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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정혜결사문 ③

 

6. 교학과 선종의 차이점

■ 묻기를, ‘경전(修多羅) 가운데 큰 그물을 펼쳐서 하늘과 땅을 다 싸서 건져올리듯, 백천삼매(百千三昧)와 한량없는 묘한 문을 연설하신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이 가르침에 의하여 받들어 행하여 번뇌를 끊고 수행위를 증득하는 지위에 이르니, 마침내 내 삼현(三賢)․십지(十地)와 등각(等覺)․묘각(妙覺)에까지 이르기를, 그런데 지금 다만 성성(惺惺)과 적적(寂寂)의 두 가지 문에 의지하여 혼침과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려 마침내 구경의 지위를 기약하는 것은 마치 작은 물거품을 보고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 그야말로 미혹된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 대답하기를, ‘요즘 마음을 닦는 사람들도 불종성(佛種性)을 갖추었다. 이중에 심성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는 돈종(頓宗)의 방편에 의탁하여 결정적인 신해(信解)를 낸 이는, 자기 마음이 항상 적적(寂寂)하며 적적한 그대로가 성성(惺惺)하다는 것을 바로 안다. 이에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키는 까닭에 비록 온갖 행을 갖추어 닦더라도 오직 무념(無念)으로 종지(宗)를 삼고 무작(無作)으로 근본을 삼는다. 생각이 없고 지음이 없는 까닭에 시간과 지위에 따른 점차(漸次)의 수행이 없다. 또한 법(法)이니 뜻(義)이니 하는 차별의 견해도 없다. 성성과 적적을 갖추어 닦는 까닭에 티끌처럼 많은 법문과 모든 지위의 공덕이 묘한 마음의 본체에 갖추어지니 마치 여의주와 같다. 이 가운데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정의는, 생각을 여읜 마음의 본체를 기준으로 한 말이기도 하며, 심체가 작용하는 면을 기준으로 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수행과 성품이 동시에 원만하고 이치와 실행이 함께 펼쳐지니, 수행의 지름길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다만 뜻을 얻어 마음을 닦아 생사의 병을 벗어나는 것이 요체가 되니, 어찌 명의(名義)로써 논쟁하여 소견의 장애를 일으킴을 용납하겠는가. 만일 지금 생각을 여읜 마음의 본체를 잘 얻으면 부처의 지혜와 그대로 계합할 텐데 무엇하러 삼현(三賢)이나 십성(十聖) 등의 점차의 법문을 논하겠는가. 『원각수증의(圓覺修證儀)』에 이르기를, ‘돈문(頓門)에서는 정해진 지위 없이 마음만 청정하면 곧 참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기를, ‘깨달음의 정의란 마음의 본체가 생각을 여읜 것을 이른다. 생각을 떠난 모양은 허공의 경계와 같아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 법계(法界)와 한 모양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如來)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일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관할 수 있으면 곧 부처의 지혜로 향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사조(四祖) 스님께서 융선사(融禪師)에게 이르기를, ‘대저 백천 삼매와 한량 없는 묘한 법문이 다 그대 마음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자기 마음이 모든 법을 원만하게 갖추었음을 알지 못하며, 또 경전의 천갈래 다른 말이 근기의 마땅함을 따라 자기 마음의 법계를 가리켜 돌아가게 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도리어 문자로 차별되는 뜻의 문에 집착하며, 스스로 겁약(怯弱)을 내어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수행하는 절차가 차기만을 바라는 자는 성종(性宗)의 뜻을 얻어 마음을 닦는 자가 아니다. 만일 이런 병이 있거든 지금부터 고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근래 옛 친구의 처소에서 『오위수증도(五位修證圖)』를 얻었는데 그것은 건주(建州) 대중사(大中寺)에서 교학을 강의했던 영년(永年) 스님이 배정(排定)하고, 항주(杭州) 상부사(祥符寺)에서 화엄(華嚴)의 가르침을 전한 명의대사(明義大師) 담혜(曇慧)가 재차 상정(詳定)한 것이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저 무상보리(無上菩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밖에 있어 오위(五位)의 수행과 육도(六度)가 원만하여야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고 하나 여기서는 돈(頓)과 점(漸) 두 길을 열거하겠다. 원돈문(圓頓門)으로 치자면 중생세계의 선남자 등으로부터 모두 불종성(佛種性)을 갖추고는 한 생각에 번뇌를 등지고 깨달음에 계합하여 아승지겁(阿僧祗劫)을 지나지 않고도 바로 깨달음의 경계에 이르니, 단박에 뛰어넘어 견성하고 성불한 것을 이른 것이다. 한편 삼승(三乘)의 점차(漸次)로 치자면 오위(五位)의 성현이 모름지기 삼아승지겁을 지나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룬다.’라며 이와 같이 분명히 구별하였다. 그림 가운데 돈(頓)과 점(漸)의 행상(行相)을 배정(排定)하는 데 이르러서도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이승(二乘)이 될 종성(種性)도 있으며 보살이 될 종성(菩薩種性)도 있으며 부처가 될 종성도 있어서 날카로움과 둔함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교종 가운데도 이와 같이 부처가 될 종성을 갖춘 중생이 생사의 땅 위에서 부처의 교법을 단박에 깨달아 동등하게 증득하고 닦는다는 이치가 있다. 어찌 유독 남종(南宗)에만 돈문(頓門)이 있겠는가. 다만 교를 배우고 선을 배우는 자가 비록 묘한 뜻을 만났으나 성인의 경지에서나 할 일이라고 높이 올려 놓고 스스로 겁약한 마음을 내어, 자기 마음으로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성품이 견줄 데 없는 큰 해탈임을 깊이 관찰하지 못한 까닭에 많은 의혹을 낸 것일 뿐이다. 뒤에서 다시 진실한 증거를 인용하여 단박 뛰어넘어 견성하는 이가 비록 삼승의 점차로 수행하는 지위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깨달은 후 원만하게 닦는(圓修) 수행의 문에 장애가 없으며, 이와 같이 깨달음과 수행의 본말(本末)이, 원만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함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을 구체적으로 밝히겠다. 그리하여 마음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방편을 버리고 진실을 따라서 공부를 허비하지 않고 자타가 모두 속히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기를 발원한다.

■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요함(寂)과 앎(知)뿐이다. 변하거나 끊어지지 않고 다만 지위에 따라 이름이 점점 달라진다. 즉 밝게 깨달을 때를 두고는 이지(理智)라 하고 처음 발심하여 수행할 때를 두고는 지관(止觀)이라 한다. 저절로(任運) 행을 이룰 때에는 정혜(定慧)라 하고 번뇌가 모두 없어지고 노력을 통한 수행이 다 채워져 성불할 때에는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이라 한다. 마땅히 알라. 처음 발심해서 필경(畢竟)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요함(寂)과 앎(知)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별행록(別行錄)』의 뜻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범부일지라도 능히 빛을 돌이켜 그 마음을 비추어 보고(廻光返照), 방편을 잘 알아 혼침(惛沈)과 산란(散亂)을 고르게 조절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이 인과(因果)를 두루 갖추어 변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나, 다만 생소함과 익숙함, 밝음과 어두움이 공을 따라 다를 뿐이다. 만일 자기 마음의 참되고 항상된 성품이 움직임과 고요함을 함께 융화한 것을 원만하게 비추어 법계를 증득해 알면, 곧 모든 지위의 공덕과 티끌과 같이 많은 법문과 구세(九世)와 십세(十世) 등이 그 생각(當念)을 여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심성은 영묘하고 자재하여 만법을 머금어 품고, 만법은 일찍이 자기 성품을 여의지 않았다. 전변(轉)할 때든 전변하지 않을 때든 성품과 현상, 본체와 작용, 인연에 따름과 변하지 않음이 같은 때를 공유하면서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 애초에 지금과 옛날, 범부와 성인, 선과 악, 취하거나 버리는 마음이 없었기에 공용(功用)이 점점 증가하여 온갖 지위를 거쳐서 자비와 지혜가 점점 원만해지면서(悲智漸圓), 중생을 성취시키는 길을 막지 않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때도 한 생각도 한 법도 한 행도 옮기지 않는다.

■ 『화엄론(華嚴論)』에 이르기를, ‘자기 마음의 근본 무명(根本無明)인 분별하는 종자로써 부동지불(不動智佛)을 이루고, 법계의 본체와 작용으로 믿어 정진하고 깨달아 들어가는 문을 삼는다. 십신(十信)으로부터 수행 위에 들어가 정진하고 수행하여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십일지(十一地)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래 부동지불(不動智佛)을 여의지 않는다. 한 때도 한 생각도 한 법도 한 행도 여의지 않되 한량 없고 가없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법계와 허공 경계의 미세한 티끌 수와 같이 많은 법문이 있다. 왜냐하면, 법계와 본래 움직이지 않는 지혜로부터 믿어 정진하고 깨달아 들어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그것은 이해가 부족한 중생들을 대상으로 세간과 삼세의 성품이 있다고 설하여 부처의 과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밖에 있다고 말한 삼승의 권교(權敎)와는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 논지에 의거하면, 원종(圓宗)의 원신(圓信)이란 자기 마음의 근본 무명인 분별하는 종자 그대로 부동지불(不動智佛)을 이루어, 십신(十信)에서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전변하거나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모양이 없음을 말한다. 가히 심성이 본래 자재하여 인연을 따라 전변하는 듯하면서도 항상 변함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근래 오직 말만 익힌 자는 비록 법계의 무애(無碍)한 연기(緣起)를 널리 말하더라도 애초부터 제 마음의 공덕과 작용은 돌이켜 보지 않는다. 이미 법계의 본성과 현상이 바로 자기 마음의 본체와 작용인 줄 보지 못하는데, 언제 자기 마음 번뇌의 티끌을 열어서 대천세계의 경전을 내겠는가. 경전에,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자성인 줄 알면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깨달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르지 않았는가.

■ 또, “말뿐인 설법은 작은 지혜의 망령된 분별이다. 이러한 까닭에 장애가 생겨 자기 마음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자기 마음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정도(正道)를 안다고 하겠는가. 저들이 전도된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악을 증장시킨다.”라고 이르지 않았는가. 삼가 바라건대, 진여(眞如)를 닦는 높은 스님은 이와 같은 간곡한 말에 의지하여 모름지기 먼저 자기 마음이 모든 부처의 본원임을 깊이 믿어 관조와 정혜의 힘으로 그 본원을 이끌어내야지, 꼼짝 않고 앉아서 어리석음을 싸안고 분별 없는 것만 본받아 대도(大道)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가. 번뇌 속에 있는 진여(在纏眞如)는 혼침과 산란을 모두 갖추었고 번뇌에서 벗어난 진여(眞如)라야 선정과 지혜가 비로소 밝아지니, 전체(總)와 부분(別)이 조리가 정연하여 앞뒤가 서로 넘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현재에 그 번뇌를 다스리고 장래 그 청정함을 얻으리라 하여, 본래의 묘함을 보지 않고,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수고로이 점차의 행을 닦으려 해서도 안 될 것이다.

■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혹은 자리를 사양하여 지극한 성인의 경지로 높이 미루며, 혹은 덕을 쌓아 삼아승지겁이 차기를 바라기도 하여, 전체가 앞에 나타난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묘한 깨달음만 바라니 어떻게 본래 구족했음을 깨닫겠는가. 이에 공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다 원만하고 항상한 데 들어가지 못하고서 마침내 윤회에 떨어진 것은, 다만 성품의 덕에 어두워 참된 종지를 분별하지 못하여 깨달음을 버리고 번뇌를 따르며 근본을 버리고 지말로 나아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마음을 닦는 사람은 스스로 굽히지도 말며 스스로 자신만만해서도 안 된다. 자신만만하면 이 마음이 자기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범부가 됐다 성인이 됐다 하면서, 찰나에 조작(造作)하는 데 떨어져 다시 떴다 잠겼다 하는 작용에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낮에 세 번, 밤에 세 번 부지런히 쌓아 익혀 성성(惺惺)하되 망령됨이 없고, 적적(寂寂)하되 매우 밝아 닦는 문(門)에 위배되지 말아야 한다. 반면 스스로 굽히면 이 마음이 신령스럽게 통하여 사물에 응해 항상 눈앞에 있어서 종일토록 인연을 따르더라도 종일토록 변하지 않는 덕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어리석음과 애욕을 가지고서 해탈의 참된 근원을 이루고, 탐욕과 분노를 움직여 보리의 큰 작용을 나타낸다. 순경이나 역경에 자재하고 결박과 해탈에 구애되지 않아 성품의 문에 순응할 것이니 이런 수행과 성품의 두 문이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아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선덕(先德)께서 이르기를, ‘꼭 알맞게(恰恰) 마음을 쓸 때에 꼭 알맞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자세한 말은 개념과 특성을 설명하느라 수고롭고, 단도직입적인 말은 번거롭거나 중복됨이 없다. 무심한 가운데 꼭 알맞게 쓰면 항상 써도 꼭 알맞게 없어지니 지금 말한 무심(無心)의 경계는 유심(有心)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다. 만일 여기서 뜻을 얻어 정진하고 수행할 수 있다면 비록 말세의 중생이라 하더라도 어찌 단견과 상견의 구덩이에 떨어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앞에서도 티끌의 수 같이 많은 법문과 여러 지위의 공덕이 묘한 마음의 본체에 갖추어져 있음이 마치 여의주와 같다고 하였으니 어찌 거짓이겠는가. 묘한 마음이란 곧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을 말한 것이다.

7. 수행과 이타행

■ 묻기를, ‘요즘 마음을 닦는 사람이 만약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은 것으로 설법하여 사람들을 제도하면 안으로 비추어 보는데 손해가 될 것이다. 반면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없으면 고요함으로 나아가려는 무리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답하기를, ‘이는 각각 당사자에게 달린 일이라서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말을 통해 도를 깨닫고 교에 의지하여 종지를 밝힘으로써 법을 판단하는 눈을 갖춘 자라면 비록 많이 들어도 개념을 오해하거나 의미에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비록 남을 이롭게 하더라도 능히 나와 남, 증오와 사랑하는 소견을 끊어 자비와 지혜가 점점 원만해져 법계 가운데(寰中) 묘하게 계합하니, 이런 자야말로 실다운 수행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에 따라 소견을 내며 글에 따라 해석을 지어 교를 쫓고 마음을 미혹하여 손가락과 달을 분별하지 못하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면 설법하여 사람을 제도하려는 자는 마치 더러운 달팽이와 소라가 스스로 더럽히면서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세간의 문자법사(文字法師)이니, 어찌 선정과 지혜를 오로지 닦아 명예를 구하지 않는 자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 『화엄론(華嚴論)』에 이르기를, ‘만약 스스로 결박되어 있으면서 능히 남의 결박을 풀어주는, 이러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지공법사(誌公法師)의 『대승찬(大乘讚)』에 이르기를,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도를 가지고서 또 도를 구하려 하는가. 온갖 뜻을 널리 어지럽게 찾아다녀 스스로 자기 몸도 구제하지 못한다. 오로지 남의 글의 어지러운 말만 찾아 지극한 이치가 묘하게 좋다고 자칭하니 한낱 일생을 헛되이 보내어 영원히 생노병사에 빠진다. 탁한 애욕이 마음을 얽어매도 버리지 않으니, 청정한 지혜의 마음이 제풀에 시달린다. 진여법계(眞如法界)의 총림(叢林)이 도리어 가시 나무 벌판이 되었도다. 다만 누런 나뭇잎을 금이라 집착하여 금을 버리고 보배를 구할 것을 깨닫지 못하니, 입안으로 경과 론을 암송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찾아보면 항상 메말라 있도다. 하루아침에 본래 마음이 공한 것을 깨달으면 구족(具足)된 진여(眞如)가 모자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아난(阿難)이 말하기를, ‘많이 듣는 것만으로는 도력에 전념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옛날 성인의 뜻이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어찌 한낱 여러 뜻만 널리 찾아다니면서 자기 몸을 구하지 않아 영원히 생사에 빠져 있는가. 다만 시간 맞춰 관행(觀行)하는 틈틈이 성인의 가르침과 선덕(先德)이 도에 들어간 인연을 상세하게 열람하여 삿됨과 바름을 결택(決擇)하여 남을 이롭게 하고 자신도 이롭게 하는 정도는 무방하다. 오로지 밖으로만 구하여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듯 이름과 모양을 분별하면서 헛되이 세월만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덕(先德)께서 말하기를, ‘보살은 남을 제도하는 것이 본래 목적인 까닭에 먼저 선정과 지혜를 닦으니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서 선정과 관행을 쉽게 이룬다. 욕심을 줄인 두타행(苦行)이라야 능히 성인의 도에 들어간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미 남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면 먼저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 도력이 생기면 자비의 문을 구름처럼 펴고, 행(行)의 바다에 파도가 출렁거려 미래가 다할 때까지 고뇌하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삼보에 공양하여 부처의 가업을 잇는다. 어찌 고요함에만 향하는 무리와 같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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