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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본최사 삿된 것을 물리침(密本催邪)

선덕왕 덕만은 오랜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홍륜사의 승려 법척이 왕의 부름을 받고 치료에 나섰으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병세에 큰 효과는 없었다. 그 무렵 밀본법사는 그의 덕행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신하들이 왕에게 법척 대신 밀본법사를 맞아들일 것을 간청했다. 왕은 이를 수락하고 밀본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밀본은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을 정성껏 독송하다가, 그가 지니고 있던 육환장이 홀연히 침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육환장은 안에서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승려 법척을 꿰뚫더니, 둘을 뜰 아래로 내던지고 말았다. 그러자 왕의 병세는 신기하게 금세 나았다. 당시 밀본의 이마 위로 오색의 신령스러운 빛이 퍼졌는데, 이를 보는 사람들 모두 깊이 놀라고 경이로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승상 김양도가 어린 시절 갑작스러운 병에 걸렸는데, 입이 붙고 몸이 굳어 말을 할 수도,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양도는 매번 집 안에 큰 귀신이 작은 귀신들을 거느리고 와 음식을 탐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무당들이 와서 제사를 지내보았지만, 귀신들은 떼를 지어 오히려 제사 자리에서 다투며 혼란을 일으켰고, 모욕까지 서슴지 않았다. 양도는 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싶었지만 입이 닫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법류사 승려를 청해와 《불경》을 읽었으나, 이번에는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령해 쇠망치로 승려의 머리를 내려쳐, 그를 쓰러뜨리고 결국 피를 흘리며 죽게 했다.

며칠 뒤 김양도의 가족은 사자를 보내 밀본을 찾아오도록 했다. 사자가 돌아와 전하기를 밀본법사가 요청을 받아들이고 방문하겠다고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귀신들은 급히 얼굴빛이 변했고, 작은 귀신이 말했다.  
"법사가 오면 불리할 테니 도망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한 태도로 답했다.  
"무슨 문제가 생기겠느냐?"  

잠시 후 사방에서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한 대력신들이 나타나 귀신들을 모두 포박해 데려갔다. 이어 수많은 천신들이 주변에서 기다리는 가운데 밀본이 도착했다. 그는 아직 《불경》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양도의 병세가 모두 사라졌고, 양도는 다시 말을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병이 나은 양도는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며, 이후 평생 불교를 독실히 믿는 데 매진했다. 그는 홍륜사의 오당 법당 주불로 미륵존상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는 보살상을 모셨으며, 법당 내부에는 금빛으로 아름다운 벽화를 그렸다.

밀본은 과거 금곡사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다. 또한 김유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이 많은 거사 한 명과 돈독한 교분을 쌓았다. 유신공의 친척인 수천이 심각한 병에 걸려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자, 김유신은 그 거사를 불러 친척의 병세를 살펴보게 했다. 마침 수천의 친구였던 인혜사가 중악에서 방문했는데, 거사를 보더니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그대의 모습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만 하는 사람 같은데, 어찌 타인의 병을 고칠 수 있겠소?"  
그러자 거사는 차분히 대답했다.  
"나는 단지 김공의 명을 따라 마지못해 이곳에 온 것뿐입니다."  

인혜가 말했다.  
그대는 내 신통력을 한번 보시오.  

이어 그는 향로를 받아 들고 향을 피운 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색 구름이 그의 이마 위를 둘러싸고 하늘꽃이 흩날리며 내려왔다.  

거사가 이를 보고 말했다.  
스님의 신통력은 참으로 기이하고 불가사의합니다. 저 역시 변변치 못하지만, 작은 재주가 있어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부디 스님께서 잠시 제 앞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인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사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인혜의 몸이 공중으로 뒤집힌 채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높이는 한 길쯤 되었고, 한참 후에야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거꾸로 머리가 땅에 박혀 마치 말뚝처럼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끌어보기도 하고 밀어보기도 했으나,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거사가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인혜는 그 상태로 밤새 땅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이튿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이한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김공에게 알렸다. 김공은 직접 거사에게 찾아가 인혜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제야 거사가 나서서 인혜를 바로 세웠다. 이후로 인혜는 더 이상 신통력을 뽐내거나 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이를 기려 이렇게 읊는다:  

붉고 자줏빛 꽃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리며 주색을 흐트려 놓으니,  
슬프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목(가짜 보석)조차 구슬이라 믿었구나.  
거사가 손가락을 가벼이 튕기지 않았더라면,  
그 상자 속엔 얼마나 많은 무부(옥처럼 보이지만 진짜 옥이 아닌 돌)가 담겼을까?  


■ 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 (惠通降龍)

혜통의 가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세속인일 때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의 동구에 집을 두고 살았다. 어느 날, 집 동쪽 개울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집 뒤 쪽 동산에 버렸다.  

다음 날 새벽, 뼈가 사라진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피의 흔적을 따라갔다. 그러자 그 뼈는 원래의 굴 안으로 옮겨져 있었고, 거기서 수달이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혜통은 경이로움과 감탄으로 한참 동안 망설이다 속세를 떠날 마음을 먹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이라 바꾸게 되었다.  

혜통은 이후 당나라로 건너가 무외 삼장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하지만 삼장은 냉담하게 거절하며 "신라 사람에게서 법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혜통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삼장의 곁에서 3년 동안 묵묵히 정성을 다하며 따랐지만, 삼장의 태도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통은 분한 마음에 뜰로 나가 불타는 동이를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곧 그의 정수리가 갈라지면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다가와 불타는 동이를 치우고 손으로 그의 상처를 만지며 신주를 외우자 상처가 완전히 나았다. 다만 그의 머리에는 왕관 모양의 흉터가 남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왕화상이라 불렀다. 삼장은 이때 혜통의 인격과 깊은 뜻을 인정하며 그에게 이심전심의 비전을 전수하였다.  

당시 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병에 걸리자, 고종 황제가 삼장에게 공주를 치료해 줄 것을 명했다. 삼장은 대신 혜통을 추천했고, 혜통은 명령을 받아들여 치료를 시작했다. 흰 콩 한 말을 은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흰 갑옷을 입은 신병이 나타나 병마를 물리치려 했으나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담아 주문하니 검은 갑옷의 신병이 나타났다. 흰 갑옷과 검은 갑옷의 신병들이 함께 힘을 합치자 마침내 병마는 물러갔고, 교룡이 쫓겨나며 공주의 병도 나았다.  

그러나 교룡은 자신을 쫓아낸 혜통에게 원한을 품고 신라의 문잉림으로 가 여러 사람들에게 화를 끼쳤다. 당시 당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정공이 혜통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스님께서 쫓아내신 독룡이 본국으로 와 큰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부디 돌아오셔서 용을 제거해 주십시오."  

혜통은 정공과 함께 인덕 2년(665년)에 신라로 돌아와 용을 쫓아버렸다. 하지만 용은 이번엔 정공을 원망하며 버드나무로 변신해 그의 집 앞에 자리 잡았다. 정공은 그 나무가 용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단지 무성한 그 모습만 좋아하며 애지중지했다.  

그 후 신문왕이 승하하고 효소왕이 즉위하면서 임금의 산릉 길을 닦기 위해 정공 집 앞의 버드나무를 베어내야 했다. 유사가 이를 베려 하자 정공은 격분하여 "차라리 내 목을 베지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효소왕은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 "정공이 왕화상의 술법을 믿고 불온한 계획을 꾸미려 한다니 그의 말대로 그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갑옷을 입힌 병사를 보내 왕화상을 붙잡도록 했다. 그런데 혜통은 마침 왕망사에 머물고 있었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는 사기병 하나와 붉은 붓을 손에 들고 병사들에게 외쳤다.

“내가 하는 바를 지켜보아라.”

그렇게 말하며 병 목에 붉은 선을 그었다. 그러고 나서,

“너희들의 목을 확인해 보아라.”

라고 하자, 병사들은 자기들 목에 붉은 선이 그어진 것을 보고 서로 마주 쳐다보며 크게 놀랐다. 혜통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내가 이 병 목을 끊는다면, 너희들 목 또한 끊어질 것이다. 그럼 어찌하겠느냐?”

겁에 질린 병사들은 궁궐로 돌아갔고, 임금에게 자신들의 목에 생긴 붉은 선을 보여주며 모든 것을 보고했다. 그러자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화상의 신통한 능력을 어찌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 후로 혜통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녀가 갑작스럽게 병에 걸리고 말았다. 우려에 빠진 임금은 혜통에게 부탁해 치료를 맡겼다. 혜통의 손길로 병이 낫게 되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더욱 믿게 되었다. 이때 혜통은 이렇게 말했다.

“정공께서는 독룡의 해악으로 인해 억울하게 나라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는 정공의 가족에게는 죄를 면해 주었으며, 혜통을 국사로 삼아 높은 자리에 임명했다.

용은 정공의 한을 풀고 나서 기장산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웅신(곰의 신)이 되어 더욱 심각한 해악을 끼쳤으니, 산 아래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에 혜통은 직접 기장산으로 들어가 용을 달래며 부살계(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율)를 가르쳤다. 그러자 웅신의 해악이 차츰 사라졌다.

처음 신문왕이 몸에 등창이 나 혜통에게 치료를 부탁했을 때도 비슷했다. 혜통은 임금 앞에서 주문을 외우며 치료했고, 곧바로 등창이 나았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 있을 때 한 장인(평민) 신충이라는 이를 부당하게 처벌하여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신충은 깊은 원한을 품고 윤회 환생할 때마다 폐하께 보복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등창 또한 그 원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땅히 신충의 원한을 풀기 위해 절을 세우시고 그의 명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를 들은 임금은 혜통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한을 풀어주기로 했다.

왕이 그 말을 올바르게 여겨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라 지었다. 절이 완공되자 하늘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임금이 절을 세워주신 덕분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  

노랫소리가 들린 곳에는 절원당을 지었으며, 그 당과 절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보다 이전에는 밀본법사 뒤를 이어 고승 명랑이 있었다. 명랑은 용궁에 들어가 신비로운 인장을 얻어 신유림을 처음 세웠으며, 여러 차례 이웃 나라의 침략을 기도로 물리쳤다. 화상은 무외삼장의 핵심 가르침을 전하며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들을 구제하고 만물에 감화를 불어넣었다. 또한, 숙명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사람들의 한을 풀게 했으니, 그때 밀교(진언밀교)의 교풍이 크게 떨쳤다.  

천마산 총지암과 모악의 주석원 등이 모두 이로부터 갈래를 이루었다.  

어떤 이들은 혜통의 속세 이름을 존승각간이라 전한다. ‘각간’은 신라에서 재상을 뜻하는 직위이지만, 혜통이 실제로 벼슬을 지녔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그가 시랑(豺狼)을 쏘아 잡았다고도 하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를 기리며 노래한다.  

산 복숭아와 계곡의 살구꽃이 울타리를 환히 비추는데,  
깊어진 봄날, 두 언덕에 꽃들이 피어난다.  
혜통이 한가로이 수달을 잡음으로써,  
마물을 멀리 쫓아내고 서울 근교를 평온하게 만들었네.  


■ 명랑의 신인종 (明朗神印)

금광사 본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사 명랑은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불도를 배운 뒤 돌아오는 길에 바다의 용왕을 만나 청을 받아들여 용궁에 들어갔다. 거기서 비법(秘法)을 전수하고, 황금 천량을 보시받아 이를 가지고 땅 밑으로 들어와 자기 집 우물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자신의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을 사용해 탑과 불상을 장식했는데, 그 광채는 매우 빼어났다. 이에 절의 이름을 금광사라고 지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며, 자는 국육이다. 그는 신라의 사간(舍官) 재량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이다. 법사를 종종 법승량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남간부인은 소판 무림의 딸 김씨로, 자장의 누이동생이었다. 재량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국교 대덕, 차남은 의안 대덕, 명랑 법사는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나서 태기를 느꼈다고 전해진다.

명랑은 신라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정관 9년 을미(635)에 신라로 귀국했다. 이후 총장 원년 무진(668)에는 당나라 장수 이적이 대군을 이끌고 신라 군대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후 남은 군사를 백제에 주둔시키면서 신라를 공격하려는 계략을 세웠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해 이를 막으려고 했고, 당 고종은 이에 격노해 설방에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도록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문무왕은 두려워하며 명랑 법사를 청해 비법으로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공덕으로 명랑은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울 때에도 해적들의 침입이 있었는데, 이때 안혜와 낭융의 후예인 광학과 대연 두 고승을 청해 비법을 펼치게 함으로써 해적의 침략을 물리쳤다. 이들은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고 한다. 이에 태조는 명랑부터 시작하여 인도의 고승 용수에 이르기까지 9조(祖)를 설정하였다. 또 태조는 광학과 대연을 위해 현성사를 세워 신인종의 중심 사원으로 삼았다.

신라 왕경(서울) 동남쪽 약 20리 지점에는 원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세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원원사는 안혜와 4대덕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절로, 4대덕의 유골은 절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 조사암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4대덕은 모두 신라 시대의 명망 높은 승려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주 호장 거천의 어머니는 아지녀이고,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였으며, 명주녀의 어머니는 적리녀였다. 적리녀의 아들로는 광학 대덕과 대연 삼중이 있었고, 이 두 사람은 신인종에 귀의하였다. 장흥 2년 신묘(931)에 광학과 대연은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왕의 행차에 동행하며 분향하고 수행하였으며, 이에 태조는 그 노고를 기려 이들의 부모를 위해 기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돌백사에 전답 몇 결을 하사했다.
그렇다면 광학 대연 두 사람은 태조와 함께 서울로 들어왔고, 안혜 법사 등은 김유신과 함께 원원사를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광학 등 두 사람의 유골이 이곳에 안치된 것뿐이지, 네 명의 대덕이 모두 원원사를 세운 것도 아니고, 모두 태조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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