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대덕 자장은 김 씨로, 본래 진한의 진골 소판 무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청관 요직을 맡고 있었으나,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이에 그는 세속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며 천부관음을 향해 아들을 얻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만약 아들을 얻게 되면 그 아이를 바쳐 법해의 진량으로 삼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꿈에서 품 안으로 별 하나가 떨어져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난 뒤 태기가 생겼고, 석가모니와 같은 날에 태어난 아기에게 선종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선종량은 정신이 맑고 순수하며 슬기로운 자질을 지닌 인물로 자라났다. 세속적인 사사로움에 물들지 않고 날로 학문과 문예에 정진하던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멀리하기 위해 처자를 떠나 자신의 전답을 희사해 원녕사를 세웠다.
이후 그는 험하고 깊은 산 속에서 홀로 거처하며 수행에 몰두했다. 야생동물들도 꺼리지 않는 고행 속에서 고골관(죽음을 관조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수행)을 연마했는데, 피곤함이 느껴지자 손수 작은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치고 그 안에서 수행을 이어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설정한 환경 속에서 그는 들보에 머리를 매달고 정신이 흐려질 때마다 이러한 방법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재상 자리가 비어 자장이 가문과 재덕으로 인해 추천을 받았으나, 그는 왕이 거듭 부름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강제적 방법으로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칙령을 내리며 말했다.
"만약 나오지 않으면 목숨을 거둘 것이다."
이를 들은 자장은 담담히 말하였다.
"차라리 하루를 계율을 지키다 생명을 마치더라도 백 년 동안 계율을 어기며 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자장의 의연한 태도에 감복한 왕은 그의 출가를 허락했다. 이후 자장은 더욱 깊은 산골로 숨어 수행을 이어갔으나 아무도 그에게 양식을 가져다주는 이가 없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한 새가 날아와 과일을 물어주었고, 자장은 그것으로 연명하였다. 어느 날 밤, 천인이 꿈속에서 나타나 5계를 설하여 주었고, 이를 계기로 자장은 골짜기를 나와 사람들에게 계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자장은 변방에서 태어나 긴밀하지 못한 환경에서 수행해야 함을 아쉬워하며 보다 큰 깨달음을 구하고자 중국으로 향하고자 했다. 인평 2년(636년), 왕명을 받아 문인 실 등 10여 명의 수행자와 함께 중국 당나라의 청량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청량산은 문수보살의 영험이 깃든 곳으로 알려진 명산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곳의 문수보살상이 제석천과 공인들이 직접 조각한 것이라 전해왔다.
자장은 그 문수보살상 앞에서 깊이 기도하고 명상에 잠겼다. 그러던 중 꿈에서 문수보살이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범어로 된 게(偈)를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으나, 다음 날 한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그 내용을 해석해 주었다. 승려는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하며 가사와 사리를 건네고 사라졌다.
이후 자장은 자신이 이미 성불할 운명을 받았음을 깨닫고 청량산을 내려와 태화지로 향했다. 이어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당시 태종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칙사를 보내 위문하고, 승광별원에 머물도록 하였다.
태종의 은혜와 물질적인 하사품이 매우 많았으나, 자장은 이를 번거롭게 여겨 표문을 올린 뒤 종남산 운제자 동쪽 절벽으로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 동안 수행하며 인간과 신들에게 계(戒)를 전하니, 그 영험함이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나 행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아, 여기에는 생략한다.
잠시 후 다시 수도로 돌아오자 황제가 칙사를 보내 위문하며 비단 200필을 하사하여 의복으로 사용하게 했다. 정관 17년(643) 신라 선덕왕은 표문을 올려 자장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태종이 허락했다. 자장을 궁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과 잡채 500단을 내려주고, 동궁에서도 비단 200단을 추가로 하사했으며, 이외에도 많은 예물을 제공했다.
당시 신라에는 아직 불경과 불상이 충분히 비치되어 있지 않았기에, 자장은 대장경 1부와 여러 가지 번당 화개 등을 포함한 유익한 물품들을 청해 가져왔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온 나라가 크게 환영하였으며, 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하고 강력한 급여와 경호를 제공하였다.
어느 여름, 왕은 자장을 궁중으로 초청해 대승론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을 7일 밤낮 동안 강연하게 했다. 그때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강당을 뒤덮으니, 이를 본 사중(寺衆) 사람들이 모두 자장의 신령스러움을 감탄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논의하기를,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다스릴 규범이 없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통합된 규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임명하고, 중들의 모든 규범과 관할권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제도는 북제 천보 연간에 10통제(通制)를 두었고, 그 중 문선제는 법상법사를 대통(大統)으로 임명하고 나머지는 습통(習統)으로 삼았다. 양(梁)과 진(陳) 시대에는 국통, 주통, 국도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이는 승려를 관리하는 관직의 일부였다.
당나라 초기에도 10명의 대덕(大德)이 존중받았으며, 신라 진흥왕 11년(550년)에는 안장법사가 크게 추대되었다. 이듬해에는 고구려 혜량법사를 국통으로 세우며 사주라고도 불렀고, 대도유내 한 사람과 주통 9인, 군통 18인을 둠으로써 체계를 잡았다. 자장의 시대에 이르러 대국통 한 명을 두면서 상직(常職)으로 삼지 않고 특수한 예우를 부여했다. 이는 뒤에 부예랑이 대각간, 김유신이 태대각간이 된 것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후에 원성대왕 원년에 이르러 다시 승관을 두고 이를 정법전이라 명명하였다. 대사 1인과 사 2인을 임명하여 이를 관리하게 하고, 중들 중 재행이 뛰어난 자를 선발해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유사시에만 교체하였으며,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체계로 인해 지금도 자의의 무리들은 율종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의는 이러한 기회를 활용하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그는 승니 5부마다 학문을 더욱 증진시키고 매 보름마다 계율을 설명하며, 겨울과 봄에는 승니들을 모아 시험을 통해 계율 준수와 위반 여부를 판단했다. 또한, 이를 유지하기 위해 관원을 두고, 순사를 보내 서울 외곽의 절들을 검사하여 중들의 과오를 징계하였다. 더불어 불경과 불상을 정비하며 일정한 규율을 확립하니, 이 시기가 불법 보호의 전성기로 여겨진다. 이는 마치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가 음악을 바로잡아 아송(雅頌)이 제자리를 찾은 것과 비견할 만하다.
당시 계율을 받아 불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열 집 중 여덟아홉 집에 이를 정도였으며, 머리를 깎고 출가하려는 이들도 날로 늘어났다. 이에 그는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마련하여 각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개도하였다. 또한, 태어난 집을 원녕사로 개명하고 낙성회를 열어 『화엄경』의 1만 게송을 강의하니, 52명의 여인이 감동받아 현신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는 문인들에게 나무를 심게 하여 이를 지식수라 이름 붙이고, 상서로운 기록으로 남겼다.
자의는 우리나라 복식이 중국과 다름을 아쉬워하며 조정에 건의했고, 진덕왕 3년(649년)에 드디어 중국식 의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정월 초하루를 중국식으로 따르는 정삭 제도를 채택하고 영휘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중국에 조공할 때 상번국에 포함되었으니, 이는 자장의 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그는 서울을 떠나 강릉군에 수다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북대에서 보았던 형상의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했다.
"내일 대송정에서 그대를 다시 만날 것이다."
이에 놀라 잠에서 깬 자장은 서둘러 송정으로 나아갔고, 그곳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게 되었다. 문수보살이 묻기를
"다시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자장이 대답했다.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문수보살은 이 말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으며, 그 자리에는 더 이상 나무가 나지 않고 새들이 머물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태백산으로 간 자장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서 서린 모습을 보고 시자에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갈반지다."
그는 이곳에 석남원을 세웠고, 현재의 정암사가 되었다. 이후 대성(大聖)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중, 한 남루한 도포 차림의 사람이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시자를 찾아와 말했다.
"내가 자장을 만나러 왔다."
시자는 놀라며 말했다.
"제가 스승님을 모신 이후로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기에 이런 망언을 하십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되풀이하며 요청했다.
"그저 스승님께 알리기만 하시오."
이에 시자는 그 말을 전했고, 문득 자장도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알아차렸다.
필시 미친 사람이라 여겼다.
문인이 나가 꾸짖으며 내쫓자, 거사가 말했다.
돌아가겠노라, 돌아가겠노라.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는가.
그 말을 끝낸 후, 삼태기를 거꾸로 들어 툭 털어버리니 강아지가 사자보좌로 변해 그 위에 올라앉았다. 순간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이를 전해 들은 자장은 그제야 예를 갖추고 서둘러 남쪽 고개를 오르며 빛을 쫓았지만, 이미 빛은 아득히 멀어져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유골은 석혈 속에 모셔졌다.
자장은 무려 10여 곳에 절과 탑을 세웠는데, 이를 건립할 때마다 항상 이상하고 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이를 통해 자장을 따르는 포색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로 모였고, 절이나 탑은 며칠 안에 완성되곤 했다. 자장이 사용하던 도구들과 의복, 태화지의 용이 바친 목압침과 석존의 유의 등 유물들은 모두 통도사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헌양현에는 압유사가 있는데, 이는 침압이 이곳에서 특별한 현상을 보였던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원승이라는 승려도 있었는데, 그는 자장보다 먼저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자장을 도와 율부를 널리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기리며 읊는다.
일찍이 청량산에서 꿈을 깨고 돌아오니,
칠편삼취의 가르침이 함께 열렸네.
승려와 속인의 옷이 부끄럽다 여기며
우리나라의 의관을 중국처럼 바꾸었네.
■ 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 (元曉不羈)
성사 원효의 성씨는 설씨였다. 그의 조부는 잉피공 또는 적대공으로 불렸다. 현재 적대연 옆에는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한다. 원효의 아버지는 담내내말이었다. 그는 처음 압량군의 남쪽, 지금의 장산군 아래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그 마을 이름은 불지로 알려져 있는데, 발지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라수라는 명칭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스님의 집은 원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임신 후 만삭이 되어 이 골짜기를 지나던 중 밤나무 아래에서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너무 급한 상황이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그 속에서 누워 아이를 낳았기에 이를 사라수라 불렀다."
이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도 독특하여 오늘날까지 사라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예전에 절을 관리하던 자가 절의 하인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지급했는데, 하인이 부족하다고 관청에 호소한 일이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가 그 밤을 검사해 보니 한 알이 그릇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이에 관리가 오히려 밤 한 알씩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그로 인해 이곳을 밤나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님은 출가 후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초개사라 이름 지었다. 또한 사라수 근처에 또 다른 절을 세우고 이를 사라사라 하였다. 스님의 행장에서는 그를 서울 사람이라 기록했으나, 이는 그의 할아버지 본향을 따른 것이었고, 당승전에서는 그가 본래 하상주 출신이라고 적혀 있다.
살펴보면, 인덕 2년경 문무왕은 상주와 하주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주는 현재 창녕군이며,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었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로서 당시에는 상주(湘州)로도 불렸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에 속하며, 압량군에서 분리된 지역이다. 스님의 아명은 서당(새돌이)으로 불렸으며, 또 다른 이름은 신당이었다.
원효 스님이 태어나게 된 일화도 전한다. 어머니가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태기가 있었으며, 아이를 낳는 순간 오색구름이 온 땅을 덮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617)에 해당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스승 없이 홀로 공부하며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다. 그의 유방 수행과 불교를 널리 펼친 업적에 관해서는 당승전과 행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도록 한다. 대신 향전에 실린 몇 가지 기이한 일화만 소개한다.
어느 날 스님은 거리에서 풍전을 하며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어느 날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이 노래의 의미를 아는 이는 없었지만, 태종은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때 요석궁에는 홀로 남은 공주가 머물고 있었다. 이에 궁녀를 보내 원효를 찾아와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녀가 명을 받아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던 중이었다. 궁녀는 그곳에서 원효를 만나게 되었는데,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시고 있었다.
궁녀는 스님을 요석궁으로 데리고 와 그곳에서 머물게 했다. 이때 공주는 태기가 있었고, 훗날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재빠르며, 경서와 역사에도 두루 능통하여 신라의 10현 중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방언뿐만 아니라 중국과 주변 여러 지역의 풍속, 사물의 이름 등에도 정통했다. 더불어 육경과 학문을 알기 쉽게 풀이하고 가르쳤으며,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원효는 계율을 범한 뒤 설총을 낳고 난 후 속인의 옷으로 갈아입으며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칭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광대가 가지고 놀던 괴상한 모양의 큰 박 하나를 얻었다. 그는 그 박을 도구로 개조해 화엄경의 한 구절인 "일체의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는 문구에서 따와 이름을 '무애'라 붙이고, 이를 바탕으로 노래를 지었다. 그는 이 도구를 사용해 노래하고 춤추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교화를 전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자들이나 어리석은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리게 되었다. 이처럼 원효의 교화는 매우 깊고도 넓은 영향을 미쳤다.
원효의 고향 마을은 '불지촌', 그의 절은 '초개사'라 불렸다. 이는 모두 불교를 빛나게 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효'라는 이름도 방언으로 해석되었으며,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이를 향언으로 풀이해 새벽을 뜻한다고 했다.
그는 분황사에 머무르는 동안 화엄경소를 집필했는데, 제4권 십회향품을 끝으로 붓을 내려놓았다. 또한 그는 어느 임시 소송과 관련해 몸을 백 개의 소나무로 나누는 초지(初地)의 경지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바다용의 권유로 길을 가던 중 삼매경소를 집필하기도 했으며, 그의 붓과 벼루가 소의 뿔 위에 놓인 이유로 '각승(角僧)'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는 본각(本覺)과 이각(始覺)의 깊은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종이를 붙여 가르침을 더했다고 하니, 이는 서로 지음(知音)의 마음으로 조화를 이룬 것이라 평가받는다.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이 그의 유골을 부수어 소상(像)을 만들고 분황사에 안치했다. 설총은 이를 깊이 공경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그 슬픔은 평생 이어졌다. 설총이 소상 앞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으며, 지금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다. 또한, 원효가 머물렀던 혈사 옆에는 설총이 살던 집터가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각승이 삼매경(三昧經)의 축을 처음 펼치고
무애의 길은 끝내 만 거리를 바람처럼 걸었다네
봄달 밝던 날, 요석궁엔 잠들어 깊이 들었지만
문 닫힌 분황사엔 뒤돌아보는 향기만 남았구나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