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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충렬왕 7년(1281년)경 완성된 승려 일연의 사찬 문헌이다. 이 책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약 140년 뒤, 각훈의 해동고승전보다 약 70년 뒤에 편찬된 역사서로, 불교 신앙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한다.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 유학 계열의 대표적 신하가 왕명의 따라 당시 전해지던 모든 역사 자료를 활용해 삼국 및 통일신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정사(正史)이다. 한편, 해동고승전은 경북 오관산 영통사의 주지로 있었던 불교 학승이 왕의 명을 받아 편찬한 불교사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문헌은 삼국 시대의 사회 일반과 불교계를 각각 다룬 정통 사서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러한 정사가 이미 존재하는데도, 어째서 일연은 승려와 속세의 이야기를 혼합해 삼국유사를 새로 집필했을까?

단순히 여유 시간을 활용해 "어떤 사실들과 이야기들을 엮어 모은 것" 정도였을까?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작성된 내용으로 보기엔 삼국유사는 폭넓은 역사적 고증과 철저한 노력이 깃들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불과 5권으로 구성된 삼국유사는 인용된 고증 자료만 보아도 내용의 다양성과 치밀함에서 삼국사기 50권을 압도한다.

특히, 이러한 사료 중 상당수는 일연이 직접 답사하며 검증을 거친 것이다. 이런 방대한 자료의 수집은 오랜 시간과 세심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더군다나 그 작업이 대몽항쟁과 화재와 같은 혼란이 이어지던 난세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한 끝에 만들어진 삼국유사는 반드시 새로운 시각과 이해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일연이 가진 독자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서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고려 의종 연간에 발생한 무인정변은 문벌 귀족 중심, 문치주의에 치우친 기존 귀족 정권을 무너뜨리며 고려 사회의 흐름을 크게 바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는 이른바 후기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무신의 집권은 단순한 권력 교체를 넘어, 새로운 역사적 추진 세력으로 신진 사대부들이 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동시에 이 시기 고려 불교도 큰 변화를 맞았는데, 대표적으로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교려 조계종을 창안하며 새로운 선종의 발전을 이끌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문신 귀족 정권은 왕도 중심, 중앙 귀족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 체제는 지방 호족적 사회 세력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며 독선적 태도를 보였고, 이에 따라 점점 기층 사회와의 괴리가 극심해졌다. 이러한 지배 체제를 뒷받침한 것은 유교적 전제 정치의 이념이었다. 유교 사상에 기반을 둔 중앙 귀족 정치의 전제화는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 사이에 더 큰 단절을 야기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단절은 필연적으로 지배 체제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전통적인 자주 의식까지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귀족 지배 체제는 이러한 취약성을 극복하고 내적 분열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오랜 야만으로 여겨왔던 여진 세력에 복종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묘청 등이 주도한 칭제건원 운동이라는 자주적 시도마저 억누르는 독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현실적 문제와 관계없이 기존의 체제가 주장했던 전통적 자주의식을 반하는 행동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전제 정치를 추구한 문신 귀족 정권의 독선적 승리를 상징하는 기록물로 평가될 수 있다. 한편, 문신 귀족 지배 체제와 공생하며 번영의 기반을 공유했던 세력 중 하나는 화엄종이나 천태종과 같은 귀족적 교종 불교 세력이었다. 후일 화엄종 승려 각훈이 집필한 *해동고승전* 역시 이러한 시대적 번영의 산물로 해석된다.

그러나 무인들의 정변과 집권은 이러한 문신 귀족 지배 체제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무인 정권 또한 폭압과 독재를 이어가며 사회와 역사의 올바른 질서 회복에는 실패했다. 새로운 무단 정치가 이어지면서 문화적 암흑기가 도래했을 뿐 아니라, 문신 귀족 시대부터 시작된 사적 대토지의 횡탈과 이에 따른 농장의 확대는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남북 각지에서는 농민과 노예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와 동시에 외세의 침략이라는 위기가 닥쳤다. 특히 몽고의 침략은 고종 18년(1231) 이후로 민족에게 참혹한 좌절과 분노를 안겼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점은, 문무를 막론한 독선적인 정권의 폭압과 몽고와의 30년 항쟁을 겪으면서 민중 내부에서 저항 의식과 분노가 축적되었다는 사실이다. 억압 속에서 터져 나온 민중의 분노는 역사 전통에 대한 민족적 자각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의식은 지방에서 성장하며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린 신진 사대부나 신흥 선승 계층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몽골 침략 이전, 고려 조계종 2세 종주인 혜심(1178-1234)은 *선문염송집*을 편찬하며 그 동기를 밝혔다. 그는 “더욱이 고려는 삼한 통합 이후 선법으로 국운을 떨치고 교학으로 외적을 물리쳐 왔다. 지금처럼 종지(宗旨)를 이해하고 도(道)를 논구하는 자료가 절실했던 적은 없었다. 종문(宗門)의 학자들이 물을 찾는 간절함으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제 학도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나라를 복되게 하고 불법에 이로움이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고려의 전통과 신앙을 새롭게 발견하고 회복하려는 국가적 요청에 응답한 행위로 주목된다.

혜심이 평생 산간에서 은둔하며 당시 최씨 무인 정권의 다양한 요청에는 불응했던 점을 감안할 때, 그조차도 이러한 역사적 전승의 발견과 회복이 국가적으로 절실한 상황임을 인식한 것이다. 

동시대의 신진 학자인 이규보(1168-1241)는 고구려 창업의 영웅 동명왕의 사적을 서술하며, "우리나라가 원래 성인의 도읍임을 천하에 알리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이는 자국의 역사와 전통을 긍정하고 강렬히 자부하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문신과 무인을 불문하고 당시 사회에 만연한 귀족 중심의 분파적이고 독단적인 체제와는 달리, 신흥 지식인 계층은 보다 넓은 국가적 관점에서 민족의식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체득한 것이었다.

삼국유사는 바로 이러한 의식적 전승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전통 계승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몽골과의 30여 년에 걸친 민족 항쟁 속에서 그 의식이 발전적으로 심화되었다. 마침내 외세 압제라는 현실적 제약 하에서 고려 조계종과 깊은 연관이 있던 선승 일연(1206-1289)이 민족사의 대서사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동시대 작품인 *제왕운기*가 신진 학자인 이승휴(1224-1300)의 손에서 완성된 사실도 상기할 만하다. 다만, 이승휴는 결국 벽지로 은둔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겪었다.

삼국유사의 구성은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의 9편으로 나뉜다. 왕력은 간략한 제왕 연대기를 다루고 있으며, 기이는 불교 신앙에 관한 내용을 다소 포함하면서도 주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중심으로 한다. 특히 기이는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다. 흥법부터 효선까지 이어지는 7편은 불교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신앙 자체보다는 그것이 국가와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초점을 맞춘 점이 주목된다.

결과적으로 삼국유사 전체는 국가사회와 불교 신앙이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졌으며, 두 요소가 하나로 융합된 일원적 시각에서 서술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편목은 중국의 삼고승전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이지만, 그것만으로 삼국유사를 단순히 불교 문화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삼국유사는 국가와 사회의 역사를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선행 저작인 해동고승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관점을 지닌 편찬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가 삼국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사서는 아니었다. 이는 산승(山僧)으로서 일연이 당시의 현실 의식에서 출발해 새롭게 깨달은 자국의 역사적 전통에 대한 선택적 기록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선택적 기록 방식은 찬자의 의식과 관점이 보다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점을 내포한다.

삼국유사 전편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 중 하나는 불국토 사상이다. 이를테면 기이편의 앞부분에 단군 신화가 등장하면서 국사의 서두를 열고 있는데, 이는 불국천인인 환인제석에서 유래되었다고 서술된다. 나아가 신라 왕통이 불타의 혈통이라는 주장, 신라 고도에 남아 있는 가섭불연좌석 관련 설화, 그리고 황룡사 장육상의 건립 배경에 깔려 있는 불국 유연설 등은 신라가 과거 불국토였음을 강조하는 기록들이다. 고구려와 관련해서도 진신사리의 감응에 의해 요동성에서 아육왕탑이 나타났다거나, 신인의 인도로 평양성 서쪽에서 영탑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고구려 역시 불교적 유연성이 깃든 땅임을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리적으로는 한민족의 삶터였던 남북 각지가, 역사적으로는 단군 이래의 모든 고대사가 불국토로 정의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불국토란 단순히 부처와만 연관된 신성한 세계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신도성모는 본래 도교적 수양을 쌓은 인물이었으나, 이는 단지 장생술을 연마하고 독선적 도에 휩싸인 존재가 아니라, 산신으로서 국가를 수호하고 민중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보살적 실천을 통해 널리 대중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또 아유타국의 공주 황옥이 황천상제의 명으로 도교적 상징인 반도를 지니고 와서 수로왕비가 되고 치세를 이룬다는 이야기는 불교와 선(도교)의 융합이라는 불국토 사상을 잘 보여준다.

삼국유사는 전편에 걸쳐 인간, 자연, 신령 등의 모든 존재를 대립적 관계로 보기보다는 선량한 이웃으로서 불국토 질서 실현에 함께 참여하는 대상으로 그린다. 일연이 정의한 자국 고대사는 이처럼 다양한 존재 간 융합과 조화의 총합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은 고려 중기에 심화된 유교적 귀족주의나 배타적 사고방식에 대한 강한 부정적 관점을 포괄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특징과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요약과 설명이다. 삼국유사는 서술 순서에서 국가와 왕권의 비중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강렬한 서민적 삶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지방 세력인 무진주의 상수리 안길이 중앙 권력자인 차득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기사는 중앙정치에 대한 지방세력의 진출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분황사의 천수관음이 한 이름 없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 그 눈을 뜨게 했다는 이야기나, 민장사의 관음보살이 가난한 여자의 아들을 먼 곳에서 데려왔다는 설화는 서민적 삶과 염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외에도 황룡사의 승려 정수가 추운 겨울밤 자신의 체온과 옷으로 아이와 어머니를 살리고 국사로 성장했다는 이야기가 그러하다. 이량공의 하인 지통이나 귀족 집안의 하녀였던 욱면이 주인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고 성불했다는 이야기에서는 사회적 계급을 뛰어넘는 인간 존엄의 가치가 드러난다. 대성이 효심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다 재상으로 환생한다는 이야기를 포함한 효선 전편은 서민들의 삶의 고단함과 신분을 초월한 대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한편, 삼국유사 안에는 사회적 계급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서민설화의 반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승려 경흥이 거지 행색의 노인을 꾸짖자, 노인이 이를 신랄하게 반박하며 인간 자체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장면은 반계급적 정서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서민들의 삶 속에서 인간 자체의 존엄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정신은 삼국유사의 중요한 정조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삼국유사는 당시 사회에서 전승되던 고려 후기의 서민설화까지 적극적으로 수집했다. 본성이 순수했던 중생사의 점숭이 간계로부터 절을 지키는 이야기나, 몽골군 침략 당시 낙산사의 보주를 목숨 걸고 지킨 인물이 주지승이 아닌 사노인 걸승이었다는 이야기가 이러한 예다.

삼국유사는 왕족과 귀족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서민적 정조와 연결되어 전개됨을 보여준다.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개인적 영화를 거부하고 호국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자세나, 강릉태수 순정공 부인을 해룡으로부터 구한 것이 개인 영웅이나 귀족 권력이 아닌 서민들의 공동체적 의지와 노래였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삼국유사에서 향가를 채록한 이유 또한 서민들의 감정과 이야기가 향가를 통해 전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국유사는 단순히 국가와 정치권력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민중 생활과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며 두 요소 간 조화를 강조한다. 이는 고려 중기 이후 문무 귀족정권의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지배에 대한 반발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전반적으로 민족사의 자주성과 문화적 우월성 강조라는 의식을 바탕에 두고 구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군을 국사의 시작점으로 삼아 고조선을 건국했음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단군이 중국 역사에서도 초기 단계인 요와 동등한 시대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더 나아가, 단군 신화는 하늘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민족사의 신성성과 독자성을 부여한다.

단군 설화는 삼국유사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 시기 권력층의 인식에서는 공인된 바가 아니었다. 대신 이들은 유교적 전통 속에서 기자를 중요한 인물로 여겼으며, 이를 통해 국사의 기원을 은연중 중국에 연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이러한 흐름과는 매우 대조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기자에 대한 기록을 별도로 두기보다는 단군 고조선의 일부로 흡수시켰으며, 이후의 동족 국가 계보를 고조선-위만조선-부여-마한으로 이어지는 체계로 정리했다. 이는 자국 역사가 하늘에 기원을 둔 독창적이고 신성한 전승임을 강하게 주장하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자각은 일연과 함께 활동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더욱 구체화된다. 제왕운기는 단군을 요와 동등한 국조로 인식했으며, 동방의 여러 민족 국가들—나, 여,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맥 등—을 단군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계통 속에 포함시킨다. 심지어 발해까지도 국사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며 민족 역사의 연속성과 독립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서술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 대항하며 당시의 압제적 현실 속에서 저항 의식과 민족 자존심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삼국유사는 다양한 일화를 통해 이러한 저항 의식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장춘랑과 파랑의 혼이 당나라 소정방의 횡포로 인해 억압받던 상황에서 이를 국왕에게 호소하는 이야기는 당나라와 신라 간의 갈등을 반영하며, 당군의 횡포에 맞선 신라의 항전 의지를 나타낸다. 이 과정에서 명랑법사의 비법까지 동원하여 당군을 격퇴했다는 점은 신라가 국가적 힘을 동원해 독립성을 지키려고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사례로 김유신의 위훈은 하늘과 연결된 신성한 존재로 강조되며, 태종무열왕의 묘호에 대한 간섭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통해 신라의 자주성을 드러낸다. 문무왕과 김유신이 각각 왕자로서 통일을 이루고 죽어서도 용과 천신이 되어 나라를 수호했다는 전승은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를 기원하는 민족적 염원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이와 더불어, 금관성의 파사석탑이나 황룡사의 장육상과 9층탑은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지켜온 문화적 상징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무형의 문화재가 몽고 침략으로 파괴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이는 외세에 의해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삼국유사는 단순히 역사적 서사를 넘어 당시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민족적 자긍심과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기록으로, 자주성과 평화를 갈망했던 민족적 염원을 강렬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 전체에 담긴 내용은 신이(神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일연은 「기이편」 서두에서 중국 유교적 합리주의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척한다는 입장에 반대하며, 제왕들이 부명(符命)과 도록(圖錄)을 받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기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중국 고대 제왕들의 신비로운 사례를 소개한 뒤, 한국 삼국의 시조들이 신이한 방식으로 탄생한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삼국의 독자적인 역사전통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는 역사 속의 신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인식은 일연과 동시대 신흥 지식층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를 주목하게 만드는 사례로,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동명왕의 기이한 사적을 처음에는 귀신이나 환영 같은 초자연적 현상으로 여겼지만, 이를 깊이 탐구하며 그 본질에 접근하면서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성스러운 실재임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는 자국의 역사가 성인의 도읍임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밝힌다. 뿐만 아니라 이승휴도 역사 속의 신비로운 사건들 가운데 부풀려진 이야기를 제거하고 정리된 원리를 통해 이를 파악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규보나 이승휴 모두 유학의 이른바 합리적 사고방식을 익힌 학자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조차 역사 속의 신이를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 융합된 실체로 이해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태도는 「삼국유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삼국유사」는 건국 시조를 비롯해 나라를 지킨 왕들, 평범한 서민들까지 그들의 이야기 전반을 신이를 바탕으로 기술하며 전개하고 있다. 당시 고려 후기의 신흥 지식 계층은 승려든 속인이든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자국 역사 속에서 신이를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국의 역사에 담긴 신비로운 사건들이야말로 민족의 위대한 동력이었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인식은 고려 중기 이후 합리성을 표방하면서도 폭압과 폐단으로 점철된 귀족 정권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더 나아가 외세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 의식에서 그 바탕을 찾을 수 있다. 강대하고 폭력적인 외세에 맞서려는 열망은 물리적 한계를 초월한 신이의 힘을 새롭게 조명하게 했고, 이는 민족 정체성 회복의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는 현실 세계, 불교적 신앙, 국가정치, 서민 생활 그리고 자연까지 혼연일체를 이루며 자국 역사가 전개되어 왔음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역사 전통의 오래된 가치와 신성함을 새롭게 인식하며 당대의 혼란을 극복할 힘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삼국유사」는 권력층 독선과 침략적인 외세의 횡포에 맞서 전통적인 자주성과 인간성을 회복할 필요성을 설파하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소박하고 원형 그대로의 표현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삼국유사가 정통 사서로서의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정사가 다루지 않았던 단군기, 여러 동족 국가들, 가락국기, 향가 등 다양한 사실들을 포괄적으로 기록한 점에서도 눈에 띈다. 또한,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밀한 검증의 시도는 전통의 원형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각고의 노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유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전통적인 자주성과 인간 회복의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는 복고적인 태도와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복고적 태도가 단순히 오래된 전통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자주성과 인간 회복에 대한 열망은 고려 중기 이후 지배 체제가 지속해온 사대주의, 모방, 독선에 저항하고, 외세의 압제에도 맞서기 위한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서 자기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규보나 이승휴와 같은 유학자들이 기존의 유교적 합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국 역사 속 신비로운 요소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서술했던 점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역사 인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가 주장한 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이후에 그대로 계승되지는 못했다. 이는 여러 요인 때문인데, 국내적으로는 사회 지배 이념이었던 불교의 시대가 점차 퇴조하고 유교의 시대가 도래한 점을 들 수 있다. 외적으로는 100년에 걸친 원제국의 압제가 고려 사회의 전통적 독자성을 의식 면에서도 위축시킨 결과였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는 고려 후기 신흥 계층의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 계층이 점차적으로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사대부 계층의 성장이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받아야 한다.

사대부 계층의 성장은 결국 원제국의 압제를 극복하는 주체적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수용된 성리학은 전통 유교보다 더 이성적이고 민족적인 경향으로 한동안 활용되었다. 비록 일연과 같은 선승과 성리학적 사대부 계층은 사회적인 특성에서 큰 차이를 지녔지만, 동시에 같은 시대적 요구 속에서 자기 역사에 대한 인식 면에서는 많은 공통점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단군으로부터 이어져 온 자기 역사의 유구성과 독자성을 긍정하는 민족 의식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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