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락국기
천지가 개벽한 뒤, 이곳은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의 아홉 추장이 있었다. 이들은 백성 천 가구를 통솔하며 약 7만 5천 명의 사람들을 이끌었다. 산과 들에 모여 살던 이들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며 생계를 꾸려갔다.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서기 42년) 3월 계욕일, 그들이 거주하는 북쪽 구지(거북봉)에서 이상한 기운과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마을 사람 2~3백명이 모였지만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누가 있는가?"
구간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곳이 어디인가?"
"구지입니다."
이어 목소리가 다가왔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새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러니 흙을 뿌리며 이렇게 외쳐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노래를 부르며 춤추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지시를 들은 후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쁘게 노래하고 춤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자줏빛 광채가 땅으로 내려와 닿는 것을 보았다. 그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이 있었고, 이를 열어보니 해처럼 빛나는 황금빛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며 기뻐했고 무수히 절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이후 알들을 다시 싸서 아도간의 집에 가져가 보관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다시 모여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갓난아기로 변해 있었다. 아이들의 용모는 깨끗하고 단정했으며, 바로 평상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절하며 정중히 대했다. 아이들은 날마다 자라더니 10여 일 만에 키 9척으로 성장했다. 그 모습은 은나라 천을과 같았고, 얼굴은 하나라 고조와 유사했으며 눈동자는 겹겹이 되어 순임금의 특징을 닮았다.
그달 보름, 이들 중 한 아이가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라 '수로' 또는 '수릉'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나라 이름은 대가락이라 하고 가야국이라고도 칭했다. 다른 다섯 아이 역시 각자의 지역으로 가 다섯 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가야국의 경계는 동쪽으로 황산강, 서남쪽으로 창해, 서북쪽으로 지리산, 동북쪽으로 가야산, 남쪽은 나라 끝으로 정의되었다.
수로왕은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임시로 세운 궁궐의 초가지붕은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았으며 계단은 흙으로 이루어져 3척 남짓이었다. 즉위 2년(서기 43년) 정월에 왕은 도읍 자리를 정하겠다고 선언하며 신답평 남쪽으로 나아가 사방 산악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 땅은 비록 협소하지만 경치가 빼어나고 훌륭하여 16나한이나 칠성 같은 성인이 살기에 적합하다. 이곳을 기반으로 마침내 좋은 나라로 만들면 어떻겠는가?"
이에 외성을 1500보 둘레로 하고, 궁궐, 전당, 여러 관청의 청사, 무기고, 창고를 지을 터전을 마련한 뒤 왕은 다시 궁궐로 돌아갔다. 나라 안에서 장정과 인부, 기술자들을 폭넓게 불러모아 같은 달 20일 성곽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 3월 10일에 완공했다. 다만 궁궐과 여러 건물들은 농한기를 이용해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그해 10월에야 착수하여 갑진년 2월에야 완성되었다. 완공 후 왕은 길일을 정하여 새 궁으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정사를 돌보며 국정을 부지런히 이어갔다.
어느 날,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태를 머금고 달을 채우자 알을 낳았다. 그 알이 변해 사람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도착했다. 그는 키가 3척, 머리 둘레가 1척에 이르렀다. 탈해는 곧 궁궐로 나아가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이에 왕이 답하였다.
"하늘이 나를 선택하여 이 왕좌에 앉힌 것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는 뜻이다. 나는 감히 하늘의 뜻을 거슬러 왕위를 내어줄 수도, 백성들을 당신에게 맡길 수도 없다."
그러자 탈해가 되받았다.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뤄보자."
왕이 이를 수락하였고, 탈해는 즉시 매(조류)로 변신했다. 이에 왕은 독수리로 변하여 대응했다. 그 후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왕은 새매로 화했다. 이 모든 변화는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잠시 후 탈해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 역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자 탈해는 꿇어 엎드려 항복하며 말했다.
"술법을 겨루는 중에서도 매가 독수리를, 참새가 새매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왕께서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 인덕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투더라도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탈해는 곧 왕과 작별하고 도성을 떠났다. 그는 인근 나루터에서 중국 배가 드나드는 수로를 따라 항구로 나아갔다. 그러나 왕은 그가 뒤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즉시 군사를 실은 배 500척으로 추격하게 했다. 탈해는 계림 지역으로 몸을 피했고, 이에 군선들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신라의 사서와 내용이 크게 다르다.
건무 24년 무신년 7월 27일, 구간 등이 왕을 알현하며 아뢰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후 아직 훌륭한 배필을 정하지 못하셨습니다. 저희들이 기른 처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을 선택하여 왕비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왕은 답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다. 내게 짝지어질 왕후 또한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
이후 왕은 유천간에게 망산도에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승점으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며, 승점은 경기 지역 내의 한 마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남쪽 바다에서 붉은 돛단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천간 등은 망산도에서 신호용 횃불을 켜고 사람들을 육지로 이동하도록 독려했다. 신귀간이 이를 보고 곧바로 대궐로 달려와 왕께 보고하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아내 구간 등을 보내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며 모시고자 했으나, 왕후는 배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과 아는 사이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경솔히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왕후의 말을 왕에게 전했을 때, 왕은 이를 옳게 여기고 직접 유사와 함께 행차했다. 대궐 아래 서남쪽으로 약 60보 떨어진 산 기슭에 장막을 쳐 임시 궁전을 마련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내려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자신이 입었던 비단 바지를 산신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그녀와 함께 따라온 시종 두 명, 신보와 조광이 있었고, 그들의 아내는 모정과 모량이라 불렸다. 이외에도 많은 노비들이 동행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20여 명에 달했다. 가지고 온 재물과 귀중품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였다.
왕후가 왕이 기다리는 곳에 가까워지자, 왕은 친히 나아가 그녀를 맞이하여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예를 갖추어 뵙고 곧 물러났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를 안내하며 편히 머무를 방을 마련하도록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지내게 하고,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머물게 하라."
또한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빚은 술을 공급하고, 무늬와 색상이 있는 자리를 제공해 안락히 지내도록 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옷감, 비단, 귀중품까지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많은 군인들이 이들을 보호하도록 배치했다.
왕과 왕후가 침전에 들었을 때, 왕후는 조용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입니다. 올해 16세이며,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말씀하시기를, 꿈에서 하늘의 상제를 뵈었고 그분께서 '가락국 왕인 수로는 하늘이 선택한 신성한 인물이니 아직 배필을 정하지 않았으니 공주를 보내어 그의 배필이 되게 하라' 하셨다고 전하셨습니다. 저는 꿈의 말씀대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함을 지니며 공주께서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하라는 청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현숙한 공주께서 와주셨으니 영광이고 큰 복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혼인을 이루었고, 이틀 밤과 하루 낮을 함께 지냈다. 이후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며 뱃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하사했다.
8월 1일, 왕은 왕후와 함께 같은 수레를 타고 대궐로 돌아왔다. 잉신 내외도 수레를 나란히 타며, 중국에서 가져온 다양한 물품들도 수레에 실려 천천히 대궐로 들어왔다. 대궐에 도착한 시간은 오정 무렵이었다. 왕후는 궁중에 머물게 했으며, 잉신 내외와 노비들은 비어 있던 두 집에 나누어 살게 했다. 다른 수행원들에게는 20여 칸 되는 빈관 한 채를 제공해 적당히 머물도록 조치했다. 그들에게 날마다 충분한 물품을 지급했으며, 가져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에 보관해 왕후의 사시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정리했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官)은 모든 관직 중 으뜸이지만,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이나 농부의 칭호와 같아서 높은 관직의 위엄을 드러내지 못한다. 만약 외국인이 이를 듣게 된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명칭을 개정하여, ‘아도’를 ‘아궁’으로, ‘여도’를 ‘여해’로, ‘피도’를 ‘피장’으로, ‘오도’를 ‘오상’으로 바꾸었으며, ‘유수’와 ‘유천’은 첫 글자를 유지하고 둘째 글자만 바꾸어 각각 ‘유공’과 ‘유덕’이라 했다. 또한, ‘신천’을 ‘신도’로, ‘오천’을 ‘오능’으로 개칭하였다. ‘신귀(神鬼)’는 발음은 그대로 두고 의미를 바꿔 ‘신귀’로 정했다.
계림의 관직 체계를 바탕으로 각간, 아질간, 급간의 품계를 부여하고, 그 아래의 관료들은 주나라의 규례와 한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나누어 정했다. 이는 낡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며 관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아끼니, 교화는 엄격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정치는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아도 질서가 잡혔다.
더욱이 왕과 왕후의 관계는 하늘과 땅, 해와 달, 양과 음처럼 조화로운 것이었다. 왕후의 내조는 마치 도산씨가 하나라 우왕을 보필하고, 당원(요임금의 딸)이 순임금을 도우며 교씨를 일으킨 것과도 같았다. 왕후는 곰을 보는 꿈을 꾼 뒤 태자인 거등공을 낳았다.
후한 영제 중평 6년(189) 기사년 3월 1일, 왕후는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대지가 무너진 듯 슬퍼했으며, 왕후를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백성들은 왕후가 보여준 자애로운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왕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마을을 ‘주포촌’, 붉은 기를 단 배가 도달한 바닷가를 ‘기출변’, 비단바지를 벗어 가로놓은 언덕을 ‘능현’이라 명명했다.
연이어 천부경 신보와 종점감 조광은 가락국에 정착한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얻었으나, 이후 1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외에도 가락국에 함께 온 노비들은 7~8년 동안 자식을 두지 못한 채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들이 머물던 빈관은 이후 텅 비고 황폐해졌다.
왕후의 죽음 이후 왕은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깊은 슬픔 속에 살다가 헌제 건안 4년(199) 기묘년 3월 23일에 향년 158세로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의 슬픔은 왕후의 별세 때보다 더 컸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한 길, 둘레 300보에 달하는 빈궁을 세우고 수릉왕묘라 이름 붙였다.
왕의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 구형왕까지 모두 이 묘에 배향되었으며 매년 정월 초사흗날과 일곱째 날, 5월 초닷새, 8월 초닷새와 보름날에는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을 통해 꾸준히 제사가 이어졌다.
신라 제30대 법민왕이 즉위한 용삭 원년, 신유(661) 3월의 어느 날 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반포했다.
가야국 시조인 수로왕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하면서 아들 세종을 데리고 왔고, 세종의 아들 솔우공, 솔우공의 아들 서운잡간의 딸인 문명황후가 나를 낳으셨다. 따라서 시조 수로왕은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했지만, 그 묘는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고 이를 계승하여 제사를 지속하도록 하라.
이에 사자를 보내어 옛 묘가 있던 터 주변 상전(上田) 30경을 바치고, 이 땅을 제사용으로 삼아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신라의 본토에 소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인 갱세급감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을 주관하였고, 매년 명절마다 술과 단술, 떡과 밥, 차와 과일 등 여러 음식을 준비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 거등왕이 한 해 연중 5일로 정한 제삿날은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며, 특히 거등왕 즉위 연도인 기묘(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이후 구형왕 말년을 지나 330년 동안 제사는 두터운 정성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이후 용삭 원년 신유(661)에 이르기까지 약 60년 동안에는 묘에서의 제사가 가끔씩 소홀히 여겨지는 일이 있었다. 문무왕(법민왕의 시호)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이어받은 효심이 지극하지 아니한가.
신라 말기에는 충지잡간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금관성을 점령하고 스스로 성주장군이라 칭했다. 그는 묘향을 빼앗아 마음대로 제사를 지냈는데, 단오날 제사를 올리던 중 대들보가 갑자기 부러져 치어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장군은 깊이 두려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과거의 인연으로 인해 감히 성왕이 거하던 국성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이 은혜에 감사하여 나는 그의 영정을 그려 모시고 향과 등불로써 공양하며 신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는 비단 교견 3척으로 진영을 그리고 벽에 모신 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공손히 받들었다. 하지만 사흘 만에 진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 위에 고였고, 그 양이 거의 한 말에 이르렀다. 이에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며 진영을 묘소로 가져가 불태워 없앴다. 동시에 수로왕의 직계 후손 규림을 불러 말했다.
최근에도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잇따르는데, 어찌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인가? 이는 필시 묘소의 위령께서 내가 영정을 그려 공양한 것을 크게 꾸짖으신 것 같다. 영규도 이미 죽었으니, 내 마음이 괴롭고 두렵다. 지금 화상을 모두 불살라 없앴으니 신께 벌을 받을 것은 내가 감당하겠다. 당신은 왕의 직계 후손이니 이전처럼 제사를 올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 후 규림은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으며, 그는 88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간원이 뒤를 이어 제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단오날 알묘제 때 영규의 아들 준필이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켰다. 그는 사당에 와서 간원이 차린 제물을 방해하고 자신만의 제물을 차려 제사를 올렸지만, 삼헌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병이 나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죽고 말았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음사(淫祀)란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였다. 과거에는 영규의 일이 있었고, 후에는 준필의 일이 있었으니, 이는 두 부자를 두고 한 이야기인지 묻게 된다.
한편, 도둑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훔치기 위해 찾아왔다. 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활을 당긴 채 나타난 용사가 사당에서 나와 사면으로 화살을 쏘며 7~8명을 쓰러뜨렸다. 이에 도둑들은 모두 달아났다. 며칠 후 도둑들이 다시 왔으나, 길이 30여 척에 눈이 번개처럼 번뜩이는 거대한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타나 도둑 8~9명을 물어 죽였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마저 엎어져 도망쳤다. 이를 통해 능원 안팎에 신령스러운 존재가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안 4년 기묘(199)년에 처음 이 사당이 세워진 이후, 현 임금이 즉위한 지 31년째가 되는 대강 2년 병진(1076)까지 약 878년이 되었음에도 제단의 흙은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진 나무는 시들지 않았으며, 사당의 옥조각들도 손상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당나라 사람 신체부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란 없는 법"이라 했지만, 가락국의 경우로 보아 그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고는 할 수 없겠다. 나라가 망했음은 맞으나, 수로왕의 사당은 여전히 견고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로왕을 기리는 놀이도 있다. 매년 7월 29일, 이 지방 사람들과 관리, 군졸들이 승점에 올라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즐긴다. 이때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건강한 인부들이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육지를 향해 달리고, 배는 물 위를 떠다니며 서로 밀치고 고포 북쪽을 향해 경주를 벌인다. 이는 과거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를 맞이하던 때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가락국 멸망 이후 이곳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신라 제31대 정명왕이 개요 원년 신사(681)에 이 지역을 금관경이라 명명하고 태수를 두었다. 고려 태조가 통합한 이후에는 임해현이라는 이름으로 배안사가 설치되어 48년간 유지되었으며, 이후 임해군 또는 김해부로 불리며 도호부가 세워져 27년 동안 이어졌다. 또한 방어사가 들어서며 64년 동안 운영되었다.
순화 2년(991), 김해부의 양전사였던 중대부 조문선은 조사 후 보고하기를, "수로왕의 능묘에 속한 밭이 많아 이를 옛 관례대로 15결로 정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며, 나머지는 부의 역정을 담당하는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였다. 해당 내용을 관서에서 조정에 보고하자 명령이 내려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化)하여 성군이 되었고, 왕위에 올라 그 수명이 무려 158년이나 이어졌으니, 삼황(三皇) 이래로 견줄 만한 이가 드물었다. 수로왕께서 세상을 떠난 뒤, 선대로부터 능묘에 속하던 전답을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었기에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반복하여 아뢰니, 조정에서는 이를 타당하다고 여겨 절반은 능묘에 소속시키고 나머지는 해당 지역의 역졸(役卒)들에게 분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양전사는 명을 받아 일부는 능묘에 소속시키고 나머지는 지방의 부역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 양전사는 피로로 지쳐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서 7~8명의 귀신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밧줄과 칼을 들고 양전사에게 죄를 물으며 목을 베겠다고 위협했다.
양전사는 꿈속에서도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깨어난 뒤 병이 들었다. 이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지 못하고 달아나다가 끝내 병이 나아지지 않아 관문을 넘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의 도장은 양전도장에 찍히지 않은 채 남았다. 이후 사신이 내려와 해당 밭을 조사해 보니, 1결(結) 12부(夫) 9속(束)밖에 남아 있지 않아 3결 87부 1속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관련 위법 사항을 추적해 중앙과 지방 관서에 보고했으며, 칙령으로 부족분을 충당해 능묘에 돌려주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당시에도 후대에까지 깊이 탄식할 만한 일이었다.
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은 정사에 부지런히 임하고, 진실하고 바른 일을 중히 여겼다. 시조모인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가(元嘉) 29년 임진년(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를 ‘왕후사’라 명명했다. 또한 절 근처의 평전 10결을 측량하여 삼보(三寶: 불·법·승)를 공양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사용했다.
이 왕후사가 설립된 지 500년 후에는 장유사가 세워졌으며, 이 절에 제공된 전답은 무려 300결에 달했다. 당시 장유사의 관리들은 왕후사의 토지가 장유사의 동남쪽 경내에 있다며 왕후사를 폐사하고 이를 창고와 마구간으로 활용했다. 절이 쓸쓸히 사라졌으니 이는 가히 슬픈 일이었다.
수로왕의 세조 이후 9대손들의 계보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조의 9대손에 대한 역사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 명칭과 계보는 다음과 같다.
천지가 열리기 시작하며 처음으로 빛이 이안을 비추었으나,
인륜이 태동했어도 임금의 위상은 아직 세워지지 않고 있었다.
중국은 이미 여러 세대를 지나왔지만, 동국에서는 여전히 수도가 나뉘어 있었다.
계림이 먼저 자리 잡았고, 가락국은 나중에 세워졌다.
스스로 나라를 돌볼 지도자가 없다면,
백성을 돌볼 이는 누가 될 것인가?
이에 상제께서 창생을 돌보며 자비를 베푸셨다.
명령을 내려 특사로 신령을 보냈으니,
산속에 알을 내려 그 모습을 안개 속에 감추었다.
안은 여전히 아득하고 바깥 또한 캄캄하였으며,
형체는 나타나지 않지만 소리만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노래로 상제를 찬양하며 춤으로 경의를 표했다.
그러던 중 7일 만에 고요가 번져갔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열리며,
여섯 개의 둥근 알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한가운데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있었다.
낯선 땅에 연속된 집들이 들어섰고,
군중들은 몰려들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중 다섯 분은 각 읍으로 흩어졌고, 한 분은 이 성에 남았다.
그들은 마치 한결같이 닮은 형제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하늘의 덕으로 세상을 정비하고 질서를 확립하였다.
처음 왕에 오르니 나라는 맑아짐이 느껴졌고,
궁전의 구조는 옛 관례를 따랐으나
토단(흙 계단)의 평평함이 단단함을 더했다.
정사를 부지런히 살피고 민정을 세심히 보살피며,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정직한 다스림을 펼쳤다.
길손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고 농부들은 논밭을 서로 사양하며,
나라 전체는 안정기를 맞아 만민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풀잎 위의 이슬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상태도
결국 대춘(오랜 삶을 상징하는 나무)의 생명처럼 지속되지 못했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그의 발자취는 금빛 같고, 이름은 옥처럼 찬란히 빛났으니,
후손은 끊이지 않았고 제사와 영묘는 향기로웠다.
세월은 흘렀으나 그의 규범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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