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義湘傳敎)
의상 법사는 아버지가 한신이며, 성은 김씨였다. 29세에 서울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떠나 요동에 이르렀으나, 국경 지역을 지키던 순라군에게 첩자로 오해받아 수십 일간 감금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영휘 초년에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의상도 그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처음 양주에 도착해 그곳 주장 유진의 환대를 받으며 관청 내에 머물렀고, 이후 종남산 지상사로 가서 지엄 선사를 만났다. 지엄은 전날 밤에 큰 나무가 해동(신라)에서 자라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신주까지 덮는 꿈을 꾸었는데, 그 나무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고, 그 안에 빛을 발하는 마니보주(寶珠)가 있어 놀라고 경이로워 그가 올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지엄은 의상을 특별히 맞이하며 입실을 허락하였고, 의상은 화엄경의 깊고 은미한 뜻을 해석해 보였다. 이에 감동한 지엄은 의상이 비범한 인물임을 확신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 시기에 본국 신라의 승상 김흠순과 양도가 당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고종 황제가 신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김흠순 등은 은밀히 의상에게 먼저 본국으로 돌아가 사정을 알리도록 권했다. 함형 원년(670년),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고, 신라의 명승 명랑에게 밀단을 준비하게 하여 비법으로 기도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의봉 원년(676년)에 이르러 의상은 태백산으로 돌아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불교를 전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신령스러운 현상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후 종남의 제자 현수는 '수현소'라는 글을 작성하여 의상에게 보내며 자신의 존경과 그리움을 표현했다.
현수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경 승복사 중 법장은 해동 신라 화엄법사의 시자에게 글을 올립니다.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20여 년이 되었으니, 스승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하는 정을 어찌 마음에서 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연기와 구름이 만 리를 가르고, 바다는 겹겹이 이어졌으니 몸은 멀리 있어 다시 뵙지 못하는 한스러움을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전생의 인연으로 함께 공부를 닦고 지금 생에서도 함께 학문을 연마한 덕분에 법사의 은혜 속에서 깊은 경전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법사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화엄경을 강론하시며 법계의 무애한 연기를 선양하시고, 불국을 제망으로 새롭게 하여 많은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셨다고 합니다. 스승님의 이러한 행적을 들으며 법륜을 다시 굴리고 불법을 세상에 밝히시는 모습에 진심으로 기쁨과 경외감을 느낍니다. 반면 저는 크게 성장하지도 못했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에도 부족함이 많아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경전을 떠올릴 때마다 스승님께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고자 노력하며, 업에 힘입어 내세에도 스승님과 인연 맺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남기신 글은 그 뜻이 풍부하고 심오하나, 지나치게 간결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그 의미를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요즘에는 이를 승전법사께서 옮겨 적어 고향으로 가지고 가셔서 그 지방에 널리 전할 예정입니다. 그러하오니 상인께서는 이에 대해 세심히 검토해 주시어 잘잘못을 가르쳐 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다음 생에는 저를 포함한 모두가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믿음을 실천하여 함께 노사나불의 끝없는 묘법을 들으며 보현보살의 무량한 수행 행원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한다면 제가 지닌 나쁜 업보 또한 하루아침에 모두 소멸될 것입니다. 부디 상인께서는 지난날의 일을 잊지 마시고, 여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도의 길로써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 소식 전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가끔 안부라도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만, 이만 줄입니다.
그 뒤 의상 스님은 열 곳의 사찰에 가르침을 전하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예를 들면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그리고 남악의 화엄사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스님은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편찬하며 일승(一乘)의 요점을 모두 담아내어 천 년 동안 후세에 귀감이 되는 저술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귀히 여겨 보존했습니다. 비록 다른 저술은 남기지 않으셨다 하나, 솥 전체의 국물 맛을 알려면 한 점의 고기 맛으로도 족하다는 말처럼, 법계도만으로도 충분히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법계도는 총장 원년 무진(668년)에 완성되었으며, 같은 해에 지엄 선사가 입적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공자가 《춘추》의 획린(獲麟) 구절에서 필을 놓은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의상 스님은 금산보개의 화신이라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그의 제자들로는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능인, 의적 등 10명의 대덕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성스러우며 그들 각각의 전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오진은 하가산 골암사에 살면서도 밤마다 팔을 뻗어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고, 지통은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아 지극히 정묘한 문장을 써내는 데 이르렀습니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머물며 항상 천궁을 드나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또 의상 스님이 황복사에 계실 때에는 여러 사람들과 탑을 돌곤 하셨는데, 늘 층계를 이용하지 않고 허공을 걸어 올라가셨습니다. 이에 탑에는 사다리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스님을 따르는 이들 또한 3척 높이의 허공을 밟아 도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본다면 필시 괴이하다 여기며 배우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외의 내용들은 최치원 선생께서 지으신 의상의 본전에 기록된 내용과 다름이 없습니다.
기리어 읊습니다.
덤불과 먼지를 헤치고 바다를 건너오니
지상사의 문이 열리고 귀한 손님을 맞이했네
온갖 꽃들을 채취해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도 똑같이 봄빛으로 물들었네
■ 사복이 말을 못 하다 (蛇福不言)
서울 만선북리에는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도 없이 아이를 잉태해 낳았지만, 그 아이는 12세가 될 때까지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아이를 사동이라 불렀는데, 이는 종종 사복이라 불리기도 하고, 사과나 사복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 모두는 같은 이름을 가리킨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원효는 고선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복이 그를 찾아왔다. 원효는 사복을 반갑게 맞아 인사를 건넸지만, 사복은 답례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내가 옛날 경전을 나르던 암소가 지금 죽었소.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원효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사복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사복은 원효에게 불교 의식인 포살을 거행하며 계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원효는 죽은 시체 앞에 앉아 기도를 올렸다.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라.
죽음이 고통이며,
또한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니라.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하지만 사복은 이 기도가 지나치게 길고 번잡하다며 간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원효가 기도를 고쳐 말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고통이로다."
두 사람은 시신을 실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향했다. 이때 원효가 말했다.
"지혜 있는 범(법)을 지혜의 숲에 묻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
이에 사복은 게송을 지어 읊었다.
"옛날 석가모니께서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 드셨네.
지금 또 그와 같은 이가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게송을 마치고 나서 그는 띠풀 줄기를 뽑아내니, 그 아래에는 명랑하고 맑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칠보로 장식된 난간과 화려한 누각이 장엄하게 서 있었는데, 이는 분명 인간의 세계와는 달라 보였다. 사복은 시체를 업고 그 안으로 들어갔고, 곧 땅이 그 틈을 닫았다.
이 모든 것을 본 원효는 홀로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여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도장사라 지었다. 또한 3월 14일마다 점찰회를 열기로 규례를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한 일을 드러낸 것은 이뿐이었는데, 세간에서는 여기에 허황된 이야기들을 덧붙였다니 실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기리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잠들어 있는 용을 누가 등한시하랴.
임종에 부른 노래는 간결하기만 하다.
삶과 죽음의 고통, 실은 고통이 아니거늘,
연화장 세계는 넓고도 아름답구나.“
■ 진표율사
진표율사는 전라북도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출신이다. 열두 살 나이에 출가를 결심하였고,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는 금산사에서 순제법사를 찾아가 머리를 깎으며 승려가 되었다. 순제법사는 사미계법을 전수해 주며 공양차제비법 한 권과 점찰선악업보경 두 권을 건네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을 지니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앞에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며, 직접 계법을 받아 이를 널리 세상에 전파하도록 하라.”
율사는 가르침을 받아들인 후 작별하고 명산들을 두루 다녔다. 시간이 흘러, 그가 스물일곱이 된 해(760년, 상원 원년 경자)에는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준비한 뒤, 보안현 변산에 있는 불사의방(절 이름)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루에 쌀 다섯 홉을 양식으로 삼았고, 그중 한 홉은 남겨 쥐를 먹이며 길렀다. 이후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하며 수행에 힘썼으나, 3년이 지나도 계법을 받았다는 보증(授記)을 얻지 못했다.
이에 그는 결심을 다지고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는데, 그 순간 청의동자가 나타나 그를 손으로 받쳐 돌 위로 올려놓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율사는 21일의 기약을 걸고 밤낮으로 정진하며 돌로 몸을 두드리며 참회했다. 이 과정에서 사흘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으나,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7일째가 되던 밤, 지장보살이 금색 지팡이를 흔들며 나타나 그의 몸을 치유해 주었고, 손과 팔이 본래대로 회복되었다. 이후 지장보살은 가사와 바리떼를 건네며 그를 격려했다.
율사는 이에 깊이 감명받아 더욱더 수행에 몰두했다. 21일이 되자 그는 천안을 얻어 도솔천의 천중들이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때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눈앞에 나타나 율사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훌륭하다, 대장부여! 네가 이토록 계를 구하고자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며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지장보살은 계본을 주었으며, 미륵보살은 목간자 두 개를 건넸다.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다른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쓰여 있었다. 미륵보살은 이어서 말했다.
"이 목간자는 내 손가락 뼈로 만든 것으로, 이는 시작과 본질의 두 깨달음을 의미한다. 아홉째 간자는 법을 뜻하고, 여덟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새롭게 훈습되어 성불의 씨앗이 됨)를 뜻한다. 이를 통해 인과응보의 의미를 깨닫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떠나 대궁왕의 몸으로 다시 나게 될 것이며, 이후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두 보살은 모습을 감췄다. 그날은 임인년(762년) 4월 27일이었다.
율사는 보살들에게 계법을 전수받은 뒤 금산사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대연진에 이를 즈음, 용왕이 나타나 옥가사를 건네며 8만이나 되는 권속을 이끌고 율사를 호위하였다. 이에 금산사 건립을 위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며칠 만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한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을 전하였다. 이에 율사는 사람들에게 시주를 권유하여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였고, 미륵보살이 내려와 계법을 전수하는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이 상(金像)은 갑진년(764) 6월 9일에 완성되었으며, 병오년(766) 5월 1일에 금당에 봉안되었다. 이는 대력 원년의 일이었다.
율사는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으로 향하던 도중,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소들이 율사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이에 수레에 있던 사람이 내려와 물었다.
“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나는 금산사의 중 진표입니다. 변산의 불사房에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앞에서 계법진생(戒法眞生)을 받았기에 오래도록 불법을 지키고 수행할 절을 지으려 길을 나선 중입니다. 이 소들은 비록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마음은 밝아 내가 계법을 받은 사실과 불법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수레의 사람은 깊이 감동하며 말했다.
“짐승도 이런 신심(信心)을 가졌는데, 사람인 제가 어찌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에 든 낫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자르고, 율사에게 전적으로 귀의할 뜻을 밝혔다. 율사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의 머리를 정돈해 주며 계법을 전수하였다. 이후 그들은 함께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가 자라는 장소를 찾아 표를 세웠다.
그들은 다시 명주의 해변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때 바다에서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타나 율사 앞에 모여 몸을 맞대며 마치 육지처럼 길을 만들어 주었다. 율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로 들어가 계법을 염송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고성군에 이르러 금강산으로 향했고, 발연수를 세운 뒤 점찰법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7년간 머물렀으나, 명주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 계법을 설법하며 삼보(三寶)를 섬기도록 권유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수많은 죽은 물고기들이 밀려왔고, 사람들은 이를 판매하여 생계를 마련하며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율사는 발연수를 떠나 불사의房으로 돌아갔다. 뒤이어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찾아뵙거나 진문대덕(震門大德)의 숙소에서 머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속리산의 대덕 영심, 대덕 융종, 불타 등이 율사를 찾아와 이렇게 청했다.
“우리들은 험준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스님께 계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부디 법문(法門)을 전수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율사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있자,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땅으로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하였다. 이에 율사가 가르침을 전하고 관정을 행한 뒤, 가사와 바리때, 공양차제비법 1권, 점찰선악업보경 2권, 그리고 간자 189개를 주었다.
또한, 미륵진생의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함께 내어주며 경계하기를,
"아홉째 간자는 법이며, 여덟째 간자는 신훈성불의 종자인데, 내가 이미 너희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를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길상초가 난 곳에서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구제하며 후세에 널리 전파하도록 하라."
영심 등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속리산으로 돌아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이를 길상사라 이름하였다. 영심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깨달음을 닦으며 끝까지 효를 다하였다. 그는 절 동쪽 큰 바위 위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들은 율사의 시신을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공양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뼈가 흩어져 떨어졌다. 이에 흙을 덮고 무덤을 만들었는데, 얼마 후 그 무덤 위에 푸른 소나무가 자랐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결국 말라 죽었다. 다시 한 그루가 자라났는데 이는 뿌리는 하나였으나 현재는 두 그루의 나무로 갈라져 서 있다.
율사를 공경하는 자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그의 뼈를 찾았는데, 어떤 이는 얻었고 또 어떤 이는 찾지 못하였다. 이에 내가 율사의 유골이 완전히 사라질까 염려하여 정사(1197년) 9월에 특별히 소나무 밑으로 가서 그의 뼈를 주워 통에 담아 보존하였는데, 이는 약 세 홉 정도의 분량이었다. 이후 두 그루 소나무가 서 있는 큰 바위 아래 유골을 모시고 돌로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 관련 사적은 발연석기와는 다르다. 따라서 영잠의 기록만을 추려 실었으니, 후세의 어진 이들이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무극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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