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도성모가 불교 일을 좋아하다 (仙桃聖母 隨喜佛事)
진평왕 시대에 지혜라는 이름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많은 어진 행실로 유명했다. 그녀는 안홍사에 머물며 불전을 새로 고치고자 했으나 힘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구슬로 장식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선녀가 나타나 그녀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도산의 신모(神母)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마음이 기특하니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머무는 자리 아래에서 금을 꺼내라. 그 금으로 주존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에는 53불, 육류성중, 모든 천신과 5악의 신군(神君)을 그려라. 그리고 봄과 가을 두 계절 동안 각각 열흘씩 대규모 점찰법회를 열어 모든 생령(含靈)을 위해 기도하며 이 일을 정례화하라."
지혜는 꿈에서 깨어나 무리들과 함께 신모가 지시한 자리를 찾아가 금 160냥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불전 수리를 마칠 수 있었다. 이는 철저히 신모의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 이후 건축물은 남았으나 법회는 점차 폐지되었다.
신모는 원래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였다. 그녀는 일찍이 신선술을 익힌 뒤 신라로 건너와 오랜 세월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걱정하여 한 통의 편지를 소리개의 발에 묶어 보냈다.
"소리개가 멈춘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이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날려보냈는데, 소리개는 선도산에 도착해 멈췄다. 이에 그녀는 그곳에 터를 잡고 머물러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후 이 산은 서연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모는 이곳에서 나라를 보호하며 신통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에 신라가 세워진 이후 삼사(三祀)의 하나로 모셔졌으며, 중요한 의식에서도 특별히 위로 대접받았다.
제54대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겼는데, 어느 날 우연히 서연산에 올라 매를 풀었다가 잃어버렸다. 그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신모에게 기도했다.
"매를 찾게 해주신다면 성모께 작위를 봉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가 날아와 걸상 위에 앉았다. 이에 왕은 신모를 대왕으로 봉작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가 진한에 와서 성자를 낳아 동국의 초대 임금이 되었으니, 이는 아마 혁거세와 알영 두 성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지역명으로 계룡, 계림, 백마 등이 생겼으니, 이는 모두 닭과 연관된 서쪽 지역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신모는 하늘의 선녀에게 비단을 물들여 남편에게 붉은 조복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녀의 신비한 영험함을 알게 되었다.
국사에서도 기록되기를, 송나라 정화 연간에 김부식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우신관에서 한 여선(女仙)의 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때 관반학사 왕보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귀국의 신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이어 그는 설명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고대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넘어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후 지선이 되어 선도산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이 여인의 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송나라의 사신 왕양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를 제사지낼 때, 제문에는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성모는 이제 황금으로 불타를 만들어 중생을 위하여 향화법회를 열어 길을 마련하였다. 어찌 그저 오래 사는 술법만 배우고 멀리 있는 것에만 얽매일 수 있겠는가.
그 뜻을 기리며 읊는다.
서연산에 머문 지 몇십 년이라,
하늘의 여인을 불러 신선의 옷을 짰네.
오래 사는 것이 그리 기이하지 않더니,
금선(부처)을 만나 옥황이 되었도다.
■ 계집종 욱면이 염불하여 극락으로 오르다 (郁面婢 念佛西昇)
경덕왕 시기, 강주의 몇몇 신자들이 서방정토를 구하고자 정성을 다하며 주 경계 내에 미타사를 세웠다. 이들은 만일(萬日)을 기약하며 계(契)를 세웠다. 당시 아간 귀진의 집에는 욱면이라 불리는 한 계집종이 있었다.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 마당에서 승려들과 함께 염불을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녀가 본분을 잊고 염불에 열중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에 그는 하룻밤 동안 두 섬의 곡식을 찧으라는 일을 시켰다. 놀랍게도 욱면은 초저녁에 모든 일을 마쳤고, 다시 절로 돌아가 염불하며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그녀는 뜰의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운 뒤, 두 손바닥의 피부를 뚫고 끈으로 연결해 말뚝에 의해 매달린 상태로 합장을 하며 자신을 스스로 독려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욱면랑은 당에 들어가 염불하라'는 신령한 소리가 들렸다. 이를 들은 승려들은 욱면이 당 안에서 계속 정진하도록 권했다. 이후, 서쪽에서 천상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며 욱면의 몸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해골을 버리고 연화대 위로 변화하여 빛나는 부처의 모습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이윽고 하늘의 음악 소리는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당에는 당시 발생했던 구멍의 자취가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동량 팔진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천여 명의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노력을 다하고 다른 그룹은 도를 닦았다고 한다. 노력하던 무리 중 한 사람이 계(契)에 참여하지 못한 탓에 축생도로 떨어져 부석사의 소로 태어났다. 후에 이 소는 불경을 노동하러 등에 싣고 가던 중 불법의 영향을 받아 아간 귀진의 집에 종으로 다시 태어나 '욱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욱면이 불도에 뜻을 둔 것은 하가산에서 겪은 신비한 꿈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간 귀진과 함께 미타사로 자주 다니며 9년간 부처에게 기도하고 염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을미년 정월 21일, 그녀는 부처 앞에서 예배를 하던 중 집 대들보를 뚫고 솟구쳤다고 한다. 소백산에 도달하면서 신발 한 짝이 떨어졌는데, 그곳에는 보리사라는 절이 세워졌다. 또한 산 아래에서 육신을 버린 위치에 또 다른 절, 제2보리사가 세워졌다. 전당에는 '욱면등천지전'이라 새겨졌고, 마루에 생긴 구멍은 열 아름 정도였으나, 엄청난 폭우와 눈이 내려도 집안은 젖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금탑 하나를 구멍 위에 맞추어 증거로 남겼으며, 이적(異跡)을 기록하였다. 지금도 그 방과 탑이 남아 있다. 욱면이 떠난 뒤, 귀진은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법왕사라 이름 붙였다. 이후 이 절은 전민(田民)까지 얹혀졌지만 시간이 흘러 황폐해지고 비어버렸다.
훗날 대사 희경이 승선, 유석, 소경, 이원장과 함께 발원하여 이 절을 중건했는데, 희경은 직접 토목 공사를 맡았다. 첫날 밤, 희경은 꿈에서 노인이 삼과 칡으로 만든 신발 한 켤레씩을 건네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옛 신사의 자재를 떼어내면서 시작한 재건은 5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후 노비까지 더해 절은 크게 번창했고, 동남 지역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희
경을 일컬어 귀진의 후신이라 했다.
고을 안의 옛 기록을 검토해 보면, 욱면과 관련된 이야기는 경덕왕 시대의 사건이다. 징(徵)의 본전에 따르면, 이는 원화 3년 무자(808년), 즉 애장왕 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경덕왕 이후 이어지는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의 기간을 보면, 징에 관한 사건이 먼저이고 욱면이 나중이 된다. 이로 인해 사건의 순서가 기존 문헌의 기록과 다소 어긋나는 점이 생긴다. 이를 감안하여 문헌에 두 가지 기록을 모두 싣고 의문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그 기억을 시로 읊조린다.
서쪽 이웃 옛 절에는 불빛이 밝고
방아 찧어 돌아오니 밤은 이미 깊어 이경이라네.
한마디 염불마다 부처님께 닿고,
손바닥에 끈을 꿰니 온전히 몸과 마음을 잊는다네.
■ 광덕과 엄장
문무왕 때 중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사람은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밤낮으로 약속을 나누었다. 그 약속은, "먼저 안양(서방정토)으로 돌아가는 자는 반드시 서로에게 알리자"는 것이었다.
광덕은 분황 서리에 숨어 신발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아 아내와 함께 살았고, 엄장은 남악에서 암자를 짓고 농사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가 붉게 저물어 가고 솔그늘 아래 고요함이 깃든 시간, 창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제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지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게나."
엄장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구름 사이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왔고, 밝은 빛이 땅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이튿날 엄장은 서둘러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으나, 광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에 엄장은 그의 아내와 함께 광덕의 유해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 후 엄장은 광덕의 아내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가 이에 동의하여 엄장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엄장이 부부 관계를 청하려 하자, 그녀는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스님께서 서방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은 깊이 놀라며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랬는데, 그대는 왜 거부하는가?"
그러자 그녀는 태연하게 답했다.
"남편은 나와 십여 년을 함께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나와 한 자리에서 잠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가 어찌 그 정결함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매일 밤 단정히 앉아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을 불렀습니다. 때로는 16관(불교 수행법)을 통해 마음을 밝히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밝은 달빛이 창을 비출 때면 그 달빛 위에 올라 가부좌를 취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으니 서방정토에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곳 어디로 떠날 리가 없지요. 천리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은 첫걸음부터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스님께서 행하는 모습은 서방으로 가겠다며 동방으로 향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엄장은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다. 이후 그는 원효법사의 거처를 찾아가 본심(불도를 깨닫기 위한 진리)을 간곡히 구하였다. 원효는 삽관법(수행의 참된 방법)을 만들어 그를 지도해주었다. 엄장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여 한마음으로 도를 닦은 끝에 마침내 서방정토에 이를 수 있었다.
후에 알려지길, 광덕의 아내는 분황사(사찰)의 하녀였으며 실제로는 관음보살이 변신한 19응신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광덕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남긴 바 있다.
달이여, 이제 서방정토로 가시려나
그곳 무량수불 앞에 다 알리소서
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왕생을 바라는 이가 여기에 있다’ 전하소서
아, 이 몸 남기고서도 48대원을 이루실까?
■ 경흥이 성인을 만나다 (憬興遇聖)
신문왕 시기, 고승 경흥은 성이 수씨로 웅천주 출신이었다. 그는 18세에 출가해 삼장(三藏)에 통달하며 명성을 얻었다. 개요 원년(681년), 문무왕이 임종을 앞두고 신문왕에게 유언하기를, "경흥법사는 국사를 맡을 만한 인물이니 내 뜻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신문왕은 즉위 후 경흥을 국노(國老)로 삼고, 삼랑사에서 거처하도록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경흥이 병에 걸려 한 달가량 앓았다. 그때 한 여승이 찾아와 그를 위로하며 화엄경 속의 "선지식(착한 벗)이 병을 고친다"는 내용을 들려주었다. 여승은 그에게 말했다. "스님의 병은 근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마음껏 웃으시면 나을 것입니다."
그녀는 곧 다양한 모습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그 모양들은 매우 익살스럽고 변화무쌍하여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를 보고 경흥과 주변 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자, 경흥의 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나아버렸다. 여승은 곧 자리를 떠나 남항사로 들어가 숨었고, 그녀가 사용한 지팡이는 새롭게 제작된 11면원통상 불화 앞에 놓여 있었다.
훗날 경흥이 대궐에 들어가려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시종들은 동문 밖에서 준비를 하며 화려한 말, 안장, 신발, 갓 등을 갖추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은 그 위엄에 길을 비켰다. 그런데 그때 허름한 차림의 거사(居士) 한 사람은 지팡이를 짚고 광주리를 옆에 둔 채 하마대(下馬臺)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 광주리 안에는 말라버린 물고기가 담겨 있었다.
시종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중의 옷을 입고 어떻게 불결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 이에 거사가 대답하길, "산 고기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은 괜찮고, 삼시(三市)에서 건조한 고기를 등에 지는 것은 왜 나쁘단 말인가?" 했다. 말을 마친 그 순간, 거사는 이내 일어나 자취를 감췄다.
경흥은 막 궁에서 나오던 중 이 일을 듣고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다. 거사는 남산 문수사로 향해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다. 그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었으며, 광주리 속 마른 물고기는 소나무 껍질로 변해 있었다. 경흥에게 사실을 전한 사자의 말을 들은 그는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다. "문수보살이 내가 말을 타며 지내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로구나." 이후 경흥은 평생 말을 타지 않았다.
그가 남긴 덕행의 향기와 가르침은 석현본이 엮은 삼랑사 비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일찍이 보현장경에서 미륵보살의 말씀을 읽었다. "나는 다음 생에 염부제에 태어나 석가의 말법 시대 제자들을 구제할 것이다. 그러나 말을 타는 비구승만큼은 제외하여 그들이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을 경흥은 깊이 새겼다.
이를 기리며 읊는다.
옛 선인이 남긴 가르침, 그 뜻 얼마나 깊었던가
왜 후손들은 이를 잊고 따르지 않으려 하는가
말라버린 고기 지는 건 차라리 나을지 모르나
다음 날 용화세계의 짐은 어찌 담당하려 하는가
■ 진신부처님이 공양을 받다 (眞身受供)
장수 원년 임진(서기 692년)에 효소왕이 즉위하며 망덕사를 세웠다. 이는 당나라 황실의 복을 기원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후 경덕왕 14년(서기 755년)에 망덕사의 탑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같은 해에 안사의 난이 발생했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당나라 황실을 위해 세운 절이니, 그런 영험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8년 정유(서기 700년)에는 낙성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효소왕이 직접 나와 공양을 올리고 있었는데, 허름한 차림의 한 비구가 몸을 굽힌 채 뜰에 서서 청했다.
"저도 이 재에 참석하고자 합니다."
왕은 그의 참여를 허락하며 말석에 앉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디에서 거처하고 있는가?"
"저는 비파암에 있습니다."
왕은 덧붙였다. "재가 끝나고 돌아가면, 오늘 국왕이 직접 불공을 베푼 자리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말라."
비구는 미소를 띠며 되받았다.
"폐하께서도 다른 이들에게 신령의 석가를 향해 공양을 올렸다고는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로 날아갔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그를 본 왕은 크게 놀라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동쪽 언덕으로 달려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멀리 절했다. 그리고 신하들을 시켜 그를 찾아오게 했다.
비구는 남산 삼성곡, 곧 대적천원이라 불리는 곳에 이르러 돌 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를 내려놓은 뒤 자취를 감췄다. 신하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즉시 석가사를 세우고 그 장소에 불무사를 세우며 비구가 남긴 지팡이와 바리때를 각각 해당 절에 보관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두 절은 전해지지만, 지팡이와 바리때는 사라지고 없다.
《지론 제 4》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오래전 계빈국(현재의 중앙아시아 지역)의 삼장법사가 아란약 법행을 실천하다 일왕사에 도착했는데, 절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삼장은 누추한 행색 때문에 문지기에 의해 들어가지 못했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깨끗하고 좋은 옷을 빌려 입고 갔더니 문지기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아 입장할 수 있었다.
그는 법회에서 제공된 음식을 옷에게 먼저 건넸고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다.
"왜 옷에게 주는 것인가?"
삼장은 답했다. "제가 여러 차례 이 자리에 오려고 했으나 번번이 옷차림 때문에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이 좋은 옷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당연히 옷에게 먼저 줄 것입니다."
이는 효소왕의 일화와 유사한 사례로 보인다.
부처님의 유령함을 기리며 읊는다.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새로운 불화를 보았으며,
음식을 공양하며 옛 친구를 불렀네.
오늘날 비파암의 달을 따라가보니,
간혹 구름 속 못에 더디게 머물러 비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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