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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법사의 효도와 선행이 모두 아름답다 

법사 진정은 신라 출신으로, 속세에 있을 때 군대에 몸담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 혼인하지 못했고, 군 복무 중에도 틈틈이 품을 팔아 얻은 곡식으로 혼자 된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들의 전 재산이라고는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집을 찾아와 절을 짓기 위한 쇠붙이를 구하자, 어머니는 아무 주저 없이 솥을 보시했다.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솥을 보시한 일을 말하며 그의 뜻을 살폈다. 이에 진정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불사를 위해 시주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솥은 비록 없어도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솥 대신 토기 그릇으로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진정은 군 복무 중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를 사모하게 되어 어머니께 말했다.  
"효도를 다 한 후, 의상법사께 나아가 머리를 깎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이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법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이니라. 효도를 다 한 뒤라고 한다면 이미 늦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네가 불법의 길을 깨우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주저하지 말고 서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은 말했다.  
"어머님의 만년에 곁을 지킬 이는 오직 저 하나뿐인데, 어머님을 혼자 두고 감히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탄식하며 답했다.  
"내가 너를 발목 잡아 출가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일이다. 비록 생전에 풍요롭게 봉양한다 해도 그것이 어찌 참다운 효도가 될 수 있겠느냐? 내가 남의 문전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살지언정 천수를 다할 것이다. 네가 정말 효도를 하고자 한다면 그런 마음을 접어라."

어머니의 거듭된 권유에 진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쌀 자루를 꺼내 털어보니 모두 일곱 되가 되었다. 그날 어머니는 쌀로 밥을 짓고 말했다.  
"네가 밥해 먹으며 길을 떠나면 늦을까 두렵구나. 여기서 한 되만 받아먹고 나머지 여섯 되 밥을 싸서 떠나라."  

진정은 눈물을 흘리며 사양했다.  
"어머님을 두고 떠나는 것도 자식 된 도리에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얼마 되지 않는 식량마저 모두 가지고 가다니요? 제가 하늘과 땅에 무슨 낯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연거푸 재촉했다. 결국 어머니의 뜻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진정은 울음 속에서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밤낮으로 걸어서 사흘 만에 태백산에 도착해 의상법사에게 의탁했고, 머리를 깎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진정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곳에서 수행하며 3년을 지낸 후,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진정은 가부좌를 틀어 선정에 들었고, 7일이 지나 비로소 일어섰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추모와 깊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 마음의 물결을 정수(靜水)로 다스려 슬픔을 씻어낸 것이다."  
또는, "선정의 힘으로 어머니의 환생처를 관찰한 것이다."  
혹자는 "실리(實理)에 따라 선정 속에서 어머니의 명복을 빈 행위였다."라고도 하였다.

진정은 선정에서 깨어난 후 그 모든 일을 의상 대사에게 아뢰었다. 이에 의상 대사는 문도들을 이끌고 소백산 추동으로 향하였다. 그곳에 초가를 짓고 3천 명의 제자를 모아 약 90일간 화엄대전을 강론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인 지통은 강론 내용을 정리해 두 권의 책으로 엮었고, 이를 '추동기'라 이름 붙여 널리 세상에 퍼뜨렸다. 강론이 끝난 뒤, 그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말씀하였다.  
"나는 이미 천상계에 환생하였다."


■ 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신문왕대) 

모량리에 사는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대성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해 마치 성곽과 같았다. 이름 그대로 큰일을 할 것만 같은 아이였지만,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워 생계를 잇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경조는 무자인 복안의 집에서 품을 팔아 얻은 약간의 밭으로 가족의 의식을 해결했다.

어느 날, 개사 점개가 6륜회(六輪會)를 열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찾아와 보시를 권했다. 이에 복안은 베 50필을 내놓으며 점개로부터 복을 비는 주문을 들었다. 

"단월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만배의 복을 얻게 됩니다. 이로써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

이 말을 엿들은 대성은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어머니,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를 보시하면 1만 배의 복을 얻는다고 합니다. 저희가 이처럼 곤궁한 이유는 아마도 전생에 베푼 선행이 부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이라도 제가 품삯으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하면 후일 좋은 응보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머니 경조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고, 모자는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후 대성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는데, 그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서는 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란 아이가 너희 집에 태어날 것이다."

김문량의 집안은 크게 놀라며 모량리로 사람을 보내 대성의 죽음을 확인했고, 그의 죽음이 그날의 신비한 목소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출생 후 아이는 7일 동안 왼손을 꼭 쥐고 있다가 손바닥을 폈다. 그 손바닥에는 '대성'이라는 금자(金字)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다시 대성이라 짓고, 모량리의 생모 경조를 모셔다 함께 봉양했다.

세월이 흘러 대성은 자라며 사냥을 즐겼다. 어느 날 그는 토함산에서 곰 한 마리를 사냥하고 산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그는 곰이 귀신으로 변해 꿈속에서 찾아와 시비를 거는 악몽을 꾸었다.

"네가 왜 나를 죽였느냐? 나는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노라."

깜짝 놀란 대성은 귀신에게 용서를 구했고, 귀신은 물었다.

"그럼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세우겠느냐?"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사냥을 멈추고 약속대로 곰을 죽였던 자리에 장수사를 세웠다. 이후 자비심이 더욱 깊어진 대성은 이승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지었다. 그리고 신림과 표훈이라는 두 성사를 초청해 각각 절에 거주하게 하면서 부처님 뜻을 널리 펼쳤다.

대성은 큰 불상을 세우며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를 다했는데, 이는 옛날에도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어렵고 가난한 상황에서도 착한 마음으로 보시한 공덕이란 실로 믿음직하지 않은가?

한편, 거대한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을 다듬었던 중에,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실의에 빠져 지치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석불을 완성해 놓고 떠났다. 대성은 깨어나 남쪽 고개로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다.

이 일을 계기로 그 지역의 이름을 향령이라 불렀다.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새긴 뛰어난 기술로, 경주 여러 절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전의 향전에 기록된 내용은 위와 같지만, 절 내부의 다른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경덕왕 때 대상과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년(751년)에 불국사의 건축을 시작했다. 혜공왕 때를 거쳐 대력 9년 갑인년(774년) 12월 2일에 대성이 사망하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시켰다. 처음에는 유가교의 고승인 항마를 초빙하여 이 절에 머물게 했으며, 이후로 그 전통을 이어와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처럼 기록이 전하는 이야기가 고전과 달라 어느 쪽이 사실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이에 감탄하며 시를 지어 남긴다.

모량의 봄날에 삼묘전을 베풀었고  
향령의 가을이 되어 만금을 거두었네.  
훤실은 백 년간 빈부와 귀천을 모두 보았고  
괴정은 하나의 꿈속에서 두 세대를 지나쳤다.  

 

■ 상득사지가 살을 베어 부모를 공양하다(경덕왕 대) 

능천주에는 향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흉년이 극심하던 시절, 그의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향득은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를 공양했다. 이를 알게 된 고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경덕왕은 향득에게 쌀 500석을 상으로 내렸다.


■ 손순이 아이를 묻다(흥덕왕 대) 

손순은 흥덕왕 시대의 모량리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학산으로, 손순은 아버지를 여읜 뒤 아내와 함께 품팔이로 얻은 양식으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갔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는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손순은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어머니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계속 빼앗아 먹어 어머님께서 점점 더 굶주리십니다. 어머니를 위해 아이를 묻어야겠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판으로 나갔다. 땅에 구덩이를 파던 중 이상하게도 땅속에서 석종 하나를 발견했다. 이들은 그 석종을 보고 놀라워하며 나무 위에 걸었다가 두드려 보니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울렸다.  

이를 본 아내가 말했다.  
"이것은 필시 아이의 복일 것입니다.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어요."  

손순도 그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종을 들보에 매달아 두드렸고, 그 울림이 대궐에까지 퍼져 왕의 귀에 들어갔다. 흥덕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구나. 소리가 맑고 멀리까지 울려 퍼지니 보통 종이 아닌 듯하다. 누구인지 조사해 오라."  

왕의 사자가 손순의 집을 찾아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보고하자, 왕은 말했다.  
"옛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으려 하자 하늘에서 금솥이 내려왔다던데, 이번에는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니 땅에서 석종이 솟아났구나. 천지가 옛날의 효와 오늘날의 효를 함께 드러낸 것이 분명하다."  

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매년 벼 50석을 지급하며 효성을 기렸다. 이에 손순은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홍효사'라 이름 지으며 석종을 모셨다.

그러나 진성왕 때 후백제의 도적들이 마을에 침입하면서 그 종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절만 남았다. 석종이 발견된 땅은 이후 '완호평'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잘못 전해져 '지량평'이라 불리고 있다.


■ 가난한 딸이 어머니를 봉양하다

효종랑이 남산의 포석정에서 즐겁게 놀고자 하자 문객들이 모두 몰려왔으나, 두 사람만이 늦게 도착했다. 이에 효종랑이 그 이유를 묻자 두 사람이 대답했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 스무 살 가량 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함께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여인은 집안이 몹시 가난해 여러 해 동안 어머니를 부양하며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구걸조차 힘들어지자, 남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겨우 곡식 30석을 모아 주인집에 맡기고 지내왔다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저녁이 되면 쌀을 사서 밥을 지어 어머니와 함께 먹고 잠을 잤으며, 새벽이 되면 다시 주인집으로 나가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평소 먹던 천한 음식(강비)을 먹을 때는 마음이 편했는데, 최근에 먹은 좋은 음식(향갱)은 도리어 속을 괴롭히고 마음까지 불편하다고 하셨답니다. 이에 딸은 그동안의 사정을 사실대로 고백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통곡하며 슬퍼하셨습니다. 결국 여인은 어머니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어머니와 함께 껴안고 울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저희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있느라 늦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효종랑은 크게 측은히 여겨 곡식 100섬을 보내주었다. 효종랑의 부모님도 옷 한 벌을 보내주었으며, 다른 많은 낭들도 힘을 모아 조 1,000섬을 거두어 전달하였다.

이 소식은 곧 왕에게도 전해졌고, 진성왕은 깊은 감명을 받아 곡식 500섬과 새 집 한 채를 하사하였으며 병사를 보내 그 집을 지키게 하여 도둑으로부터 보호하게 했다. 또한, 이 마을 이름을 표창하여 ‘효양리’라 불렀다. 이후에 그 여인의 집은 희사되어 절로 바뀌었고, ‘양존사’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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