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백제와 견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함통 8년(867년)에 태어났다.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이후 견씨로 개명했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왔으나, 광계 연간에 사불성(현재의 상주)에서 세력을 형성하며 스스로 "장군"이라 자칭했다. 아자개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고 모두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나, 그중에서도 견훤이 가장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이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흥대왕의 비 사도는 백융부인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손자인 각간 작진은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을 낳았다. 이 원선이 바로 아자개였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이며,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으로 다섯 아들과 한 딸을 낳았다. 맏아들은 상부 훤, 둘째 아들은 능애 장군,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 넷째 아들은 보개,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이며, 딸은 대주도금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딸 하나와 함께 살았는데, 그 딸은 용모가 단정했다. 어느 날 딸은 아버지에게 고백하길,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관계를 맺는다고 했다. 이에 아버지는 바늘에 긴 실을 꿰어 남자의 옷에 묶어두라고 지시했다. 딸이 그대로 실행한 후 날이 밝자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 큰 지렁이 허리에 실이 묶여 있었다. 이후 딸은 아이를 잉태했고 곧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15살이 되어 스스로를 견훤이라 불렀다고 한다. 862년, 그는 왕이라 자칭하고 완산군에 도읍을 정했으며, 43년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세 아들인 신검, 용검, 양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934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이후 천복 원년인 936년에는 견훤의 왕국 후백제가 고려에 의해 멸망했다.
견훤이 어릴 적 젖을 먹을 무렵,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고 있을 때 어머니는 음식을 가져다주느라 견훤을 숲 아래 두었다. 그동안 범이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자라면서 견훤은 건장한 모습과 비범한 기질을 드러냈다.
청년 시절 그는 군인이 되어 수도를 떠나 서남 해안에서 활동하며 적진에서 창을 베개 삼아 잠들 정도로 용맹했다. 항상 전투의 선봉에 서며 많은 공로를 세워 결국 비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신라 진성여왕 재위 6년), 왕의 총애를 받던 신료들이 국정을 어지럽히며 민생은 피폐해졌다.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은 유랑하고 도적들이 날뛰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견훤은 반란의 뜻을 품고 세력을 모았다. 그는 신라 서남부 곳곳을 공격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한 달 만에 5천 명의 무리를 모았다. 마침내 무진주를 점령하고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공개적으로 칭왕하지 않고 "신라 서남도통행 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이라고 자칭했다. 이는 889년 혹은 892년에 일어난 일로 전한다.
이 시기 북원의 도적 양길의 세력이 막강해지자 궁예는 스스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견훤은 멀리서 양길에게 관직을 제안하며 그를 비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견훤이 서쪽 지방을 순회하며 완산주에 이르렀을 때, 고을 주민들이 나와 영접하며 위로했다. 이에 만족한 견훤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기쁨에 좌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제가 개국한 지 600여 년 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을 받아 소정방을 보내면서 수군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왔다. 신라의 김유신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황산을 지나 당나라 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내가 어찌 새로운 나라를 세워 옛날의 원통함을 씻지 않겠는가."
그는 마침내 스스로를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관직과 직책을 마련해 체제를 정비했다. 이때는 광화 3년이자 신라 효공왕 4년으로, 서기 900년이었다.
918년(정명 4년) 무인년에 철원경에서 민심이 급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해 왕위에 오르게 했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축하의 뜻을 전하였으며, 공작선과 지리산의 죽전 등을 바쳤다. 그러나 겉으로는 화친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태조를 시기했다. 그는 태조에게 말 한 필을 선물한 후, 3년 뒤 겨울 10월에는 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조물성까지 진격했다. 태조도 정예 병력을 이끌고 맞섰으나 견훤의 군사가 워낙 날렵하여 쉽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이에 태조는 잠정적으로 화친을 모색하며 견훤 군을 지치게 만들 계획으로 서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동생 완신을 인질로 보냈으며, 이에 견훤도 자신의 사위 진호를 교환 인질로 보냈다.
그해 12월, 견훤은 거서등 지역의 20여 성을 공격해 빼앗고 후당에 사자를 보내 속국임을 자처했다. 이에 후당은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 백제군사의 직위를 비롯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으로 봉하면서 식읍 2500호를 하사했다.
4년이 지나 고려에 인질로 보냈던 진호가 갑작스럽게 죽자, 견훤은 이를 고려가 고의로 꾸민 일이라 의심했다. 그는 즉시 고려에 파견된 사신 왕신을 가두고 사자를 보내 전년에 보냈던 귀한 말을 되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돌려보내 주었다.
천성 2년(927년) 9월, 견훤은 근품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성에 불을 질렀다. 이를 계기로 신라 왕은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가 출병 준비를 하려던 찰나, 견훤은 고울부, 즉 울주를 공격해 점령한 뒤, 군사를 몰아 신라의 수도로 예고 없이 진격했다.
이때 신라 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기고 있었던 탓에 급작스런 사태에 큰 낭패를 보았다. 견훤은 왕비를 끌어다가 치욕을 가했고, 왕위를 폐위시킨 뒤 족제 김부를 새 왕으로 세웠다. 이어서 왕의 동생 효림과 재상 영경을 붙잡고, 신라의 진귀한 보물을 비롯해 자제들과 재능 있는 공인들을 모조리 끌고 갔다.
태조는 정예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공산 아래에서 견훤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했다. 이 과정에서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전사했고,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다. 태조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전쟁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그 상황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기세를 올린 견훤은 대목성과 경산부를 노략질하고 강주를 약탈한 뒤, 부곡성을 공격했다. 의성부의 태수 홍술은 이에 끝까지 저항했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씁쓸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오른팔을 잃었구나."
다음 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주성을 습격하자 성주였던 원봉은 반격하지 못하고 밤중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크게 분노한 태조는 그 고을의 위상을 격하시켜 '하지현'으로 개칭하였다.
신라의 왕과 신하들은 나라가 쇠락해가는 상황에서 더는 부흥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후원을 얻으려 했다. 이를 알게 된 견훤은 신라의 수도를 공격하려 했으나, 태조가 먼저 행동을 개시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난번 국상 김웅렴 등이 족하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는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울음에 호응하는 것과 같고, 또한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 하는 것처럼 어림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백성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 종묘와 사직을 폐허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조적의 말채찍을 손에 들고, 단신으로 한월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들 앞에서 태양 아래 서약하며, 6부를 의리에 따라 설득했습니다. 뜻밖에도 간신은 모두 도망쳤고, 임금 또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에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왕위에 올려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며, 없던 임금이 비로소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하는 내 충고를 헤아리지 않고 오직 유언비어를 믿으며 온갖 계책으로 왕위를 탐하려 하며 여러 차례 나라를 침범했지만, 오히려 내가 탄 말의 앞모습조차 보지 못하였으며, 내 한 줌 털조차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번 겨울 초순에 도두색상이 성산진 아래에서 항복했고, 그 달 안에 좌장 김락이 미리사 근처에서 전사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적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강자와 약자가 분명해졌으니, 누가 승리하고 패배할지는 분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성 성문 위에 활을 걸고 패강의 물을 내 말에 마시게 하는 일뿐입니다.
하지만 지난달 7일,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와서 국왕의 조서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오랫동안 고려와 화호를 유지하며 이웃 나라로서 맹약을 맺어 온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볼모가 죽는 일을 계기로 결국 옛 화친의 마음을 잃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며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이에 사신을 보내 노선을 따라 고려와 소통하여 서로 친목하고 영구히 평화를 도모하도록 부탁합니다."
나는 왕실을 높이려는 의리가 강렬하며,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를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월국왕의 조서를 듣고 이를 따를 준비를 하고 있지만, 족하가 여전히 이를 멈추지 않는다면 나 또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나는 지금 국경에 위치하며 싸움이 벌어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조서를 복사하여 족하에게 보내니 마음을 써서 깊이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토끼와 사냥개가 함께 지쳐 버리면 결국 다른 이들의 놀림감이 될 것이고, 조개와 황새가 팽팽히 대치하다간 그저 남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디 끝까지 어리석게 잘못을 거듭하다 자신의 후회만 자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성 2년(927) 정월에 태조는 이에 대한 회답을 보냈다.
삼가 오월국 통화사 반상서가 전하는 조서 한 통을 받들어 읽어 보았으며, 덧붙여 족하께서 보내신 편지도 확인하였습니다. 화초부사가 조서를 전달하면서 척소호음, 즉 좋은 소식이 담긴 편지를 건네주며 가르침 또한 전하였소. 왕의 조서(지검)를 받아들 때의 감격은 컸으나, 편지 내용을 펼쳐보니 마음속에 의심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돌아가는 사신을 통해 나의 뜻을 전하고자 하오.
나 또한 천명을 받들고 백성들의 추대로 인해 장수의 자리를 맡으며 천하를 경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난날 삼한의 불행과 흉년으로 인해 온 국토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백성들이 황건적으로 합류하거나 농토는 황무지가 되었소. 이에 세상의 어지러움을 잠재우고 나라의 재난을 극복하고자 선린우호를 맺으며 국토 수천리의 백성들이 농업과 양잠으로 생계를 즐기며, 사졸들 또한 7~8년 동안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유년 10월 갑작스럽게 사건이 발생하여 교전을 시작하게 되었소.
족하께서는 처음에 적을 얕보며 무모하게 전진하였으나 그것이 마치 버마재미가 수레를 막으려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행동이었소. 결국, 어려움을 깨닫고 서둘러 물러나는 모습은 모기가 산을 짊어져보려는 것과도 같았소. 족하께서는 손을 모아 공손히 맹세하며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화목하리라. 만일 이 맹세를 어긴다면 하늘이 벌을 내릴지어다”라고 하였소.
이에 나 역시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무(武)의 정신과 사람을 살리려는 인(仁)의 마음으로 여러 겹으로 포위했던 군사를 철수시키고 병사들을 휴식하게 하였으며, 볼모를 요구하지도 않고 단지 백성들의 안녕을 바랐습니다. 나는 남쪽의 백성들에게 큰 덕을 베풀었지만, 맹약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금 흉악한 세력이 일어나 벌과 전갈같이 백성을 위협하고 맹수와도 같은 행동으로 금성을 침탈하며 황궁이 위태로움을 겪게 하였소.
대의를 따르며 주나라 왕실을 존중했듯이, 어찌 환문과 같은 패업에 견줄 수 있겠으며, 기회를 노려 한나라를 도모함이 어찌 왕망과 동탁 같은 간악한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소? 지위가 높은 왕께서 몸을 굽혀 족하를 아들처럼 칭하게 했으니, 이는 상하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모두를 걱정스럽게 만들 뿐이오. 만일 원보의 충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나라를 안정시키는 길이 막히게 될 것이오.
나는 악의가 없으며, 오직 왕실의 위엄을 지키고자 조정을 구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해결하고자 하였소. 그러나 족하께서는 사소한 이익에 눈이 멀어 하늘과 땅의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임금을 시해하고 대궐에 불을 지르며 대신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학살하였소. 궁녀들을 끌고 가며 재물을 약탈하였으니, 그 악행은 걸왕과 주왕보다 더 심각하며 그 불인함은 경이나 부엉이보다도 심한 것이었소.
나는 붕천(임금의 서거)에 대한 원한과 각일(노양공이 창을 휘둘러 해를 되돌렸다는 고사)에 준하는 절실한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자 했소. 그렇게 다시 군사를 일으켜 두 해가 지났으며, 육로에서의 진격은 천둥과 번개처럼 신속했고, 수로에서의 전투는 호랑이와 용처럼 맹렬했소.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공을 세우고 헛된 일이 없었소.
윤경을 해안에서 몰아냈을 때에는 갑옷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추조를 성 주변에서 생포했을 때에는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소. 연산군 부근에서는 진전에서 길환을 처형했고, 마리성가에서는 수오를 깃발 아래서 사살했소. 임존성을 함락시킨 날에는 형적 등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청주현을 무너뜨릴 때는 직심 등 네다섯 명이 목을 바쳤소. 동수는 깃발만 보고도 달아났고, 경산은 구슬을 물고 항복했으며, 강주는 남쪽에서 귀순해왔고 나부는 서쪽에서 찾아왔소. 이러한 공세라면 국가의 완전한 회복이 멀지 않으리라 기대되오.
기필코 저수의 전장에서 장이가 옛 원한을 풀었던 것처럼, 오강의 기슭에서 한왕이 숙원을 이룬 전투처럼,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잠재우고 천하를 평정할 날이 올 것이오. 이는 하늘도 돕고 있으니 천명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더군다나 오월왕 전하의 덕은 먼 곳까지 미치고, 백성들 하나하나까지도 보살피는 인자함이 크셔서, 특히 주금(대궐)에서 윤음을 내려 이 땅의 난리를 그치라고 명하셨소. 이미 하늘 같은 교훈을 받았으니 어찌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소?
만약 공께서도 이 조서를 받아들여 싸움을 멈춘다면, 이는 오월국의 크나큰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동방의 끊어진 대의를 연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오. 그러나 만약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도 소용없게 될 터이니 어찌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겠소?>
장흥 3년(932년)에 견훤의 신하 공직은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나 결국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격분한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을 잡아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는 끔찍한 형벌을 내렸다. 그해 가을 9월, 견훤은 일길에게 명하여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예성강으로 진격하게 했다. 그들은 강에 3일 머무르는 동안 염주, 백주, 진주의 배 약 100척을 빼앗고 이를 불태운 뒤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청태 원년 갑오(934년), 견훤은 태조가 운주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조직해 새벽녘에 급히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아직 진영을 제대로 꾸리기도 전에 태조의 장군 유금필이 날쌘 기병으로 습격하여 약 3천 명의 적병의 목을 베었다. 이 전투 소식이 퍼지자 웅진 이북 지역에 있는 30여 개 성이 자진 항복하였다. 또한, 견훤의 부하여서 술사 종훈, 의사 지겸, 용장 상봉, 작필 등이 모두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병신년(936년) 정월에 견훤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신라 말엽에 후백제를 건국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우리의 군사는 북쪽 고려군에 매번 패하고 있다. 이를 보면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어찌 고려왕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제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의 세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모두 이에 반대하였다.
『이재』라는 역사서에서는 견훤의 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 기록에 따르면 견훤에게는 총 9명의 자식이 있었다. 맏아들은 신검, 둘째는 태사 겸뇌, 셋째는 좌승 용술, 넷째는 태사 총지, 다섯째는 대아간 종우, 여섯째는 이름 미상, 일곱째는 좌승 위홍, 여덟째는 태사 청구였다. 딸은 국대부인 한 명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상원부인 소생이다."
견훤의 처첩은 많았기에 아들만도 열 명이나 두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넷째 아들 금강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총애하며 왕위를 그에게 넘기려 했다. 이를 알게 된 형제들, 특히 신검, 양검, 용검은 깊은 근심에 빠졌다. 당시 양검은 강주 도독, 용검은 무주 도독직에 있었고 신검만이 아버지 곁에 남아 있었다.
이찬 능환은 강주와 무주에 사자를 보내 양검 등과 음모를 꾸몄다. 청태 2년 을미(935년) 3월, 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견훤을 폐위할 것을 권유하였고 결국 그를 금산사의 불당에 감금했다. 같은 시각 금강은 사람을 보낸 신검의 지시로 살해당했다. 이후 신검은 스스로를 대왕이라 칭하고 나라 안의 모든 죄수를 사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 견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궁궐 뜰에서 난 소란스러운 함성을 듣고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신검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임금께서 연로하시니 군국의 정무를 돌보시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장자인 제가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그 후 견훤은 금산사의 불당으로 옮겨졌으며 파달 등 장사 30명이 경비 역할을 맡았다. 당시 이런 민요가 퍼졌다고 한다...
가련한 완산의 아이,
아비 잃고 계속 우네.
견훤은 후궁과 어린 남녀 두 명, 시비와 고비녀, 나인 능예남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이후 4월이 되자 몰래 술을 빚게 한 뒤 이를 지키던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만들고, 그 틈을 타 고려로 도망쳤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소원보향우, 오담, 충질 등을 보내 수로를 통해 그를 맞아오게 했다. 고려에 도착하자 태조는 견훤이 자신보다 열 살 많음을 고려해 그를 상부(尙父)로 칭하며 남궁에 머물러 안락하게 지내도록 했다. 또한 양주의 식읍(食邑)과 전장, 노비 40명, 말 아홉 필을 하사하여 예우했으며, 이미 먼저 투항해 있던 신강으로 그의 직위를 정했다.
한편,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는 아내에게 은밀히 말했다.
"대왕께서 평생 애쓰시며 쌓아 올린 공업이 이제 거의 성취될 시점이었소. 그러나 하루아침에 가족 간 불화로 인해 나라를 잃고 결국 고려로 몸을 의탁하게 되었지요. 대저 절개 있는 여인은 두 남편을 모시지 않으며,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 아니겠소. 내가 만약 임금을 저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들을 대하겠소? 더구나 듣자니 고려의 왕공(王公)은 어질고 성실하며 근면 검소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하니, 이는 하늘이 내린 계시로 반드시 삼한(三韓)의 임금이 될 것이 확실하오. 그렇다면 어찌 글을 보내어 우리 왕께 위로를 전하고 동시에 왕공께 은근히 예를 표하여 후일 복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에 그의 아내도 동의하며 말했다.
"당신의 말이 바로 제 생각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천복 원년 병신(936년) 2년,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왕께서 의기를 드신다면 저는 안에서 도우며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는 이를 기뻐하며 사자를 후대하고 예물을 넉넉히 주어 돌려보냈다. 또한 영규를 크게 칭찬하며 말했다.
"만약 그대의 은혜로 합세하여 가는 길에 어떤 장애도 없다면, 내가 먼저 장군을 만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이후 부인께 큰 절을 올려 형님처럼 섬기고 누님처럼 받들겠습니다. 이 모든 보답은 반드시 끝까지 다할 것을 약속드리겠소. 천지신명도 이 약속을 들었을 것이오."
6월이 되자 견훤은 태조에게 말했다.
"늙고 비천한 신이 대왕께 항복해 온 이유는 오로지 대왕의 위엄을 빼앗아간 반역자 자식을 처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적자(賊子)와 난신(亂臣)을 벌하신다면, 비록 제가 죽더라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자 태조는 잠시 고심한 뒤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태자는 먼저 무와 장군 술회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지휘하게 하고, 천안부로 출발하도록 했다. 같은 해 가을 9월, 태조는 직접 3군을 이끌고 천안에 도착하여 합류한 후 일선군으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 신검은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섰다. 갑오일에 양측은 일이천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으며, 고려군은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방을 향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태조와 견훤이 함께 병사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중, 흰 구름이 칼과 창 모양을 이루며 적진 방향으로 떠오르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고려군이 북소리를 울리며 공격을 개시하자, 후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은 고려군의 수와 정돈된 위용을 보고 갑옷을 벗어버리고 항복을 선언했다. 태조는 그들을 위로하면서 장수들의 위치를 묻자, 효봉 등이 답했다.
"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
이에 태조는 장군 공훤 등에게 명령을 내려, 삼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협공을 펼쳤다. 결국 후백제군은 대패하여 황산 탄현까지 달아났다. 이곳에서 신검은 두 동생과 장군 부달, 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이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며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 살도록 했다.
그 후 태조는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 양검 등과 은밀히 공모해 대왕을 유폐하고 그 아들을 왕위에 세운 일은 네 계책이었는데, 신하로서 마땅하다고 생각했느냐?"
능환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에 태조는 그의 목을 치도록 명령했다. 한편, 신검이 왕위에 오른 것은 본인의 의도가 아닌 타인의 협박 때문이었다. 그는 항복 후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처형을 면했지만,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견훤은 등창으로 인해 며칠 후 황산의 한 불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때는 9월 8일이었으며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태조는 군율이 엄격하고 공평하여 군사들은 조금의 일탈도 하지 않았으므로 각 주현은 태평했고, 백성들은 모두 태조를 찬양하며 축복했다. 태조는 또 영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왕이 나라를 잃은 뒤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으나, 오직 경과 경의 부인만이 천리 밖으로 편지를 보내 정성을 보냈고 나를 향해 아름다운 명예를 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지 않겠소."
태조는 영규에게 좌승이라는 벼슬과 천 경의 논밭을 하사하고 역마 35필까지 빌려 가족들을 데려오게 했으며, 그의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892)에 나라를 세웠으나 진나라 천복 원년(936), 병신년에 멸망하며 45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역사서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신라는 운명이 다하고 도를 잃어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며 백성들 또한 의지할 곳을 잃게 되었다. 그 틈을 타 여러 도적들이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도적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원래 신라의 왕자였으나 오히려 자신의 나라를 적으로 삼아 선조의 초상을 칼로 베기까지 했으니, 그 잔혹함과 어리석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견훤은 신라의 평민으로서 출세했지만,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간사한 마음을 품고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신라의 수도를 공격했다. 그는 왕과 신하들을 짐승처럼 학살했으니, 실로 천하의 악한이라 할 만하다.
결국 궁예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버림받았고, 견훤은 아들로 인해 화를 입었으니, 이는 모두 자신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항우나 수나라의 이밀처럼 뛰어난 인재들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사악한 인물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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