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은 1. 낭지 보현수, 문수점, 혜현, 신충, 포산이성, 영재우적, 물계자 등
■ 낭지의 구름 타기와 보현보살 나무 (朗智乘雲 普賢樹)
삽량주 아곡현의 영취산에는 기이한 중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암자에서 수십 년을 지냈지만, 그 고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스님 또한 자신의 이름이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항상 *법화경*을 설파하며 신비로운 능력을 보였다.
용삭 초년에는 지통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본래 그는 이량공 집안의 하인이었다. 일곱 살에 출가한 지통은 어느 날 까마귀가 나타나 울며 말했다. "영취산으로 들어가 낭지의 제자가 되라."
지통은 이 말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영취산을 찾아갔다. 골짜기의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자신을 보현보살이라 소개하며 계율을 줄 것이라고 하더니, 그에게 계를 베풀고 나서 사라졌다. 그 순간 지통은 마음이 환히 트이고 모든 것을 자각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길을 걷던 중 한 중을 만나 낭지 스님의 거처를 묻자, 그 중은 도리어 물었다. "왜 낭지를 찾으려 하는가?" 이에 지통은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고, 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낭지이다. 지금 내 집 앞에도 까마귀가 와서 '거룩한 아이가 스님께로 오고 있으니 마땅히 나가서 맞이해야 한다'고 알리기에 이렇게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낭지는 지통의 손을 잡으며 감탄하였다. "신령스러운 까마귀가 너를 인도하여 내게로 오게 하고, 또 내게 알려 너를 영접하게 했으니 정말 상서로운 일이구나. 아마도 산령이 은밀히 도움을 준 것일 게다. 전해지는 말로는 이 산의 주인이 변재천녀라고 하더구나."
지통은 이 말을 듣고 깊은 감사를 느끼며 울먹이며 낭지 스님에게 귀의하였다. 그러자 낭지는 계를 내려주려 했으나, 지통이 말했다. "저는 이미 동구 나무 아래에서 보현보살로부터 정계를 받았습니다."
이를 들은 낭지는 놀라며 칭찬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네가 보살의 완전한 계를 직접 받았다니, 나는 평생 보현보살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음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너는 이미 성취했구나. 내가 너를 따라가지 못하겠으니 실로 감격스럽다."
그 후로 사람들이 보현보살이 나타났던 나무를 ‘보현수’라 부르게 되었다.
지통이 물었다. "법사께서 이 절에 계신 지도 꽤 오래되셨겠군요." 그러자 낭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법흥왕 정미년(527년)에 처음 이곳에 머물기 시작했으니 그로부터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한편, 지통이 영취산에 들어온 것은 문무왕이 즉위한 원년(661)이었으니, 세월로 따지면 135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었다.
그 후 지통은 의상이 머무는 곳을 찾아 불법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깨달았고, 불교 교화를 통해 큰 역할을 했다. 훗날 그가 바로 <추동기>의 저자가 되었다.
원효가 반고사에 머물 때마다 늘 낭지 스님을 찾아가 뵙곤 했다. 그때 낭지 스님은 원효에게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하도록 권유하였다. 원효가 저술을 마친 후, 자신의 은사인 문선을 통해 책을 공손히 바쳤으며, 그 편미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다.
서쪽 골짜기의 사미는 공손히 인사 올리며
동쪽 봉우리 고암 상덕 앞에서 예를 드리나이다.
떠도는 먼지를 불어 보내니 영취산에 닿고,
용연의 잔 물방울마저 덧붙이옵니다.
대화강 동쪽 산자락에 있는 연못은 용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라 '용연'이라 불렸다. 낭지 스님은 지통과 원효 같은 위대한 성인들로부터도 존경받으며 스승으로 모셔질 정도로 고도의 도력을 지닌 분이었다.
스님은 한때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으로 가서 신도들과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 지나 곧바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곳 승려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단지 근처 사람으로 여겼다. 어느 날, 청량산의 절에서는 승려들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항상 이 절에 머무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승려들은 각자의 사찰에서 이름난 꽃이나 진귀한 식물을 가져와 도량에 바쳐라."
이튿날, 낭지는 산속에서 이상한 나무 한 가지를 꺾어와 바쳤다. 이를 본 승려는 말했다.
"이 나무를 범명으로 '달제가라'라 하고 이곳에서는 '혁(赫)'이라 부릅니다. 이 나무는 오직 서천축과 해동의 두 영취산에서만 자생합니다. 두 산 모두 보살들이 머무는 법운지에 속합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성자일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그가 살던 곳을 수소문한 끝에 해동 영취산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낭지 스님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사람들이 그의 암자를 '혁목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혁목사의 북쪽 산 등성이에는 옛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곳이 바로 당시 경내였다고 전해진다.
영취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낭지가 과거에 암자 자리를 두고 가섭불 시대의 절터였다고 말하며 땅을 파서 등뼈 두 개를 얻었다."
원성왕 시기에는 대덕 연희가 이 산속으로 들어와 거주하며 낭지 스님의 전기를 지었고, 이는 세상에 널리 퍼졌다.
화엄경에 따르면 제10 법운지는 보살의 경지라 하였다. 낭지 스님이 구름을 타고 떠오른 일은 아마도 부처가 삼지를 다스리고, 원효가 그의 몸을 백 개로 나누었던 것과 같은 경지임을 암시할 것이다.
이를 찬양하며 읊는다.
깊은 산속에서 수도한 지 어느덧 백여 년,
높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적 없었으나,
산새의 평화로운 지저귐 끊이지 않는 듯하니,
구름 속 오고 감이 어찌 헛되지 아니한가.
■ 연회가 이름을 피하다, 문수점 (緣會逃名, 文殊岾)
고승 연회는 영취산에 은거하며 보현보살의 관행법을 닦고, 늘 경전을 읽으며 수행에 정진했다. 그의 암자 앞 연못에는 항상 연꽃 두세 송이가 피어 있었는데,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 신비한 모습이었다.
원성왕이 이 기이하고 상서로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를 불러 국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연회는 이 소식을 듣자 곧 암자를 떠나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서쪽 고개의 바위 사이를 지나던 중 밭을 갈던 한 노인이 그를 보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연회가 조용히 대답했다.
나라에서 나를 잘못 알아보고 관직으로 얽매려 하니 이를 피해 떠나고 있습니다.
노인은 그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팔 것이지, 왜 먼 곳까지 가서 팔려고 고생하십니까? 스님은 이름을 싫어하는 분이라기보다는, 사실은 피하면서도 이름을 내기를 멀리하지 않는 분 같소이다.
연회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 여겨 불쾌히 여기며 곧장 길을 나섰다. 몇 리쯤 더 가다가 그는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고, 그 역시 어디로 가느냐 물었다. 연회는 앞서 노인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그러자 노파가 물었다.
혹시 조금 전 앞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연회는 대답했다.
네. 한 노인을 만났는데 저를 심히 업신여기며 말해 기분이 상해 그냥 지나쳤습니다.
노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분은 바로 문수보살이셨습니다. 보살의 말씀을 무시하고 지나쳤으니 어찌하시렵니까?
이 말을 듣고 연회는 크게 놀라면서 부끄러운 마음에 급히 그 자리를 떠나, 아까의 노인을 찾아 돌아갔다. 그는 몸을 깊이 숙이며 간절히 사과했다.
성인의 말씀을 감히 거역할 수 없으니 이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시냇가에서 만난 노파는 또 누구였습니까?
노인은 담담히 말했다.
그는 변재천녀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자취를 감추었다. 연회는 큰 깨달음을 얻고 암자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사자가 그를 불러가라는 명을 받들고 암자로 찾아왔다. 연회는 이 일이 필연임을 깨닫고 기꺼이 왕궁으로 나아갔다. 결국 왕은 그를 국사로 삼았다.
이후 연회 스님이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은 곳은 문수점이라 불리게 되었고, 노파와 만났던 장소는 아니점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에 한 시를 남겨 그 뜻을 기린다.
저자에선 어진 인재가 오래 숨어 있지 않고,
주머니 속 송곳도 끝을 감추기 어렵다네.
뜰 아래의 연꽃 하나로 이름을 드러냈으니,
깊지 않은 운산을 괜히 탓하지 않으리.
■ 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 (惠現求靜)
혜현은 백제 사람으로, 어린 시절 일찍이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법화경을 외우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복을 구하였고, 그로 인해 부처의 신비로운 가피를 경험하는 일이 많았다. 삼론(三論)을 두루 익힌 후 본격적으로 수행에 전념하게 되자, 성령과의 교감에까지 이르렀다.
처음에는 북쪽 지역의 수덕사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신도들이 찾아오면 불경을 강론하고, 찾는 이가 없을 때는 홀로 불경을 외며 나날을 보냈다.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문은 멀리 알려져,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찰 문 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로 인해 소란스러워지자 그는 강남의 깊은 달라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산은 험준하여 사람들이 오가기 어려웠고, 결국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한적한 삶 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석실 속에 안치했는데, 어느 날 범이 나타나 그 유해를 먹어치운 후 해골과 혀만 남았다. 그 혀는 추위와 더위가 세 번이나 바뀌는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고 붉고 부드럽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자줏빛으로 변하고 돌처럼 단단해졌다고 전한다. 중들과 신도들은 이를 신성하게 여겨 석탑에 모셔 경배했다. 혜현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는 당나라 정관 초년 무렵의 일이었다. 비록 그는 중국에 유학하거나 외부로 나아간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중국까지 알려졌고 전기까지 쓰였으며 당나라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또한, 고구려의 승려 파약은 중국 천태산으로 유학하여 천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교관을 배웠다. 그는 신비로운 인물로 이름을 알렸으나 결국 산중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영험한 행적과 가르침은 당승전에 실리며 후대에까지 전해졌다.
이를 기리며 읊는다.
주미로 설법하던 일도 한때의 꿈,
지난날 독경 소리 구름 속에 잠겼네.
세속에 그 이름 길이 남았으니,
죽어서도 빛나는 혀 연꽃 같도다.
■ 신충이 벼슬을 그만두다 (信忠掛冠)
효성왕이 아직 왕에 오르지 못하고 잠저에 머물던 시절, 그는 어진 선비 신충과 함께 대궐 뜰의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며 하루는 말했다.
내가 만약 훗날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신충은 감격하여 일어나 절을 올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효성왕이 즉위하면서 공신들에게 상을 내릴 때, 신충은 명단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신충은 원망스러운 노래를 지어 그것을 잣나무에 붙였다. 이상하게도 잣나무는 곧 시들기 시작했다.
효성왕이 그 일이 기묘하게 여겨 여러 사람을 보내 확인하게 하니, 이들은 나무에 붙은 신충의 노래를 가져왔다. 이를 본 왕은 큰 충격을 받으며 말했다.
정무가 바쁘고 혼잡해 자칫 각궁(신충의 별호)을 잊을 뻔하였다.
왕은 즉시 신충을 불러 벼슬을 내렸고, 이때 잣나무는 마치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신충의 원망의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뜰의 잣나무는 가을에도 시들지 않았거늘,
그대 또한 나를 잊지 않으리라 하셨소.
우러러 보던 얼굴은 여전히 계시건만,
옛 못의 달 그림자처럼 흘러가는 물살에
그대를 바라보나 내 마음은 갈 길을 잃었소.
그렇게 신충은 효성왕과 경덕왕 두 왕조에 걸쳐 벼슬하며 왕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경덕왕 22년 계묘년(763년), 신충은 두 친구와 함께 벼슬을 내려놓고 남악으로 들어갔다. 왕이 두 번이나 그를 불렀으나 신충은 끝내 나오지 않았으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평생 학문에 정진하며 구학(은둔)을 실천했으나, 동시에 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기도하기를 원했고 왕 또한 이를 허락하였다. 단속사 금당 뒷벽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임금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남쪽으로는 속휴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라 불리고 있다.
다른 기록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경덕왕 때 직장 이준이 소원을 빌며 나이 50에 조그마한 절,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큰 절로 만들기를 발원하였고, 그 이름을 단속사라 했다. 이준 역시 머리를 깎고 공굉장로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절에서 20년간 거주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서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과 다르지만, 두 가지 이야기를 함께 기록하여 의심을 덜고자 한다.
이를 기리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공명 다하지 못한 채 귀밑머리는 먼저 셀 뿐이니,
임금의 총애 깊어도 바쁜 세상 속 한 평생이라.
푸른 산 언덕 너머가 꿈속에 자주 떠오르니,
향을 피우며 왕의 복을 빌러 내가 가리라.
■ 포산의 거룩한 두 승려 (包山 二聖)
신라 시대에 관기와 도성이란 두 성스러운 스승이 있었으나,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은 함께 포산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의 암자에 머물렀고, 도성은 북쪽 굴에 거주하였다. 서로의 거리는 약 십여 리였지만, 구름 사이를 헤치며 달빛 아래 노래를 부르곤 했기에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였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기만 하면 산속 나무들이 마치 환영하듯 남쪽으로 몸을 굽혔다고 한다. 이를 본 관기가 도성을 찾아가게 되었으며, 반대로 관기가 도성을 부르면 이번엔 나무들이 북쪽을 향해 휘어졌다. 이렇게 두 사람은 긴 세월을 함께하며 특별한 유대를 이어갔다.
어느 날 도성은 뒷산의 높은 바위에 앉아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바위 틈에서 몸을 빼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이후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가 수창군에 가서 생을 마쳤다 믿었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의 뒤를 따라 관기도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두 성사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머물던 자리를 기념하였고, 그 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도성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어 후대 사람들이 그 아래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 7년(982년)에 이르러 승려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거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미타도량을 열어 50여 년간 부지런히 수행하며 사회에 헌신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곤 했다. 이때 현풍 지역의 20여 명 신도들이 함께 결사하여 해마다 향나무를 모아 절에 헌납하였다. 이들이 산에서 가져온 향나무는 쪼개고 깨끗이 씻어 발 위에 놓으면 밤이 되면 촛불처럼 빛을 내는 신기한 일이 있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기꺼이 향나무를 바치고 그 불빛에서 희망과 축복을 느꼈다. 이런 현상은 두 성사의 은혜이거나 산신의 도움으로 여겨졌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으로, 그는 먼 옛날 가섭불 시대에 부처로부터 부탁받았다고 전해진다. 본서에는 그가 “산중에서 천 명의 성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린 뒤 남은 과보를 받으리라”고 한 기록이 있다.
또한, 산속 기록에는 아홉 성스러운 인물(9聖)의 유사가 전해지는데, 이름은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들의 흔적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회자되고 있다.
그들을 기리며 시 한 수를 읊는다.
달빛 밟으며 서로 만나 구름샘 희롱했으니
두 노인의 풍류는 몇 백 년을 지났도다
안개 서린 깊은 골짜기엔 고목만 무성하지만
서늘한 그림자들은 지금도 서로 어긋난다.
반(般)은 우리말로 피나무를 뜻하고, 첩(牒)은 떡갈나무를 의미한다. 이 두 이름을 가진 성인인 반사와 첩사는 오랜 세월 동안 깊은 산골에 숨어 지냈으며, 인간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 이들은 나뭇잎을 엮어 만든 옷으로 추위와 더위를 견디고 최소한의 필요만 채우며 살았기에, 그들의 이름이 곧 삶의 상징이 되었다. 듣기로는 풍악산에서도 이런 이름의 은자들이 있었다고 하니, 옛날 은둔자들이 세속을 떠나 즐기던 운치가 이러한 모습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따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예전에 포산에 머물던 시절, 이 두 스님의 고결한 덕행을 기리며 시 한 수를 지어 남겼다. 다음은 그 글이다.
자모와 황정으로 허기를 달래고
입은 옷은 나뭇잎뿐, 누에가 짠 비단이 아니었네.
찬바람 거세게 불고 길은 험난하건만,
저녁 숲으로 나무를 하러 돌아오고는
달 밝은 깊은 밤 아래 앉으니,
몸 반쯤은 바람 따라 아득히 떠 있는 듯.
낡은 자리에서 잠에 들면,
속세의 일은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네.
구름마저 떠나간 뒤 두 암자는 폐허가 되었으나,
외로운 산에는 사슴들만 뛰노는구나.
■ 영재가 도적을 만나다 (永才遇賊)
영재는 천성이 익살맞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향가를 잘 부르던 인물이었다. 삶의 만년에 그는 남악으로 은거하고자 대현령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60여 명의 도둑 무리를 마주쳤다. 도둑들은 그를 해치려 했으나, 영재는 칼날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며 화기애애한 태도로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도둑들은 그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겨 이름을 묻자, 그는 자신을 영재라고 밝혔다. 영재라는 이름을 들은 도둑들은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노래를 지어 부를 것을 요청했다. 영재는 이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읊었다.
내 마음의 자취를 몰랐던 그날들.
멀리 지나치다가 이제 숨어가네.
어찌 삿된 파계주를 만나 두려운 모습으로 되돌아갈까.
이 칼날도 지나고 나면 좋은 날이 오리라.
아아, 다만 이마저도 선(善)이라 하기 어렵구나.
노래를 들은 도둑들은 깊이 감동했고, 비단 두 단을 내밀며 영재에게 선물로 주고자 했다. 그러나 영재는 웃으며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재물이야말로 지옥으로 이끄는 근본임을 알기에 깊은 산속으로 숨어 여생을 마치려 하는데, 어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겠소?"
영재는 말을 끝낸 뒤 비단을 땅에 던졌다. 이 말을 듣고 도둑들은 다시 한번 감동받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칼과 창을 모두 버렸다. 머리를 깎고 영재의 제자가 된 이들은 그와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시 영재의 나이는 거의 아흔이었으며, 이 시기는 원성대왕의 시대였다.
이를 기리며 다음과 같이 읊는다.
지팡이 짚고 산 속으로 드니 뜻이 더욱 깊어지네.
비단과 구슬로 어찌 마음을 다스릴까.
푸른 숲의 군자들이여, 그걸 내게 주지 말라.
지옥이란 다름 아닌 한 치 금이 그 근본이라.
■ 물계자
내해왕이 제위에 오른 지 17년째 되던 임진년(212년), 보라국, 고자국, 사물국 등 여덟 나라가 연합하여 국경을 침범해 왔다. 이에 왕은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에게 군사를 이끌고 이를 물리치도록 명했고, 결국 여덟 나라는 모두 항복하게 되었다. 이때 물계자는 싸움에서 가장 뛰어난 공적을 세웠으나 태자의 미움을 받아 아무런 상을 받지 못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한 사람이 물계자에게 물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은 당신의 몫인데도 상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태자께서 당신을 미워함을 원망하지 않겠소?
이에 물계자는 대답했다.
나라에는 임금이 계신데, 신하된 몸으로 태자를 어찌 원망할 수 있겠소?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직접 임금께 아뢰는 게 좋지 않겠소?
물계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공을 자랑하거나 이름을 내세우고, 스스로를 드러내며 남을 깎아내리는 것은 선비로서 할 바가 아니오. 나는 단지 묵묵히 때를 기다릴 뿐이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해왕 20년 을미년(215년)에는 골포국 등 세 개의 나라 왕이 각각 군사를 이끌고 와 다시 침략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왕이 친히 군사를 통솔하여 싸움에 나섰고, 결국 세 나라 모두 왕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도 물계자는 수십 명의 적병을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지만, 여전히 그의 공적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뒤 물계자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도리는 위태로움을 만나면 생명을 바치고, 환란이 닥치면 몸을 잊으며, 절개를 지켜 생사를 논외로 하는 것이라 하오. 보라국과 갈화에서의 싸움은 분명 나라가 겪은 큰 위기였고 임금께서 위험에 처하신 일이었소. 하지만 나는 목숨을 걸고 임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어찌 충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소. 불충한 신하로서 어찌 임금을 섬겼겠으며, 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로서 어찌 부모를 뵐 수 있겠소. 충효의 도를 모두 잃었는데 무슨 염치로 조정과 세상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겠소.
그 후 그는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둘러맨 채 사체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대나무의 곧은 성질에 자신의 심정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맞추어 거문고를 연주하며 곡조를 붙였다. 그는 이렇게 은거하며 끝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영여사 (迎如師)
실제사에 속한 승려인 영여의 혈통과 성씨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덕성과 품행은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덕왕은 그의 명성을 듣고 예우를 갖추어 공양을 올리기 위해 사자를 보내 불렀다. 영여는 대궐에 올라 의식을 마친 뒤 떠나려 했으나, 왕은 사자를 보내 절까지 모셔드리게 했다. 그러나 영여는 절에 이르러 곧 자취를 감춰버렸고, 어디로 간 지 알 수 없었다. 사자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심히 의아하게 여겼으며 그를 국사로 추봉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가 머물던 절을 국사방이라고 불렀다.
■ 포천산의 다섯 비구(경덕왕 대)
삽량주의 북동쪽 20리 지점에는 포천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이곳에는 한 석굴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다워 마치 사람이 정교하게 깎아 만든 듯했다. 이 석굴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다섯 비구가 머물며 아미타불을 염하고 극락정토를 염원하며 수행에 몰두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서쪽으로부터 홀연히 성스러운 존재들이 나타나 그들을 마중했다. 다섯 비구는 각각 연꽃 모양의 연화대 위에 앉아 하늘로 떠올랐고, 통도사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때 하늘에서는 신비로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에 절의 승려들이 나와 본즉, 다섯 비구는 무상과 고, 공의 진리를 설파한 뒤 육신을 벗어버렸고 찬란한 빛을 내며 서쪽으로 떠났다. 승려들은 그들이 육신을 벗어둔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이를 치루(置樓)라 명명했는데,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전해지고 있다.
■ 염불 스님(念佛師)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피리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절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한 특이한 승려가 있었다. 그는 항상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는데, 그 울림이 성 안 구석구석까지 퍼져 360방과 17만 가구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낭랑한 그의 소리는 사람들을 감탄케 했으며, 모든 이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를 깊이 공경했고 염불사로 불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그의 형상을 만들어 민장사에 모셨으며, 그가 살았던 피리사의 이름을 염불사로 바꾸었다. 또한 이 절 옆에 또 다른 절이 있는데, 마을 이름을 따서 양피사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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