 통달하여, 망상으로 얽힌 반연이 본래 생겨나지 않음을 안다. 부처의 지혜(智智)의 작용 가운데 끊임없이 법계를 증득해 알게 되어, 어리석은 이와 소승과는 가는 길이 엄격히 다르니, 어찌 스스로의 마음을 관(觀)하지 않겠는가? 진실과 허망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한 청정한 업도 쌓지 않으면서, 먼저 신통한 도력(道力)만을 찾는가. 이는 비유하자면 배를 탈 줄도 모르면서 먼저 물길이 굽었음을 원망하는 사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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