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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직설 ②


6. 참 마음의 바탕과 쓰임은 같은가 다른가[眞心體用一異]  
7. 참 마음이 미혹 속에 있을 때[眞心在迷] 
8. 참 마음은 망념을 쉼이다[眞心息妄]  
9. 참 마음은 일상생활에 다 통함[眞心四儀]  
10. 참 마음이 있는 곳[眞心所在]  


6. 참 마음의 바탕과 쓰임은 같은가 다른가[眞心體用一異]

어떤 이가 물었다. 
“진심의 본체와 작용과는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
나는 답하였다.
“상(相)으로 본다면 하나가 아니요, 성으로 본다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본체와 작용과는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시험해 설명하리라.
묘한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서 온갖 상대를 뛰어나고 일체의 상을 떠났으므로, 성을 밝게 알아 증득한 이가 아니면 그 이치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또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는 것으로서, 온갖 사물에 응하여 허망하게 상을 세워 형상이 있는 듯하므로 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편으로 볼 때는 하나가 아니다.
또 작용은 본체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작용이 본체를 떠나지 않고, 본체는 작용을 내는 것이므로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는다. 이 서로 떠나지 않는 이치의 면으로 볼 때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마치 저 물은 젖는 것을 체가 되는데, 젖는 체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요, 물결은 움직임으로 상을 삼으니 바람으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의 체성과 물결의 상이 하나는 움직이지 않고, 하나는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물결 밖에 따로 물이 없고 물 밖에 따로 물결이 없어 그 젖는 성품은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면 본체와 작용이 하나인지 다른지를 알 수 있다.”
 



7. 참 마음이 미혹 속에 있을 때[眞心在迷]

어떤 이가 물었다.
“진심의 본체와 작용은 사람마다 다 갖추어져 있는데, 왜 성인과 범부가 같지 않은가.”
나는 답하였다.
“진심은 성인이나 범부에 있어서도 본래 같지마는 범부는 망령된 마음으로 사물이 참이라고 그릇 인정함으로써 깨끗한 제 성을 잃어버리고 물의 막힌 바가 된다. 그러므로 진심은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다만 어두움 속의 나무 그림자나 땅속의 흐르는 샘물과 같아서 그것이 있지마는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에, 
<선남자여, 마치 깨끗한 마니보주가 다섯 빛깔에 비치어 방위를 따라 각기 나타나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보주에 진실로 다섯 빛깔이 있다고 보는 것처럼, 선남자여, 원각의 깨끗한 성이 몸과 마음에 나타나 사물을 따라 각각 응해 주면 저 우치한 사람은 깨끗한 원각에 진실로 그런 몸과 마음의 제 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고 하였다. 또 조론에는,
<이 건곤(乾坤)과 우주 가운데 어떤 한 보배가 형산에 숨어있다>
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심의 번뇌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또 자은 스님은,
<법신은 본래부터 있어 모든 부처가 공통으로 가졌는데, 범부는 망념에 덮이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번뇌에 싸여 있기때문에 여래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 하였다. 또 승상 배휴 거사는,
<종일토록 원각이면서 원각하지 못하는 자는 범부다>
하였다. 그러므로 진심은 비록 번뇌 속에 있으니 그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은, 마치 백옥이 진흙 속에 던져져 있어도 그 빛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줄을 알 것이다.”  


8. 참 마음은 망념을 쉼 [眞心息妄]

어떤 이가 물었다.
“진심이 망 속에 있는 것이 곧 범부인데, 어찌하여 미망에서 나와 성인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나는 답하였다.
“옛 사람이,
<망심이 없어지는 그곳이 곧 보리라,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
하였고 또 경에,
<중생들의 허깨비의 몸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마음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마음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대상도 사라지며, 허깨비의 대상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사라짐까지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사라짐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가 아닌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문지르면 때가 없어지면 밝은 빛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또 영가 스님도,
<마음은 감관이요 법은 곧 대상이라, 이 둘은 마치 거울의 때와 같다. 때가 없어지면 광명이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모두 잊으면 그것이 곧 참 성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허망에서 벗어나 진(眞)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또 물었다.
“장생은, <마음이란 뜨겁기는 타는 불이요 차갑기는 언 얼음이며 빠르기는 구부리고 우러러는 동안에 네 바다 밖을 두 번 어루만진다. 가만히 있을 때는 깊고 고요하며 움직일 때는 하늘까지 멀리 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이구나>고 하였다.
이것은 장생이 먼저 범부의 마음은 이처럼 다스리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그는 또 물었다.
“종문(宗門)에서는 어떤 법으로 망심을 다스리는가?”
나는 답하였다.
“무심(無心)의 법으로써 망심을 다스린다.”
그는 또 물었다.
“만약 사람으로서 마음이 없으면 곧 초목과 같으리니, 그러면 무심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지금 말한 무심이란 마음 자체가 없다고 무심이라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속에서 머무는 상이 없음을 무심이라 한 것이다. 마치 빈 병이라 말할 때 병 속에 물건이 없는 것은 빈 병이라 하고 병 자체가 없다고 빈병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조사는,
<너는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저절로 비었으면서 신령하고 고요하면서 묘한 것이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마음을 말한 참뜻이다.
이 말에 의하면 망심이 없다는 것이요 진심이 묘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여러 스님이 무심의 공부를 한 것이 여러 가지가 각각 다르니, 지금 그 대의를 한데 뭉쳐 대략 열 가지로 밝히리라.

첫째는 깨달아 살피는 것이니, 공부할 때에 항상 생각을 끊고 일어나는 생각을 막는 것이다. 즉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거든 곧 그것을 깨달아 부수는 것이니 망념이 깨달음에 부서지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깨달은 지혜마저도 버려야 한다. 망념과 깨달음을 함께 잊어버리면 그것을 무심이라 한다. 그러므로 조사는,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깨달음이 더딤을 두려워하라>
고 하였고 또 게송에,
<진심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다만 견해를 쉬어라>
고 하였으니, 이것이 깨달아 살피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둘째는 쉬고 쉬는 것이니, 이른바 공부할 때에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아 마음이 일어나거든 곧 쉬고, 인연을 만나거든 곧 쉰다는 것이다.
옛사람이,
<한 가닥 흰 비단인 듯 차가운 물인 듯, 옛 사당 안의 향로인 듯하여 바로 망상을 끊고 분별을 떠나 바보와 같게 되어야 비로소 진심과 합한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쉬고 쉬어 망심을 쉬는 공부다.

셋째는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두는 것이다. 공부할 때에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로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것이니, 망심만 쉬면 경계가 있다고 무엇이 거리끼겠는가? 즉 옛사람의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어떤이는,
<여기 꽃다운 풀은 있는데 성 안에 친구가 없다>
하였고, 또 방거사는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여 무엇이 방해되랴>
하였으니, 이것이 곧 마음을 없애고 대상을 두어 망심을 쉬는 공부다.

넷째는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두는 것이다. 공부할 대에 안팎의 모든 대상을 다 비워 고요하다고 관하고, 다만 한 마음만 두어 외로이 뛰어나고 홀로 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모든 법과 짝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상대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만일 그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은 곧 망심이라, 지금에 이미 대상이 없어졌는데 무슨 망심이 있겠는가? 즉 진심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걸리지 않는 것이니, 옛사람의 이른바<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이는,
<동산에 꽃은 이미 다 떨어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빈다>
하였고 또,
<삼천검객(三千劍客)은 지금 어디 있는고? 홀로 장주가 태평 이룩했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대상을 없애고 마음을 두어 망심을 쉬는 공부다.

다섯째는 마음과 대상을 없애는 것이니, 이미 안팎의 마음과 대상이 함께 비었는데 망심이 무엇을 좇아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관계 스님도,
<시방에 벽이 없고 사면에 문도 없어 발가벗었고 맑디맑다>
하였으니, 
즉 조사들의 사람과 대상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말에, 
<구름이 흩어지고 물을 흘러가니 온 천지가 적적하게 비었구나>
하였고 또,
<사람도 소도 모두 볼 수 없으니, 정히 달 밝은 때로다>
하였으니, 이것은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 망심을 쉬는 공부다.

여섯째는 마음도 두고 대상도 두는 것이니, 공부할 때에 마음을 마음과 대상이 서로 맞서더라도 마음은 대상을 취하지 않고 대상은 마음에 오지 않아, 각각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 저절로 망념이 생기지 않아, 도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든 상(相)이 항상 머문다>
하였으니, 즉 조사들의 사람과 대상을 모두 빼앗지 않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말에,
<한 조각 달이 바다에서 나오니 몇 집의 사람이 누각에 오르는고?>
하였고 또,
<산꽃 천만 송이에 노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른다>
하였으니, 이것은 대상도 두고 마음도 두이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일곱째는 안팎이 모두 본체인 것이니, 공부할 때에 산과 강, 땅덩이와 해와 달과 별과, 안의 몸과 바깥 세상 등 모든 법이 다 진심의 본체이므로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또 어디서 망심이 오겠는가? 
그러므로 승조 법사도,
<천지가 나와 한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몸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안팎의 전부의 본체로써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여덟째는 안팎이 모두 작용인 것이니, 공부할 때에 일체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법과, 또 일체의 행동과 베풂을 모두 진심의 묘한 작용으로 관하는 것이다. 온갖 생각이 겨우 일어나자 곧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니 모두가 그 묘한 작용인데, 망심이 어느 곳에 발 붙이겠는가? 
그러므로 영가 스님은,
<무명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며, 허깨비의 빈 몸이 바로 법신(法身)이다>
하였고, 
또 지공의 십이시가(十二時歌)에,
<새벽 인시(寅時)엔 미치광이 근기 안에 도인의 몸이 숨은지라, 앉거나 눕거나 그것이 원래 도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허덕이며 고생만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안팎의 전부의 작용으로써 망심을 쉬는 공부다.

아홉째는 본체가 곧 작용한 것이니, 공부할 때에 비록 본체에 가만히 합하여 한결같이 비어 고요하나 그 가운데에 안으로 신령한 밝음이 숨어 있으니 그것이 본체가 곧 작용이다.
 그러므로 영가 스님은,
<또랑또랑하면서 고요한 것은 이것이요, 또랑또랑하나 망상이면 아니다>
하였으니, 고요한 가운데에 무기를 용납하지 않고, 또랑또랑한 가운데에 어지러운 생각을 쓰지 않는데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열째는 본체와 작용을 뛰어나는 것이니, 공부할 때에 안팎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고 사방 팔면을 다만 하나의 큰 해탈문으로 만들어, 원만한 자리에서 본체와 작용을 나누지 않는다. 그리하여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몸을 한 덩이로 두드려 만드는데 그 망심이 어디서 일어날 것인가? 
옛사람도,
<온몸에 꿰맨 자리가 없어 위 아래가 온통 둥글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본체와 작용을 뛰어남으로써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이상의 열 가지 공부하는 법은 전부 쓸 것이 아니요, 한 가지 문만 가리어 공부를 성취하면 망심은 저절로 사라지고 진심이 곧 나타날 것이다. 그 근거를 따라서 전생에 익힌 것이 어느 법에 인연이 있는지 그것을 따라 곧 닦아 익히면 그 공부는 공부가 없는 공부이므로 애를 쓰는 공력이 아니다. 이 망심을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기 때문에 가장 말이 많아진 것이니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9 참 마음은 일상생활에 다 통함[眞心四儀]
    
어떤 이가 물었다.
“앞에서 망심을 쉰다고 말하였는데, 다만 앉아서만 공부하는 것인가? 다니거나 섰거나 하는 데도 통하는 것인가?”
나는 답하였다.
“여러 경에, 앉아서 익히는 것을 많이 말하였으니 그것은 이루기 쉽기 때문이며, 또 다니거나 섰거나 하는 데에도 통하는 것이니 오래 오래하여 차츰 익혀지게 되기 때문이다.
기신론에,
<만일 선정을 닦는 사람이 고요한 곳에서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할 때에는 호흡에도 의지하지 않고 몸에도 의지하지 않고 공에도 의지하지 않고 땅, 물, 불, 바람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깨닫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망심이 일어나거든 일어나자 곧 버리며, 버린다는 생각까지 버려야 한다. 그것은 모든 법은 본래 생각이 없어 생각 생각에 나지도 않고 생각 생각에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므로 또 마음을 따라 밖으로 대상을 생각한 뒤에 마음으로 마음을 버리지 못할 것이요, 만일 마음이 흩어지거든 곧 거두어들여 바른 생각에 머무르게 할 것이니, 그 바른 생각이란 오직 마음뿐으로서 바깥 대상이 없으며, 또 그 마음도 제 모양이 없어 생각 생각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앉았다가 일어나 가거나 오거나 그치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이치에 따라 관찰하여 오래 익혀 익어지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될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차츰 아주 날카로와져, 그것을 따라 진여삼매에 들어 번뇌를 아주 누르고 신심이 더욱 늘어나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빨리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의혹하고 믿지 않으며, 비방하고 죄가 중하며, 업장이 두텁고 교만하여 게으른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였으니, 여기에 의하면 네 가지 뜻에 다 통하는 것이다.
원각경에,
<먼저 여래의 사마타행에 의하여 계율을 굳게 지키어 대중 속에서도 편안히 있을 것이며 고요한 방에도 조용히 앉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처음으로 익히는 것이다. 
영가 스님은,
<다니는 것도 선정이요 앉아 있는 것도 선정이거니,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함에서 항상 편안하다>
하였으니, 이 말에 의하여도 사의에 통하는 것이다. 통틀어 그 공부를 말한다면 앉아 있어도 마음을 쉬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니고 서고 함으로써 어떻게 도에 들어가겠는가? 만일 공부에 완전히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천 성인이 오더라도 놀라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온갖 요망한 마귀가 있더라도 돌아보지 않겠거늘, 어찌 다니거나 섰거나 앉는 가운데서 공부하지 못하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으려 하여도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항상 잊지 못하며, 또 누구를 사랑하는데도 그와 같다. 그런데 더구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일은 유심의 일로서 그 유심의 가운데서도 오히려 이룰 수 있거늘 지금 이 공부는 무심의 일이니, 어찌 사의 가운데서 항상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의심하겠는가? 다만 믿지 않고 행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요, 만일 행하고 믿으면 사의 가운데서 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0. 참 마음이 있는 곳[眞心所在]

어떤 이가 물었다.
“망심을 쉬면 진심이 나타난다 하니, 그러면 그 진심의 본체와 작용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답하였다.
“진심의 묘한 본체는 어떤 곳에도 두루 있다. 영가스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적하지만, 찾으면 그대는 보지 못할 것이다>
하였고 또 경에는,
<그것은 허공의 성이기 때문이며, 언제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 안에서 일거나 사라잠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대법안 스님은,
<곳마다 보리의 길이요, 일마다 공덕의 숲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본체가 있는 곳이다. 진심의 묘한 작용은 대상을 따라 감응되는 대로 따라서 나타남이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다. 
법등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분명히 눈앞에 있다. 조각구름은 서녘 골짜기에서 생기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린다>
하였다. 
그러므로 위부의 원화엄은,
<불법은 일상 생활 가운데 있다. 즉 걸어다니고 서며 앉고 누우며,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말로 서로 묻는 데와 모든 일하는 곳에 있지마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 또 그렇지 않다>
하였다. 그러므로 본체는 모든 곳에 두루하여 모든 작용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인연의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한 작용이 일정하지 않을 뿐이요,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는 사람으로 무위의 바다에 들어가 생사를 건너려 하거든, 진심의 본체와 묘한 작용이 있는 곳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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