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전의 석촉루
승전법사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는 많지 않다.
그는 일찍이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가서 현수국사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불법의 정미한 이치를 연구하고 깨우쳤다. 그의 학문적 통찰력은 남달랐으며, 깊고 은밀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현수국사는 처음에는 의상과 함께 지엄화상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학설에 기반한 논지를 발전시키고 이를 글로 세세히 풀어내며 학문을 정리한 인물이었다. 승전법사가 귀국할 때, 현수는 그에게 글을 전해 보냈으며, 의상도 따로 편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 기록에 따르면, 탐현기 20권 중 두 권은 미완성이었고, 교분기 3권, 현의장등잡의 1권, 화엄범어 1권, 기신소 2권, 12문소 1권, 법계무차별론소 1권 등을 정리해 승전법사의 손에 맡겼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신라의 중 효충이 금 9분을 가져와 의상이 보낸 것이라 전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고 한다. 이에 현수가 서국의 군지조관 한 개를 작은 정성으로 준비해 의상에게 보낼 것을 덧붙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승전법사는 이를 가지고 귀국한 후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의 이 글을 보고 마치 지엄의 가르침을 다시 듣는 것 같았다며 이를 깊이 탐구하고 검토했다. 그는 이 내용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며 널리 학문으로 엮도록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이를 종합하면, 승전법사가 청구(신라)에서 화엄 사상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불후의 노력과 공로 덕분이다. 이후 범수라는 승려가 당나라에 가서 새로 번역된 후분 화엄경과 관사의소를 구해 돌아왔는데, 이 또한 불교의 진리를 찾아 세상에 알린 귀중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는 정원 기묘년(799년)에 해당한다.
승전법사는 신라 상주 영내 개녕군 경계에 절을 세우고 돌들을 관속으로 여겨 화엄경 강의를 진행했다. 이후 신라의 또 다른 승려인 가귀가 출현하여 뛰어난 총명함과 도 이해 능력으로 불교 교리를 후세에 전하였으며, 심원장을 편찬했다. 심원장은 승전법사가 돌의 무리들과 더불어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한 흔적을 담고 있다. 현재 그 절은 갈항사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곳에는 염촉 80여 매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다소 신령스럽고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외의 상세한 사적들은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대각국사실록에도 일부 내용이 담겨 있다.
■ 진표가 전하다 (眞表傳簡)
진표는 완산주 출신으로, 부친은 진내말, 모친은 길보랑이었다. 성씨는 정(井)씨다. 그는 12세에 금산사의 숭제법사 아래에서 출가를 결심하고 수행을 배우기 원했다. 당시 그의 스승은 자신이 당나라 선도삼장에서 배운 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서 5계를 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며 진표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진표는 스승에게 물었다.
"열심히 수행한다면 얼마나 지나야 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스승의 말을 들은 진표는 명산을 찾아다니며 선계산 불사의암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몸과 말, 의지를 수련하는 3업을 닦으며, 망신참법이라는 극한의 참회 수행에 돌입했다. 그는 먼저 7일 밤 동안 자신의 두 무릎, 두 팔, 머리를 돌에 부딪쳐 수행했으며, 그로 인해 온몸이 부서지고 피가 비오듯 흘렀다. 하지만 부처님의 감응이 없자 그는 다시 몸을 내던질 각오로 7일을 더 정해 수행했다. 그렇게 14일째가 되던 날, 진표는 마침내 지장보살을 만나 계를 받게 되었다. 이 일이 있었던 시기는 개원 28년 경진년(740년) 3월 15일 진시(오전 7~9시)로, 당시 진표의 나이는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자씨, 즉 미륵보살에게로 향해 있었기에 수행을 멈추지 않고 영산사로 옮겨 다시 초심처럼 부지런히 수행에 임했다. 그러자 마침내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 2권과 함께 증과간자 189개를 전해주며 말했다.
"여기 제8간자는 새롭게 얻은 묘계를 상징하며, 제9간자는 완전한 계를 얻음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침향과 단향나무로 만든 것으로 번뇌를 상징한다. 이것을 세상에 전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는 다리처럼 쓰도록 하라."
진표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후 금산사로 돌아와 수행하며 매년 정성을 다해 단석(불교 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좌석)을 열어 법시(법으로 베푸는 공덕)를 베풀었다. 그의 단석은 너무나 엄숙하고 정결하여 말세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진표의 법화가 널리 전파되면서 여러 지역을 도셨고, 마침내 아슬라주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물고기와 자라들이 물 위에 다리를 놓으며 진표 앞에 모였고, 그들조차 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 시점은 천보 11년 임진년(752) 2월 15일경이었다. 일부 문헌에서는 이를 원화 6년(811)이라고 기록했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다. 원화는 헌덕왕 시기의 연호이기 때문이다. 당시 경덕왕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보살계를 내리고, 곡식 7만 7천 석을 하사했다. 또한 왕후의 대궐(초정)과 왕가 외척(열악) 사람들까지 모두 이 계품을 받았으며, 비단 500필과 황금 50냥을 공양물로 올렸다.
그는 이러한 지원을 모두 절에 전달하여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는 지금도 발연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는 바다의 물고기에게 계를 주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제자들 중 불법을 깊이 체득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심, 보종, 신방, 체진, 진해, 진선, 석충 등이 있었고, 모두 해당 산문의 초석을 다진 주역들이었다. 이 중 영심은 진표로부터 직접 법맥을 전수받은 인물로, 속리산에서 진표의 법통을 이어간 제자였다. 영심이 수행했던 단 만드는 방식은 점찰 6윤과는 약간 달랐지만, 수행 방법 자체는 산중(山中)에 전해지던 전통 규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나라 승전(僧傳)을 살펴보면 이와 유사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개황 13년(593년), 광주(광동 지역)에서 참법을 행하던 스님이 있었다. 그는 가죽으로 첩자 두 장을 만들어 '선'(善)과 '악'(惡)이라는 글자를 적고 사람들에게 던지게 했다. '선'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길한 것으로 간주했다. 또 그는 스스로 박참법(육신을 학대하며 참회하는 방식)을 통해 죄업을 소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방식은 남녀가 섞여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졌고 비밀리에 실행되었으며, 그 결과 청주(산둥성 동쪽 지역)까지 소문이 퍼졌다.
이에 동행한 관리들이 이를 조사하여 황제에게 보고했는데, 요망스러운 행위로 판단되었다. 이들이 말하기를 "탑참법(善字를 던지는 참회법)은 점찰경에 기반한 것이며, 박참법은 여러 경문에 따른 것인데 몸 전체를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듯한 수행 방식을 취합니다"라고 했다.
이 사건이 보고되자 황제는 내사시랑 이원찬에게 대응사로 가서 여러 대덕 고승들에게 진위를 묻게 했다. 이에 대사문 법경과 언종 등이 이렇게 답했다. "점찰경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문에는 보제 등 외국에서 번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비교적 최근에 작성된 듯합니다."
그들은 이어 말했다. "사본으로 전해지기는 하나, 여러 기록을 검토해 보아도 정확한 명칭, 번역자, 날짜 및 장소가 명시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탑참법은 여러 경문과 상이하므로 이를 정당한 수행 방식으로 채택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황제는 이와 같은 참회 방식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내용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살펴보자. 청주거사나 탑참과 같은 일은, 마치 말세의 유학자가 학문을 빙자하여 무덤을 파헤치는 악행을 저지른다는 의미로 풍자된 '시서발총'과 비슷하다. 이는 곧 "범을 그리려다 이루지 못해 개가 되었다"는 표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 미리 방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만일 점찰경의 번역자, 시기, 장소 등이 명확하지 않다고 하여 이를 의심한다면, 이는 삼(麻)을 얻으려다 금(金)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 경전의 구체적인 글귀를 읽다 보면,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시키는 방식이 섬세하고 치밀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더러운 잘못을 씻어내고 게으른 자들에게 자극을 주는 효과가 이 경전만큼 뛰어난 것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경전의 이름을 대승참이라고 했고, 또 여섯 가지 감각기관(육근)이 모여나온 것이라 전해졌다.
개원(開元)과 정원(貞元) 연간에 기록된 두 권의 석교록에서는 이 경이 정식 경전으로 편입되었다. 비록 성종(性宗)은 아니라 할지라도, 법상종(相敎)의 대승교리로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탑참이나 박참 같은 참회의 방식과 동급으로 논할 수는 없다.
사리불문경에서 부처님은 장자의 아들 빈야다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7일 낮과 7일 밤 동안 지난 죄를 뉘우쳐 모두 씻어내라."
빈야다라는 이 가르침을 따르며 정성을 다해 주야로 수행했다. 그러자 다섯째 날 저녁이 되던 때, 그의 방 안에는 갑자기 다양한 물건들이 비처럼 내려왔다. 그 물건들은 수건, 빗자루, 칼, 송곳, 도끼 등으로, 모두 그의 앞에 떨어졌다. 이에 빈야다라가 기뻐하며 부처님께 그 뜻을 물었더니 부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이것은 네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벗어날 징조이니라. 모두 베고, 쓸고, 털어내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다."
점찰경에서 윤(輪)을 던져 그 상(相)을 얻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진표 스님께서 참회를 통해 간자를 받고, 불법을 깨우치며 부처를 뵌 일이 결코 허망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더구나 점찰경을 거짓된 경이라거나 망령된 것이라 폄하한다면, 어찌하여 미륵보살께서 진표 스님께 친히 이 경을 전수했겠는가? 만약 이 경전을 금지한다면, 사리불문경 역시 금지해야 할 것인가?
언종(言宗)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일부는 오로지 남의 금만 훔치려 눈독을 들이고 정작 주변 사람은 보려 하지 않는 '확금불견인(攫金不見人)'과 같은 행태를 보인다. 글을 읽는 이들은 반드시 이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요계에 현신하여 용과 용맹함을 일깨우니
영악과 선계에서도 감응하여 소통했네
정성을 다해 탑참에 나섰다고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은 어룡마저 감화하였네
■ 심지계조(心地繼祖)
심지는 신라 제41대 헌덕왕 김씨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으며 지혜로웠다. 15세에 학문과 불도에 뜻을 두어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수행에 전념했다. 그는 팔공산 중악에서 수행하던 중, 속리산에 있는 심공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받아 과정법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정해 속리산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미 법회가 끝난 뒤여서 참례를 허락받지 못했다.
이에 그는 마당에 앉아 예배하고 참회하기 시작했다. 무려 7일이 지나자 많은 눈이 내렸으나, 심지가 서 있던 주변 10척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그 신기한 광경에 크게 놀랐다. 결국, 심지에게 법회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그는 스스로 사양하고 거짓 병을 핑계로 방에 물러나 조용히 당을 향해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 중, 그의 이마와 팔꿈치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는데, 이는 마치 진표율사가 과거 선계산에서 피를 흘리며 수행했던 장면과 같았다. 매일 지장보살이 찾아와 심지를 위로하였고, 법회가 끝난 뒤 심지는 산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옷깃 사이에 두 개의 간자가 있음을 발견한 그는 이를 심공에게 아뢰었다.
심공은 이를 이상히 여겨 간자가 보관된 함을 확인했으나, 함은 봉해져 있었다. 그러나 열어보니 간자는 사라져 있었고, 이는 더욱 기이한 일이 되었다. 심지가 다시 길을 가던 중 같은 간자가 옷깃 속에서 발견되자 이를 또다시 심공에게 알렸다. 그제야 심공이 말했다.
"부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이를 받들어 행하라."
간자를 받은 심지는 이를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갔다. 중악의 신은 두 선자를 데리고 산 꼭대기에서 그를 맞이하여 바위 위에 안내했고, 이후 그는 바위 아래에서 삼가 정식戒를 받았다.
심지는 간자를 모시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정하려 하였으나,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신과 선자들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간자를 던져 그 자리를 점쳤다. 간자는 바람을 타고 날아갔으며, 이에 신은 한 곡조를 읊었다.
막혔던 바위가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도다.
낙엽이 흩날려 흩어짐에 앞길이 밝아지는구나.
불골 간자를 구해 얻었으니
정결한 곳 찾아 정성을 다해 바치리라.
노래를 마치고 숲 속의 샘에서 간자를 찾았다. 이후 그곳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는데, 오늘날 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바로 그 유적이다.
본조 예종은 한때 부처님의 간자를 대궐로 모셔 예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잃게 되면서, 대신 牙簡(상아로 만든 간자) 하나를 본사로 돌려보냈다. 시간이 흐르며 그 간자는 원형을 알 수 없게 변하였고, 현재는 새것과 옛것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게다가 간자의 재질은 牙도 玉도 아닌, 무엇인지 알기 힘든 독특한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점찰경 상권에 따르면, 총 189개의 간자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상승(上乘)을 구해 불퇴전의 경지를 얻은 것이며, 둘째는 올바른 과(果)를 구하여 그 증거를 보이는 것이다. 셋째와 넷째는 중하승(中下乘)을 통해 불퇴위(不退位)를 얻는 내용이다. 다섯째는 신통력을 구하여 성취함을, 여섯째는 사범(四梵)을, 일곱째는 세간의 선정을 닦아 성취함을 의미한다. 여덟째는 바라는 묘계(妙戒)를 얻는 것이며, 아홉째는 과거에 받은 계율을 다시 되찾는 것이다. 열 번째는 하승(下乘)을 구하면서 아직 진정한 신심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그 외 172번째까지는 과거 또는 현세에서 선악, 얻음과 잃음 등이 교차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173번째 간자는 몸을 버리고 지옥에 이르는 일을, 174번째는 죽음 이후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아귀, 인왕, 천신 등을 만나게 되는 결과를 나타낸다. 그리고 도솔천이나 정토에 태어나는 것, 부처를 찾아뵙는 일, 혹은 특정 승(乘)에 거주하는 상태 등도 간자의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해탈을 이루는 제189번째 간자는 다양한 3세의 선악과보를 반영하며 각기 다른 삶의 결과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점을 치는데 간자가 마음속의 바람과 일치하면 감응한다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지극한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를 '허류'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8번과 9번 간자가 결국 189개의 간자 중 일부라는 점이다. 그러나 송전에 의하면 단지 '108첨자'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백팔번뇌라는 불교적 개념에서 온 표기일 가능성이 크다. 경문의 내용 또한 자세히 살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초기 문신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 2권에는 신라 말기 대덕 석충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사와 계간자 189개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간자가 동화사에 전해지는 그것과 일치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를 기리며 한 편의 시를 읊는다.
금규에서 성장하여 세속을 일찍 벗어나고
근검과 총명함은 하늘의 은총이로다
눈 덮인 뜰에서 간자를 뽑아내어
동화산 최고의 봉우리에 올려놓았구나
■ 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 (賢瑜伽, 海華嚴)
유가종(唯假宗)의 고승 대현은 신라 남산의 용장사에 거주하며 수행하고 있었다. 그 절에는 돌로 조성된 미륵보살의 장육상이 있었는데, 대현은 늘 그 불상을 돌아 공경하며 수행을 이어갔다. 흥미롭게도, 대현이 그 불상을 돌 때마다 불상 또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얼굴을 돌리는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곤 했다. 대현은 지혜롭고 논리적이며 민첩한 판단력과 분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법상종(法相宗)은 본래 그 철학과 교리가 심오하고 난해하여 해석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의 문호 백거이조차 이를 연구했으나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유식(唯識) 사상은 그 뜻이 깊고 오묘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인명(因明, 인도의 논리학) 또한 복잡해 학자들 사이에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배우고 깨우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대현 같은 지혜로운 이는 단독으로 당대 교리의 오류를 바로잡고, 단기간에 그 의미 깊은 도리를 깨달아 자유롭게 탐구했다. 그는 모든 이치를 명확히 분석하며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전파했는데, 동국의 학자들이 이를 따라 배우며 발전시켰다. 심지어 중국 학자들로부터도 인정받아 중요한 참고 지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 12년 천보 계사년(753년) 여름, 극심한 가뭄이 닥쳤다. 왕은 대현을 궁으로 초청해 금광경(金光經)을 설법하게 하고 비를 기원하도록 요청했다. 어느 날 의식을 진행하던 중, 그는 바리때를 펼쳐놓고 정수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양할 물이 늦게 도착하자 관리가 공양자를 꾸짖었다. 이에 공양자가 말하기를, "대궐 안의 우물이 말라 먼 곳에서 물을 구해 오느라 늦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를 들은 대현은 곧바로 물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고는 낮에 경전을 강의하던 중 향로를 받들고 무언가 묵묵히 기도했다. 잠시 후, 대궐 우물에서 물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높이가 일곱 길에 이르러 절의 찰당(刹幢) 높이만큼 치솟았다. 이 광경을 본 궁중 사람들은 크게 놀랐으며, 이후 이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현은 한때 스스로를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 경이로운 순간을 기리는 시가 다음과 같다.
남산의 불상을 돌면
불상 또한 그를 따라 돌았네
청구의 불교는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고
궁중 우물의 맑은 물 솟아올랐으니
향로의 연기에 그 의미를 담았음을 누가 알리랴
그 이듬해 갑오년(754년) 여름, 왕은 다시 고승 법해를 황룡사로 초청하여 *화엄경*을 설하게 했다. 왕은 직접 찾아가 향을 피우며 조용히 말했다.
지난해 여름, 대현법사가 *금광경*을 설하던 중 우물물이 일곱 길이나 솟아오르는 기적을 보였소. 그렇다면 스님의 법력은 어떠하오?
법해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것은 하찮은 일일 뿐, 굳이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지금이라도 바다의 물을 기울여 동악산을 잠기게 하고, 서울 전체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일쯤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법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오(午時)에 법해가 강론을 시작하고 향로를 들고 고요히 있자, 잠시 후 궁중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궁리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동쪽 연못이 넘쳐 이미 내전의 50여 채가 물에 떠내려갔습니다.
이에 왕은 깜짝 놀라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법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해의 물을 기울이기 전에 먼저 수맥을 불린 것뿐입니다.
왕은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법해에게 절을 올렸다. 이튿날 감은사에서 사람들이 보고하기를,
어제 정오 무렵 동쪽 바닷물이 밀려와 불전 앞뜰까지 차올랐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물러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왕은 법해를 더욱 깊이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이에 왕은 그의 능력을 찬미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법해의 물결을 바라보니 곧 법계를 보는 것 같구나.
사해의 물을 늘이고 줄이는 것도 어렵지 않네.
높디높은 수미산을 크다 말하지 말라.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스님의 손끝에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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