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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대왕

제56대 김부대왕, 사후 시호는 경순왕이다. 

  천성 2년(927년) 9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략하여 고울부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구원하라 명했지만,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같은 해 겨울 11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침공하였다. 

이때 경애왕은 왕비와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있었다. 적의 침공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왕과 비빈들은 서둘러 후궁으로 피신했지만, 대부분의 왕족과 고위 관리들은 적군에게 붙잡히거나 혼란 속에 흩어졌다. 붙잡힌 사람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항복하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견훤은 왕실의 재산을 약탈하고 궁궐에 거처하며 왕을 찾아냈다. 결국, 그는 경애왕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왕비와 후궁들을 모욕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이후 경애왕의 친족 중 한 명인 김부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즉위하자마자 전임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서당에 안치한 뒤, 신하들과 함께 애통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듬해 3월 태조는 50여 기병을 이끌고 경주를 방문했고, 경순왕과 신하들이 교외로 나와 태조를 맞이하였다. 대궐에서 열린 환영 연회에서 술이 거하게 오른 경순왕은 자신이 나라를 잘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고, 좌중도 모두 슬픔에 잠겼다. 태조 역시 이에 감동하여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고려 태조는 경주에서 수십 일을 머물며 질서를 회복시켰고, 고려군은 현지 백성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이에 경주의 백성들은 견훤의 방문 때와는 달리 마치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태조와 고려군의 행실을 칭송하였다.

935년, 신라의 국운이 다해 나라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순왕과 신하들 사이에는 고려에 항복할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황태자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경순왕은 전쟁으로 백성들이 더 큰 고통을 겪게 할 수 없다며 항복을 결심했다. 이에 김봉휴를 사신으로 보내 고려 태조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하였다. 슬픔 가득한 황태자는 가족과 작별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으며, 그의 막내아들은 승려가 되어 화엄종에 든 뒤 해인사에 머물렀다.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고 태상 왕철을 보내 영접하게 했다. 신라 왕은 여러 신하를 이끌고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으며, 이때 수레와 말의 행렬이 30여 리에 걸쳐 이어졌고, 길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구경하는 이들 또한 무리를 지어 담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신라 왕과 백성들을 맞이하며 위로하였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을 신라 왕에게 내주었다. 또한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신라 왕의 아내로 맞게 하였다. 신라 왕이 나라를 버리고 고려 땅에 동화되었다는 의미에서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로 바꾸었고, 그의 시호를 '효목'이라 하였다. 그리고 신라 왕을 정승으로 삼아 태자보다 더 높은 직위를 주었으며, 녹봉은 1천 석으로 정하였다. 이외에도 신라의 관원들과 장수들도 각기 적합한 자리를 부여받았다. 신라는 '경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곳은 경순왕의 식읍으로 지정되었다.

처음 신라 왕이 자신의 영토를 바치며 항복하자 태조는 이를 크게 기뻐하며 후대하였다. 그는 사람을 시켜 직접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왕께서 나라를 나에게 주시니 그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과 혼인하여 두 나라가 좋은 의리를 계속 이어나가길 바랍니다." 이에 신라 왕은 대답했다. "백부 억렴의 딸이 덕행과 외모 모두 훌륭한데, 그녀만이 내정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는 그녀와 결혼하며 그녀를 신성왕후 김씨로 삼았다.

태조의 손자인 경종은 정승공 김부의 딸을 맞아 그녀를 헌승황후로 삼았다. 이에 따라 정승공은 상부에 봉해졌고, 그는 태평 흥국 3년(97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시호를 '경순'이라 하였다. 상부로 봉하는 교령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주나라가 창립 초기에 여망을 봉했고, 한나라는 소하를 봉했듯, 이는 천하의 안정과 국가의 번영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김부는 계림 출신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받았으며, 세속을 벗어난 진취적인 인물로 문장 또한 탁월했습니다."

태조는 인근 국가들과 우의를 더욱 다졌다. 선대의 외교와 예의를 잘 이해하고 이를 이어나가 큰 의리를 세우면서 내부적으로도 이를 보답했다. 고려는 삼한을 통일하며 군신 관계와 나라의 명예는 더욱 견고해졌고 규범은 더 빛났다. 김부에게는 산호와 같은 호칭이 더해졌으며, 그의 식읍은 총 1만 호로 정해졌다. 그는 인의(人義)와 안정을 모두 지닌 신하로 기록되었다.
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황금 상자 속에 들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떤 설화에서는 황금 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도 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허황되어 믿기 어렵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사실로 여겨지고 서로 전해졌다. 신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창기에 지배층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검소함을 실천하며 백성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였다. 관직 체계도 간결하게 유지했고, 각종 행사도 소박하게 치렀다. 특히 중국과의 외교를 성실히 행하여 사신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자제들을 중국으로 보내 숙위(경호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국학에 입학시켜 유학을 배우게 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하고 신라를 예의와 문화가 발달한 나라로 만들었다.

신라는 또한 당나라 군사력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그 영토를 군현으로 삼아 번영의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면서 폐단을 인지하지 못했고, 마을마다 절과 탑이 가득 세워지면서 백성들 중 승려가 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점차 군사력과 농민층이 줄어들게 되었고, 나라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특히 경애왕 시절에는 사치스럽고 음란한 행위를 즐기며 국정을 소홀히 했다. 궁녀와 신하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고 환락에 빠져 있는 동안, 견훤의 침입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문(門) 밖에서 노는 한금호(한가로운 공작)나 누각 위의 참새들처럼 위태로웠다.

결국 신라는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경순왕은 태조 왕건에게 귀순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비록 끝까지 저항하여 싸우는 것이 가능했더라도, 그러면 힘이 약화되고 기세마저 꺾여 결국 왕가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까지 재앙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경순왕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항복하여 신라 영토를 봉헌하고, 군현의 이름을 새로 정하여 고려에 귀순하며 나라와 백성을 보전했다. 이는 조정에 크게 이바지하는 공로였으며 백성들에게도 엄청난 덕을 끼친 일이었다. 과거 전씨가 오월의 땅을 송나라에 바쳤을 때 소자첨은 그를 충신이라 평가했지만, 신라의 공로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하겠다.

고려 태조는 후비가 많아 자손 역시 번성했으며,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로도 왕통을 이은 이들 대부분이 그 후손들이었으니, 이는 신라가 남긴 음덕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국토를 고려에 넘기면서 국가로서의 존재는 사라졌지만, 대신 높은 공덕을 남겼다. 그 후 아간 신회는 외직을 그만두고 도성으로 돌아왔다가 황폐해진 수도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서리리라는 노래를 지었다고 전해지나, 이제 그 노래는 사라져 알 수 없게 되었다.

 

■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부여군은 과거 백제의 수도로, 소부리군이라고도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성왕 26년 (혹은 16년으로 해석하기도 함) 봄, 백제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꿨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기(주석)에는 당시의 지명이 소부리이며, 현재의 고성진(古城津)이 사비였다고 추가 설명하며, 소부리를 부여의 또 다른 이름이라 칭했다.

양전장적(토지대장)에서는 소부리군을 "농부의 기둥"이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볼 때 오늘날의 부여군은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 왕의 성씨가 부여씨(扶餘氏)였기에 이와 같은 명칭이 사용되었다.

또한 부여군을 여주(驪州)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자복사 고좌에 수놓아진 장막에 "통화 15년 정유년(997년) 5월, 여주 공덕대사의 수장"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하남 지역에 임주자사를 두었을 때 도적(문서) 내에 여주라는 글자가 표기된 바 있다. 이는 그 당시 임주(臨洲)가 지금의 가림군, 여주는 오늘날의 부여군임을 시사한다.

백제 지리지에 따르면, 후한서에서 "삼한에는 약 78개국이 있었는데, 백제는 그중 한 나라"라고 기술한다. 북사(北史)에서는 백제가 동쪽으로 신라, 서남쪽으로는 바다와 맞닿고 북쪽으로 한강과 경계를 이룬다고 기록하였다. 도읍을 거부성 혹은 고마성이라 부르며, 오방성이라는 여러 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통전에서는 백제가 남쪽으로 신라,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바다와 닿았다고 하였다. 구당서에는 백제를 "부여의 별종"으로 표현하며, 동북쪽 신라, 서쪽으로는 바다 건너 월주(중국 강소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왜국,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른다고 기록하였다. 신당서 또한 서쪽으로 월주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에는 왜국이 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기술하였다.

삼국사기 본기에서 백제의 시조로 언급된 온조는 추모왕(주몽)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주몽은 난리를 피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이주하였으며, 그곳 왕의 둘째 딸과 혼인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는데, 훗날 유리 태자가 태자로 책봉될 것을 예상한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 등 신하들과 함께 남하하였다.

이들은 한산에 정착하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며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반면 비류는 미추홀로 갔으나, 살기 힘든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비류는 고통 속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위례성으로 합류해 나라 이름을 백제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백제의 왕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기원했기에 성씨를 해씨(解氏)로 정했다. 이후 성왕 때 도읍은 다시 사비(현재의 부여군)로 옮겨졌다. 미추홀은 현재의 인주, 위례성은 직산이라고도 하나 이 설에는 근거가 부족해 논란이 있다.

고전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B.C.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14년 병진(B.C. 5)에는 도읍을 한산, 즉 현재의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389년 동안 그곳에 자리했다. 그러나 13대 근초고왕 함안 원년(371)에는 고구려의 남평양(지금의 서울)을 점령하여 수도를 북한성(현재의 양주)으로 이전하고 그곳에서 105년을 보냈다. 이후 22대 문주왕이 즉위하던 원휘 3년 을묘(475)에 다시 공주로 도읍을 옮겼고, 63년 뒤 26대 성왕 때 소부리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라 개칭하였다. 마지막으로, 31대 의자왕 시대까지 120년간 소부리가 백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 현경 5년(660)은 의자왕 통치 20년째 되는 해로, 이때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해 평정하였다. 당시 백제는 다섯 개의 부(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37군, 200성, 그리고 약 76만 가구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다섯 도독부를 설치하고 각 지역의 추장들을 도독부 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후 신라가 이 땅을 모두 통합하여 웅주, 전주, 무주 등의 주(州)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였다.

호암사에는 정사암(政事巖)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재상의 후보를 선정할 때 몇 명의 이름을 상자에 넣고 봉인하여 이 바위 위에 올려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 상자를 열어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이 바위는 정사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비강가에는 한 개의 바위가 있는데, 과거 소정방이 그 위에 앉아 물속에서 물고기와 용을 낚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설에는 용이 바위 위에 꿇어앉았던 자리까지 남아 있다고 하여 이 바위를 용암이라 부른다.

이 외에도 고을 안에는 일산, 오산, 부산이라는 세 개의 산이 있다. 백제가 번성했던 시절에는 신들이 이 산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며 교류하였다고 한다.

사비수 언덕에는 10여 명이 앉을 만한 크기의 돌이 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가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기 전에 이 돌 위에서 절을 하며 기원을 올리곤 했는데, 놀랍게도 돌이 스스로 따뜻해졌다고 하여 이를 돌석(지금의 자온대)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비강의 양쪽 언덕은 그림 병풍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백제왕은 이곳에서 잔치를 열어 노래와 춤으로 기쁨을 나누곤 했기에 지금도 이를 대왕포라 부르고 있다.

백제의 창시자인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며, 신체가 건강하고 효와 우애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다루왕은 너그럽고 후덕하며 위엄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사비왕 또는 사이왕으로 불리는 인물은 구수왕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으나 정치적 능력 부족으로 즉각 폐위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기록에서는 낙초 2년 기미에 사비왕이 사망하자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도 설명된다.


■ 무왕 

제30대 백제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사비) 남쪽의 연못가에 살았는데, 연못 속 용과의 인연으로 장을 임신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의 이름은 서동이라 불렸으며, 뛰어난 재주와 넓은 도량으로 사람들의 이해를 초월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늘 마를 캐어 생계를 이어갔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서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향한 서동은 마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친분을 쌓았다. 아이들이 그의 곁에 모이기 시작하자, 그는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그 동요는 다음과 같았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사랑하여
서동 방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이 동요가 점차 퍼져 결국 대궐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를 듣고 경악한 신하들이 왕에게 건의해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도록 했다. 공주는 귀양길에 오르며 왕후에게서 순금 한 말을 노자로 받았다. 귀양지를 향하던 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나 절을 올리고 함께하길 청했다. 공주는 처음엔 그가 누구인지 몰랐으나 믿음직한 모습에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서동과 함께 백제로 온 공주는 자신의 금을 꺼내 놓고 미래의 삶을 계획하려 하였다.

그때 서동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대답했다.
“이것은 황금입니다. 평생을 넉넉히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서동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서 황금을 흙처럼 쌓아두었소.”
이에 공주는 놀라며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보배입니다. 그럼 그것을 제 부모님이 계신 신라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

서동과 공주는 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이를 신라로 보낼 방법을 물었다. 법사는 자신의 신통한 도력으로 금을 보내겠다고 하였고, 금과 함께 쓰인 공주의 편지는 하룻밤 사이 신라 궁중으로 전달되었다. 이를 본 진평왕은 놀라워하며 서동과 선화를 더욱 존경했고, 안부를 묻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이로써 서동은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 무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무왕이 어느 날 부인인 선화를 데리고 용화산 밑 큰 연못가를 찾았다. 그곳에서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 나타나자, 무왕은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이 광경을 본 선화는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시지요. 이것이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무왕은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와 못을 메울 방법을 의논했다. 법사는 다시 신통한 도력으로 산을 헐어 하룻밤 사이 연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그곳에 미륵삼존상을 세우고 불전, 탑, 낭무를 세 군데에 건립하며 절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국사에는 왕흥사라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은 여러 기술자들을 보내 이 공사를 돕도록 했고, 이 절은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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