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개요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이 고조선부터 후삼국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모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총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권과는 별개로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 9개의 항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는 저자가 관심을 가졌던 자료들을 선별해 수집하고 분류한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의 체계이다.
기존의 유교적 역사관이나 서술 방식과는 달리, 신비로운 역사 이야기를 담으며 그와 관련된 출처를 명확히 하고 고대 문헌의 원형을 전달하여 사료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또한, 한국의 고대어 연구와 불교미술 연구를 위한 중요한 문헌으로,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근본적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판본 및 서지사항
5권으로 구성된 목판본의 역사서다.
일연(1206~1289)은 『삼국유사』 저술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사료를 수집하였고, 본격적인 집필은 주로 만년에 이루었다. 원고 작성은 70대 후반부터 84세 사망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일연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의 제자인 무극(無極)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무극기(無極記)’라 불리는 두 곳의 기록을 첨가했다. 하지만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가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당시 제작된 고판본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석남본과 송은본이라 불리는 이 인본(印本)들로 인해 그런 추정을 할 수 있다. 특히 송은본은 1965년 보물로 지정된 뒤 2003년 국보로 승격되었으며, 현재 곽영대가 소장하고 있다. 송은본은 3·4·5권 일부만 남아 있고, 권3의 일부와 권5의 마지막 몇 장이 없는 상태다.
석남본은 송석하가 1940년부터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왕력(王歷)과 권1만 남은 잔본이다. 현재 소장처는 불분명한 상태다. 이 석남본과 송은본을 바탕으로 모사된 필사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는 1940년 이후 수년 내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은 『삼국유사』를 중간하여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 불리게 되었다. 중종임신본 권말에는 이계복이 작업 경위를 밝힌 발문이 첨부되어 있다. 발문에 따르면 당시 경주부에 남아 있던 옛 책판은 심하게 마모된 상태로, 한 행에 4~5자만 판독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에 이계복은 완전한 판본을 구해 책판을 새로 제작하였다.
발문에는 모든 책판이 개각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전체 290매 중 약 40매가 기존의 판목을 활용했고 나머지만 새로 조각되었다. 새로운 판에는 각자가 고을별로 분담 제작되면서 조각 양식에 차이가 생겼다. 또한 번각(飜刻)과 필서보각(筆書補刻)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사용되었다. 교정을 맡았던 최기동(崔起潼)과 이산보(李山甫)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계복의 중간본 책판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주부에 보존되었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 책판으로 간행된 몇 종의 인행본이 국내외에 전한다. 그중 5권이 온전히 갖추어진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은 중종임신본 판각 이후 32년 이내에 인출된 판본이다. 이후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소장하며 가필했기에 수택본으로 불린다. 이 본은 일본에서 이마니시 료가 1916년부터 소장했고, 현재는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의 귀중본으로 보관 중이다.
서울대학교 소장본도 완본으로 평가되지만 약간의 가필(加筆)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본은 초기 임신고인본으로, 가필과 변형이 없어 원형에 가까운 귀중본으로 여겨진다. 이 외에도 중종임신본에 해당하는 여러 판본이 여러 경로에서 전해지고 있다.
내용
삼국유사는 총 5권 2책으로 구성되며, 권과는 별도로 9개의 항목인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력은 삼국,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로 구성되어 있고, 기이 편은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 역사를 총 57항목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기이 편은 권 1과 권 2에 걸쳐 서술되며 서두에는 편집 의도를 밝힌 서문이 첨부되어 있다.
흥법 편은 삼국의 불교 수용과 융성에 관한 6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상 편은 탑과 불상에 대한 역사적 사실 31항목을 다룬다. 의해 편에서는 신라의 고승 전기에 초점을 맞춘 14개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주 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성격을 지닌 신이승에 관한 3개의 항목을 담고 있다. 감통 편은 불교 신앙에서의 영험과 감응 관련 이야기 10항목을 다루고, 피은 편에서는 초월적이고 은둔적인 인물들의 행적을 다룬 10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효선 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 선행을 담은 미담 5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총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 독특한 체재를 보여준다. 이 책은 중국의 고승전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와도 다른 형식을 채택한 점이 눈에 띈다. 고려 후기에는 이 책이 인용된 사례가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 초기 이후 여러 문헌에서 인용되었으며, 당시 다양한 자료로 활용되었음이 드러난다.
다만 삼국유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이 책을 허황되고 믿기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는 조선 초기 이후 많은 역사서에 인용되며 영향을 끼쳤고, 최근에는 새로운 가치평가와 함께 간행 및 유통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재 유통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다양한 형태로 발간되고 있으며, 영인본, 활판본, 번역본 등이 존재한다. 1926년에는 순암수택본을 축소하여 영인본으로 제작한 뒤,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총서 제6권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고전간행회는 1932년에 순암수택본을 원형 크기로 복원해 영인본으로 만들고, 이를 한 장본 2책 형태로 출간하였다. 1964년에는 일본 가쿠슈원동양문화연구소에서 고전간행회 영인본을 다시 축소하여 재영인본으로 재출간한 사례도 있다.
민족문화추진회는 1973년 서울대학교 소장본을 절반 크기로 축소하여 양장본 형태로 영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동환의 교감을 두주 형식으로 첨부하고, 『균여전』과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를 부록으로 추가하였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983년에 만송문고본을 축소하여 영인했으며, 추가적으로 석남본과 송은본이라는 필사본의 모사본을 함께 수록하였다.
활자본의 경우, 동대본(東京帝國大學 문학부, 1904), 속장경본(續藏經本, 동대본 수정 후 속장경 지나찬술부에 수록), 계명본(啓明本, 최남선 교정, 『계명』 제18호, 1927), 신증본(최남선, 三中堂, 1943·1946), 증보본(民衆書館, 1954), 대정신수대장경본(大正新修大藏經本, 1927), 조선사학회본(1928), 한국불교전서본(東國大學校 출판부, 한국불교전서 제6책 수록, 1984) 등이 대표적이다.
번역본 역시 국역본, 일역본, 영역본 등으로 다양하다. 국역본 중에서는 사서연역회 번역본(고려문화사, 1946), 『완역삼국유사』(고전연역회 이종렬 책임 번역, 학우사, 1954), 『원문병역주삼국유사』(이병도 역, 동국문화사, 1956), 수정판 『역주병원문삼국유사』(이병도 역주, 광조출판사, 1977), 한국명저대전집본(이병도 역, 大洋書籍, 1972), 조선과학원 번역본(1960년 북한 번역), 세계고전전집본(이재호 역주, 광문출판사, 1967), 세계사상교양전집본(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75), 권상로 역해본(동서문화사, 1978), 성은구 역주본(전남대학교 출판부, 1981), 『역해삼국유사』(박성봉·고경식 역, 서문문화사, 1985) 등이 있다.
일어 번역본으로는 『원문화역대조삼국유사』, 『초역삼국유사』, 국역일체경본, 임영수 번역본 및 김사엽의 『완역삼국유사』(朝日新聞社, 1979) 등이 있으며, 영역본은 연세대학교에서 1972년에 발간한 것이 대표적이다.
『삼국유사』에 대한 주석서로는 미지나 삼핀 쇼에이의 『삼국유사고증』 상·중권 두 책이 있으며, 색인으로는 이홍직이 『역사학보』 제5집에 발표한 것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제작한 『삼국유사색인』이 있다. 이홍직이 작성한 색인은 최남선의 『증보삼국유사』 부록으로 포함되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색인은 주제별 및 가나다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체제는 정사인 삼국사기와 다를 뿐만 아니라, 불교사서인 해동고승전과도 구별된다. 이 책의 체제를 열 가지 항목으로 나누었다는 점이 중국의 고승전 세 가지 사례와 비슷해 보이지만, 왕력, 기이, 효선 등 여러 면에서 중국 고승전의 전통과는 차이를 보인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을 다루기 위해 편찬된 사서라기보다는, 특정 주제와 자료를 선별적으로 모으고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에 가까운 특징을 지닌다. 또한 삼국의 불교사를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역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의 성격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불교사서로 보기도 하고, 설화를 모은 집성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한편, 불교 신앙을 포함한 역사적 문헌이라는 해석도 있다. 잡록적인 사서나 야사의 성격을 지닌다는 시각도 있다. 내용적으로 불교사적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에도 완전히 불교사서라고 하기 어렵고, 많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으나 단순히 설화집으로 규정하기에도 부적합하다. 서명을 통해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삼국유사는 기존의 사가 기록에서 누락되거나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부분을 발굴하고 드러낸 저술이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이 단순히 만록(漫錄)으로 간단히 분류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담긴 저자의 치열한 노력과 깊은 역사의식 때문이라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신이(神異)한 역사 이야기가 많다는 점에서 특징적으로 언급되곤 한다. 이는 역사에 신비적 요소가 담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일연의 역사관과, 풍부한 사료를 수집하여 근거를 명확히 밝히고 고대 자료의 원형을 전달하려는 그의 역사 서술 방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일연의 역사관과 서술 태도는 대체로 유교적 역사관과 차별화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비교하여 복고적이라는 견해와 진보적이라는 상반된 견해가 교차한다. 그러나 두 역사서의 찬술 동기와 서술 체재가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의 서술 방법론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현대에 와서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 문화유산에 관한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 사상, 미술,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기초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는 불교와 설화는 물론, 고기(古記), 사지(寺誌), 비갈(碑喝), 안첩(按牒) 등 고문서류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이 인용되었다. 특히 현재 전하지 않는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더불어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寶庫)로 꼽힌다. 또한 차자 표기의 향가, 서기체 기록, 이두 표기의 비문 자료 등은 한국 고대어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이 책에서 전하는 향가는 우리 민족의 고대 문학 연구에서 가장 값진 유산 중 하나로, 총 14수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이 책은 한국 고대 미술, 특히 불교 미술 연구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자료다. 탑상편의 기록은 탑, 불상, 사원 건축 등 다양한 면에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며, 역사 고고학 연구에서도 기본적인 문헌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불교 관련 유물과 유적 조사에서 필수적인 자료로 활용된다.
또한 『삼국유사』는 화랑과 낭도(郎徒)들의 활동과 풍류도(風流道)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종교적·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는 『삼국사기』와 비교했을 때 화랑 관련 기술에서 뚜렷이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자 일연의 찬(讚)이 포함되어 있어 그의 시문학과 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물론 『삼국유사』가 가진 문제점도 존재한다. 체제상 권차나 편목, 항목 구성에서 약간의 혼란이 있으며, 본문에서는 오자, 탈자, 중문, 혼효 등 일부 오류가 발견되곤 한다. 따라서 정밀한 교정 작업이 요구된다. 또한 고대 사료가 본래 가지고 있는 애매성이나 신이한 설화의 문제 역시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주석 작업과 더불어 역사, 문학, 종교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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