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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정혜결사문 ②

 

4. 성품과 닦음

■ 물었다. 만약 자신의 참 성품이 본래부터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마음이 자재(自在)하는 대로 맡겨두어도 다른 옛 성현의 발자취(古轍)에 어긋나지 않을 것인데, 왜 관조함으로써 밧줄도 없는 곳에서 스스로를 결박하는가.

■ 대답하였다. ‘말법 시대에 사람들은 메마른 지혜(乾慧)가 많아 괴로움의 윤회(輪廻)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意)을 내면 허망한 것을 받들고 거짓에 의탁하며, 말을 하면 분수에 넘친다. 지견(知見)이 궁색하고 편협하며(偏枯)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같지 않다. 근래 선문(禪門)에서 대충 공부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병에 걸려 있다. 그들은 ‘기왕에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유(有)에도 무(無)에도 속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몸을 수고롭고 하여 망령되이 수행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에 무애(無碍)와 자재(自在)의 행(行)을 흉내 내면서 진정한 수행을 버린다. 이런 이들은 몸과 입이 단정치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더러워지고 비틀어져서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또한 다른 어떤 이들은 경전의 법상(法相)과 방편(方便)의 설에 집착하여 스스로 퇴굴(退屈)하는 마음을 낸다. 점수(漸行)를 고집하면서 성종(性宗)을 위배하여, 여래께서 말세의 중생들을 위하여 비밀한 요결을 시설한 것을 믿지 않고, 먼저 들은 것만 고집하니, 금을 버리고 삼을 선택함과 같다. 지눌, 내가 번번이 이런 부류들을 만날 때마다 해설해 줘도 끝내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의심과 비방을 더할 뿐이다. 어찌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줄을 믿고 이해(信解)하고, 이것을 의비하여 수행하고 훈습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밖으로는 계율과 위의(威儀)를 굳게 지키나 구속이나 집착을 잊고, 안으로는 선정(靜慮)을 닦으나 굴복시키거나 누르지 않아야 한다. 이를 두고 악을 끊었으나 끊어도 끊은 것이 없으며, 선을 닦았으나 닦아도 닦은 것이 없는, 진정한 닦음과 끊음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운용하여 만행(萬行)을 똑같이 닦는다면, 어찌 저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객(癡禪)이나 문자만을 찾는 산란한 지혜(狂慧)에 견줄 수 있겠는가.

■ 다만 선의 일문이 가장 가깝고 절실하여, 능히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무루공덕(無漏功德)을 발현할 수 있다. 만약 뜻을 얻어 수행하는 자라면,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혹은 말하거나 침묵하는 모든 때에, 생각마다 텅 비워 그윽하게 되며, 마음마다 미묘함이 밝아져서, 온갖 덕과 신통의 광명이 모두 그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어찌 도를 구함에 본성(本性)만을 믿고 스스로 안주하여, 선정과 지혜에 전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익진기(翼眞記)』에 이르기를, ‘선정과 지혜 이 두 글자는 바로 삼학(三學)의 약칭이다.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이다. 계율은 잘못과 악을 방지하는 것으로 뜻을 삼아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짐을 면하게 하며, 선정은 이치에 맞게 산란한 마음을 섭수하는 것으로 뜻을 삼아 여섯 가지 욕심(六欲)을 능히 뛰어넘게 한다. 지혜는 법을 판단(擇)하여 공(空)을 관(觀)하는 것으로 뜻을 삼아 묘하게 생사에서 벗어나게 한다. 번뇌를 끊은 성인이 부처되기까지 닦는 수행(因中修行)은 예외 없이 이것들을 배우는 것이기에 삼학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삼학은 현상을 따르는 것(隨相)과 성품에 맞는 것(稱性)으로 구별된다. 현상을 따르는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다. 성품에 맞는 삼학이란, 이치에 본래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은 계율이요, 이치에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 것은 선정이며, 이치에 본래 미혹됨이 없는 것이 지혜이다. 이 이치만 깨달으면 곧 진정한 삼학일 따름이다. 어떤 선덕(先德)은 이르기를, ‘나의 법문은 과거 부처가 전해 주신 것으로서 선정과 정진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의 지견만을 통달케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만 상을 따라 번뇌를 대치한다는 개념을 부정한 것이지 성품에 맞는 삼학(三學)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계(曹溪) 스님이 이르기를, ‘마음에 그르침 없는 것이 자성의 계율이요, 마음에 어지러움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마음에 어리석음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이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또 ‘이른바 선에는 깊음도 있고 얕음도 있으니 외도(外道)의 선과 범부(凡夫)의 선과 이승(二乘)의 선과 대승(大乘)의 선과 최상승(最上乘)의 선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에 실려 있는 바와 같다. 지금 논한 바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하다는 뜻은 최상승의 선에 해당된다. 그러나 공을 쌓는 문(門) 가운데 초심자는 권승(權乘)과 대치(對治)의 뜻이 없을 수 없다. 까닭에 이 권수문(勸修文) 안에 권과 실(權實)을 함께 진술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선정과 지혜의 이름과 정의는 비록 다르지만 요체는 그 사람의 신심(信心)이 물러나지 않고 자신을 이겨 결판을 짓게 되는 데 있을 뿐이다. 『지도론(智度論)』에 이르기를, ‘세간의 비근한 일을 구한다 해도 능히 오로지 정진하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 없거늘 하물며 위 없는 보리(無上菩提)를 배우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는가.’ 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붙인다. ‘선정은 금강의 갑옷(金剛鎧)이 되어 능히 번뇌의 화살을 막는다. 선(禪)은 지혜의 보고(寶庫)를 지켜 공덕의 복밭이 된다. 저자거리의 티끌이 해를 가리면 큰 비가 그것을 씻어내듯 각관(覺觀)의 바람이 마음을 산란하게 할 때 선정이 능히 그것을 없앤다’라고 하였다. 『대집경(大集經)』에서도 이르기를, ‘선정과 상응한 이는 진정한 내 아들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붙인다. ‘한적하고 고요하고 작위가 없는 부처 경계, 저곳에서 능히 청정한 보리를 얻는다. 만일 선정에 머무는 이를 훼방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두고 모든 여래를 훼방한 자라 한다.’라고 하였다.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도 이르기를, ‘사천하(四天下)의 인명을 구제하는 것이 잠깐 동안 마음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르게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기신론(起信論)』에서도 이르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서 겁약(怯弱)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부처의 종자를 반드시 이어 반드시 모든 부처의 수기(授記)를 받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능히 삼천 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하더라도, 잠깐 동안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이만 못하다. 앞 사람의 공덕보다 뛰어남은 비유할 수조차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모든 선한 공덕(善功德)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 만일 선을 편안히 하여 생각을 고요하게 하지 못하면 업식(業識)이 아득하여 의 지할 근본이 없어진다. 임종할 때에 풍화(風火)가 핍박하고 사대(四大)가 흩어져 마음은 미친 듯 뜨겁게 번민하며, 전도(顚倒)되어 어지럽게 보인다. 위로는 하늘에 오를 계책이 없고 아래로는 땅에 들어갈 방도도 없다. 매우 두려워하여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고, 몸과 뼈는 떨어지고 다한 것이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어 놓은 것 같다. 미혹되는 길이 멀리 이어지니 외로운 혼이 홀로 간다. 아무리 보배와 재물이 있더라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아무리 호족의 권속이라도 끝내 한 사람도 따라와 구하거나 보호해 줄 이가 없다. 이른바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이라 대신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때를 당하여 장차 무슨 안목을 가지고서 고해(苦海)를 건너는 나루터와 다리로 삼겠는가. 유위(有爲)의 공덕이 조금 있다고 해서 이 환난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백장화상(百丈和尙)이 이르기를, ‘아무리 복과 지혜가 있고 들은 것이 많더라도 구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아 오직 온갖 경계에 연염(緣念)하면서 돌이켜 비춰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는 불도(佛道)를 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지은 악업이 모두 앞에 나타나되 혹은 두려워하며 혹은 기뻐한다. 육도(六道)의 오온(五蘊)이 앞에 나타나, 그것이 장엄한 좋은 집과 빛이 번쩍거리는 배와 수레로 보인다. 제 마음을 방종하여 탐착과 애욕을 통해 보기 때문에 악업의 경계가 모두 좋은 경계로 변하는 것이며, 보이는 대로 쫓아가서 거듭 그곳에 태어나게 되어 도무지 자유로운 구석이 없다. 용이 될지 축생이 될지 양민이나 천민이 될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높은 식견과 원대한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삼세의 업보가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어서 도망갈 곳이 없음을 깊이 살펴야 한다. 만약 지금 인연이 어긋나서 정진하고 수행하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고뇌를 받을 것이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즉시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에 고요히 반연을 잊고, 꼼짝 않고 단정하게 앉아 바깥 경계를 취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 잡아 안으로 비추어 보라. 먼저 적적(寂寂)으로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 성성(惺惺)으로 혼침한 정신을 다스려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게 하되 취하고 버린다는 생각도 없애라. 마음을 또렷또렷(歷歷)하고도 탁 트인 채 어둡지 않게 하여 무념(無念) 속에서 도 알게 한다. 이와 같지 않다면 모든 경계를 끝내 취하지 않는다. 만약 세상의 인연을 따라 무엇인가를 한다 하더라도 응당 해야 할 일인지 하지 않을 일인지를 모두 관찰하여 온갖 행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비록 짓는 바가 있더라도 허명(虛明)을 잃지 않아서 담연하게 상주(常住)할 것이다.

■ 일숙각(一宿覺)이 이르기를, ‘적적(寂寂)이란 선악(善惡) 등의 일, 즉 바깥 경계를 생각하지 않음을 이으며, 성성(惺惺)이란 혼침(惛沈)과 무기(無記) 등의 상(相)을 내지 않는 것을 이른다. 만일 적적(寂寂)하기만 하고 성성(惺惺)하지 않으면 이는 혼침이요, 성성(惺惺)하기만 하고 적적(寂寂)하지 않으면 이는 반연하는 생각(緣慮)이다. 적적(寂寂)하지도 않고 성성(惺惺)하지도 않으면 이는 반연하는 생각일 뿐 아니라 또한 혼침에 빠지는 것이다. 적적(寂寂)하기도 하고 성성(惺惺)하기도 하면 비단 뚜렷할 뿐 아니라 아울러 적적(寂寂)하기까지 하니, 이것이야말로 근원으로 돌아가는 묘한 성품이다.’라고 하였다. 『십의론주(十疑論註)』에 이르기를, ‘무념(無念)이란 곧 진여삼매(眞如三昧) 이니, 다만 성성적적(惺惺寂寂)하여 반연을 일으키지 않기만 한다면 실상과 상응(相應)한다.’라고 하였다. 선덕(先德)께서 이르기를, ‘범부는 념(念)도 있고 지(知)도 있다. 이승은 념(念)도 없고 지(知)도 없다. 부처는 무념(無念) 가운데 지(知)를 운용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마음을 닦는 사람에게 선정과 지혜를 함께 지녀서 불성을 환히 보게 하는 오묘한 방편이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부디 자세하게 살펴야 하니, 어찌 한낱 큰 뜻만을 표방하는 대신에 수행을 버리려 하는가.

 

5. 수행과 근기

■ 묻기를, ‘부처의 묘한 도는 깊고 넓어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단지 말세 중생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비추어 보아 불도를 구하게 할 뿐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상근기가 아니고서야 의심과 비방을 면하기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앞에 한 질문은 스스로를 높이더니, 이번 물음은 왜 스스로를 낮추는가. 그렇게 허둥지둥하지 말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겠다. 마명보살(馬鳴菩薩)이 백 권의 대승 경전을 모아 간추려 『기신론(起信論)』을 짓고, ‘이른바 법이란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이 곧 일체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하니, 이 마음에 의지하여 마하연(摩訶衍)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표방하였다. 이는 아마도 중생이 자기 마음이 영묘(靈妙)하고 자재(自在)한 줄 알지 못하고, 밖으로 도를 구할까 염려한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환화(幻化)는 모두 원만히 깨달은 여래의 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마치 하늘꽃이 허공에서 생겨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배상국(裵相國)이 말하기를, ‘혈기가 있는 무리는 반드시 앎이 있다. 무릇 앎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본체를 같이 한다. 이른바 진실하고 청정하며 밝고 묘하고, 텅 비고 트였으며 신령하게 통달하여 우뚝 홀로 높은 것이다. 이것을 등지면 범부이며, 이것을 따르면 성인이다.’라고 하였다. 운개지(雲盖智) 선사(禪師)가 항상 문인(門人)들에게 말하기를,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으면 마음은 저절로 신령하고 성스럽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여러 경론과 천하의 선지식(善知識)들이 남긴 말씀 가운데 미묘한 뜻이 다. 다만 요즘 사람들이 스스로 속이고 속여서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믿지도 않고 수행조차 하지 않는다. 설혹 믿는 이가 있더라도 결택(決擇)하지 못하고, 정(情)에 따라 찬성하거나 반대하여 단견과 상견(斷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소견만 굳게 고집하니, 어찌 그들과 더불어 도를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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