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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 2. 고조선, 고구려, 삼한, 백제 등

 

 ■ 고조선 - 왕검조선

북제의 정사인 <위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약 2천 년 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중국의 고임금(요임금)과 동시대였던 것으로 전한다.

<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또한 등장한다. 옛날에 환인이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의 서자인 환웅은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이를 안 환인은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고 그곳이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 적합한 장소임을 확인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 세상을 다스리도록 명했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 즉 지금의 묘향산으로 내려왔다. 이 산 아래 신단수라 불리는 나무가 있던 곳에 그가 자리 잡았는데, 이를 신시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은 환웅천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풍백(바람), 우사(비), 운사(구름)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법률, 선악 등 인간 세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교화하였다.

그 즈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람으로 변하기를 환웅에게 간절히 기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한 쑥 한 줄기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곰은 이를 받아먹고 21일간 금기를 지키니 여자의 몸으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가 된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자식을 갖기를 기도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하여 곧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째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을 도읍으로 삼으며 국호를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후 그는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궁홀산 혹은 금미달로도 불린다. 단군은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주나라 호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이후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1908세였다고 전한다.

당나라의 <배구전>에 의하면 고려는 본래 고죽국(현재의 해주)이었으며, 주나라가 이를 조선이라 봉하였다. 이후 한나라가 이르러 이 땅을 세 군으로 나누고 각각 낙랑, 현도, 대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통전>에도 이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한사군으로 기록된 부분과 차이가 있다.

 

■ 고조선 - 위만조선

전한서 조선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연나라 시기부터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이곳에 관리들을 배치해 변방에 요새를 쌓았다. 이후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요동군의 변방을 이 땅에 예속시켰다.

한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는 이 지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킬 수 없게 되자, 예전의 요새를 복원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예속시켰다. 그런데 연나라의 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도망하자, 같은 연나라의 위만이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해 요동의 변방 요새를 지나 패수 너머로 진나라 옛땅의 상하 변방에 정착했다. 그는 이후 진번, 조선의 오랑캐들과 연나라 및 제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을 예속시켜 왕이 되었고, 도읍을 왕검으로 정했다.

위만은 군사의 힘을 동원해 주변 소읍들을 점령하면서 진번과 임둔 역시 항복하고 이에 종속되었다. 그의 세력은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으며, 그는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손자 우거가 이를 계승했다. 당시 진번과 진국은 한나라에 국서를 보내 천자를 알현하려 했으나, 우거는 길을 막아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원봉 2년(B.C. 109년), 한나라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우거를 타일렀으나, 우거는 끝내 이를 거부했다. 섭하는 협상이 실패하자 돌아갔으나 조선의 비왕 장을 죽이고 보고를 위해 한나라로 귀환했다.

이에 천자는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임명했으나,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며 갑작스레 병력을 출동시켜 그를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자는 누선장군 양복에게 제나라 병선과 5만 병력을 거느리고 발해를 지나 조선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또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에서 출발해 우거를 공격하도록 했다. 우거는 험준한 지형에서 이를 저지하며 맞섰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력 7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도달했으나, 우거가 성을 사수하며 군세가 적은 누선군을 공격해 패퇴시켰다. 양복은 병력을 잃고 산으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한편, 좌장군 순체 역시 패수 서쪽에서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나라 천자는 장군들의 패배 소식을 듣고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강력함을 보여주며 우거를 설득하게 했다. 우거는 이에 항복 의사를 밝히며 태자를 보내 말과 함께 조공을 약속했으나, 태자가 무장병력 1만여 명을 대동하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사자 위산과 좌장군 순체는 무기를 두고 넘어오라 요구했다. 태자는 이를 자신에 대한 음모로 의심하고 되돌아갔다. 이 보고를 받은 천자는 위산의 목을 치며 책임을 물었다.

좌장군은 패수 상류에 주둔한 조선군을 격파하며 왕검성 북서쪽으로 진격해 포위했다. 누선장군 역시 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겨 합류했으나, 우거가 성을 굳게 지켜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천자는 전쟁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지체되자, 과거 제남 태수였던 공손수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공손수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해 현장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공손수가 조선에 도착하자, 그는 누선장군 양복을 체포해 가두고 그의 군대를 합병하여 좌장군의 군대와 함께 왕검성을 신속히 공격했다. 

당시 조선의 대신 노인, 상 한도, 이계상 삼, 그리고 장군 왕협은 협의 끝에 항복을 결의했으나, 조선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도, 왕협, 노인은 도망쳐 한나라에 투항했으나, 노인은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원봉 3년(B.C. 110년) 여름, 이계상 삼은 사람을 시켜 조선 왕을 암살하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는 우거왕의 대신 성기가 한나라를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좌장군은 우거왕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를 통해 백성들을 설득하고 성기를 처단하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침내 조선은 평정되었다. 이후 한나라는 이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네 군(郡)을 설치했다.


■ 마한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은 궁인과 좌우에서 그를 모시는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의 땅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이를 마한이라 불렀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보낸 글에서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가 등장했으며, 백제는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언급하였다.

최치원의 말에 따르면, "마한은 고구려이며, 진한은 신라"라고 한다. 사이에 따르면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 중국 주변의 이른바 오랑캐 나라들이 있었으며, 구이는 동방 지역의 아홉 부족으로서 견이(畎夷), 어이(於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풍이(風夷), 양이(陽夷) 등으로 구성되었다. 《주례》에는 직방씨가 사이와 구맥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곧 동이족의 한 갈래로 구이를 의미한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명주는 옛 예국(濊國)으로 전해지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얻어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춘주는 예전의 우수주로, 옛날에는 맥국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삭주 역시 맥국으로 불렸다. 평양성 또한 맥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회남자》에서는 동이가 아홉 갈래로 나뉜다고 했고, 《논어정의》에서는 구이가 곧 현도, 낙랑, 고려, 만식, 부유, 소가, 동도, 왜인, 천비라고 설명하였다.

《해동안홍기》는 구한을 일본, 중화, 오월, 탐라, 응유, 말갈, 단국, 여진, 예맥으로 정의하였다.


■ 2부(二府)
  
전한서에 따르면 소제 시원 5년 기해(B.C. 82년)에 두 외부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옛 영토인 평나와 현도군 등을 합쳐 만든 평주도독부와, 임둔과 낙랑 등 두 군의 땅에 세운 동부도위를 의미한다.


■ 72국(七十二國)
통전에서는 조선의 유민이 약 70여 개 나라로 나뉘었다고 전하며, 각 나라의 면적은 사방 백 리였다고 한다. 
또한, 후한서에 따르면 서한이 조선의 옛 영토에 처음에는 네 개의 군을 설치했으나, 이후 이를 두 개의 부로 나눴다고 기록되어 있다. 법령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78개의 나라로 나누었다고 하며, 각 나라는 만호 규모였다고 한다.


■ 낙랑국 
전한 시기에 처음으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응소는 이것을 고조선국이라고 밝혔다. 

신당서 주에 따르면, 평양성은 한나라 시절의 옛 낙랑군 지역이라고 전해진다. 국사에서는 혁거세 30년에 일부 낙랑인들이 신라로 와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신라 3대 노례왕 4년에는 고구려 3대 왕인 무휼왕이 낙랑을 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으며,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의 주민들과 함께 신라로 와 항복하였다. 무휼왕 27년에는 광호제가 사신을 보내어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살수 이남 지역이 한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 북대방 

북대방은 원래 죽담성이라 불렸으며, 신라 노례왕 4년(B.C. 27년)에 대방과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 남대방 

남대방은 조위 시대에 처음 설치된 남대방군에서 비롯되었다. 대방의 남쪽은 천리에 걸쳐 바다와 접해 있으며, 이 지역을 한해(瀚海)라고 불렀다.

 

■ 말갈과 발해 

통전에 따르면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 알려져 있다. 그 지배자 조영이 나라를 세워 스스로 나라 이름을 '진단'이라 칭했다. 당나라 현종 선천 연간(712년)부터는 말갈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발해로만 불리기 시작했다. 개원 7년(719년) 조영이 죽자 '고왕'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고, 그의 후계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그 후계자는 독자적으로 연호를 바꾸며 발해를 해동의 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발해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을 두었으나, 후당 천성 초기 거란의 침입으로 결국 거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가탐의 《군국지》에 따르면, 발해국의 압록부, 남해부, 부여부, 추성부 등 네 개의 주요 행정 구역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 해당한다. 신라의 천정군에서 추성부까지 이르는 구간에는 모두 39개의 역참이 포함되었다. 또한, 삼국사에는 백제 말기에 발해, 말갈, 신라가 백제의 영토를 나누어 점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인들은 북쪽에 말갈이, 남쪽에 왜인이, 서쪽에는 백제가 있어서 이들로 인해 나라가 위협받고 있다고 여겼다. 말갈의 땅은 아슬라주와 가까이 인접했다고도 한다.

동명기에는 졸본성이 말갈 땅과 인접했으며, 신라 6대 지마왕 14년(을축년)에 말갈의 대규모 군대가 국경을 넘어서 대령(大嶺)의 성책을 공격하고 이어서 이하(泥河)를 지나갔다고 전한다.

또한, 후한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기록했고, 지장도에서는 읍루와 물길 모두를 숙신이라고 불렀다. 흑수와 옥저에 관해서는 도파의 지장도에서 진한 북쪽에 위치한 남북 흑수를 언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동명제는 즉위 10년 만에 북옥저를 정복했으며,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 가구가 신라로 귀순했다. 신라 혁거세 52년에는 동옥저가 신라에 품질 좋은 말을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통해 동옥저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장도에서는 흑룡강이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하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전해진다.

 

■ 이서국 (伊西國)

노례왕 14년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경주)을 공격해 왔다. 운문사에 전해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에 따르면, 당 정관 6년(632년) 임진년에 이서군 금오촌의 영미사가 농토를 헌납한 기록이 있다. 현재의 청도 지역이 고대 이서군에 해당하니, 청도군이 바로 이서국이라 할 수 있다. 

 

■ 다섯 가야 

5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벽진가야), 소가야로 구성되었다. 또한 『본조사략』에 따르면 고려 태조 천복 5년(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바꿨다. 첫 번째는 금관가야를 금관으로, 두 번째는 고령가야를 고령으로, 세 번째는 비화가야를 비화로 부르며 나머지 두 개는 아라와 성산이라 하였다. 

 

■ 북부여 

『고기(古記)』에 따르면 북부여는 전한 선제 신작 3년(기원전 58년) 임술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에 내려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도읍을 정하며 왕이라 칭하고 북부여라 명명하였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고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부루라 지으며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이후 천제의 뜻에 따라 상제가 왕을 위해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해 흥기하여 졸본부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를 세웠다. 이것이 곧 고구려의 시조로 이어졌다. 


■ 동부여 

북부여의 왕 해부루는 대신 아란불을 통해 천제의 계시를 받았다. 천제는 "장차 나의 자손이 이곳에서 나라를 세울 것이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땅은 기름져 왕도를 세우기에 적합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부루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를 구하고자 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 앞에서 멈추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이상히 여긴 왕은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어 보게 했고, 그 안에서 황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발견했다. 이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준 아들이다"라 여겨 그 아이를 데려와 길렀다. 그의 이름은 금와(金蛙)라 지었으며, 자라난 후 태자로 삼았다. 
그 후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태자 대소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지황 3년(37년) 임오년에 고구려 왕 무휼이 이를 쳐 대소를 죽임으로써 동부여는 멸망하였다. 


■ 고구려 

고구려는 본래 졸본부여로 시작되었다. 일부는 이를 현재의 화주나 성주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국사》의 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는 동부여로 피신했으며, 해부루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자리를 금와가 이어받았다.

당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에게 사정을 묻자, 그녀는 자신을 하백의 딸 유화라고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 아우들과 놀던 중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밝히며 저를 웅신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으로 유인해 정을 나누었으나, 이내 떠나버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중매 없는 혼인을 꾸짖으셨고, 결국 저를 이곳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금와는 그녀의 이야기가 기이하다고 느껴 유화를 방 안에 가두어 두었다. 그때 햇빛이 방 안으로 비추었고, 그녀가 몸을 피해도 계속 따라다니며 비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알 크기는 무려 닷되들이 말(斗)만큼 컸다.

왕은 그 알을 괴이하게 여겨 개나 돼지에게 먹이려 했으나 아무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버리자 소와 말도 알을 피하며 지나갔다.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오히려 그 알을 덮어 보호했다. 결국 왕은 알을 부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알을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는 알을 천으로 감싸 따뜻한 곳에 두었고, 얼마 후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골격과 외모가 범상치 않았으며, 일곱 살 무렵에는 기골이 뛰어나고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면 백 번 모두 명중시켰다.

그 나라의 풍습에 따르면, 활을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불렀기에 이로 인해 아이의 이름이 주몽으로 지어졌다.

한편,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항상 주몽과 놀았으나 재주 면에서는 주몽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에 장남 대소는 왕에게 주몽을 모함하며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 큰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러한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는 일부러 좋은 말들에게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만들고, 나쁜 말들에게 먹이를 많이 줘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여윈 말을 주몽에게 내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자, 이를 미리 안 주몽의 어머니가 그에게 경고했다. 
"지금 나라는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하고 있어. 하지만 너의 재주와 지략이면 어디로 가든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서둘러 이곳을 떠나거라." 
이에 주몽은 오이 등 세 명을 동료로 삼아 도망쳐 엄수에 이르렀다. 그는 그곳에서 물을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손자다. 지금 뒤쫓는 무리가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주몽 일행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다리가 사라지자 뒤쫓던 기마병들은 건너지 못했고, 주몽은 무사히 졸본주에 도달해 그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하지만 궁전을 지을 시간이 없어 비류수 근처에 간소한 집을 짓고 거처하였다. 그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씨를 고(高)로 삼았다. 당시 주몽의 나이는 겨우 12세였으며,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에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고구려는 훗날 융성기에 인구가 21만 508호에 달하는 대국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주림전》 21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옛날 영품리왕의 후궁 한 명이 임신하자 상(相)을 보는 이가 점괘를 통해 말했다. 
"그 아이는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해 죽이려 했다. 이에 후궁은 말하길, 
"임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상한 기운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왕은 불길하다 여기고 돼지우리로 내다버리게 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며 보호했다. 마구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여 끝내 죽지 않았다. 이 아이가 자라 결국 부여의 왕이 된 것이다. 


■ 변한과 백제 

신라의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지 19년째인 임오년에 변한 사람들이 항복해 왔다.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에 있었다고 기록되었으며, 후한서에는 변한은 남쪽, 마한은 서쪽, 진한은 동쪽에 위치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최치원은 변한이 곧 백제라고 주장했다.

본기에 따르면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시기는 홍가 4년(기원전 17년)이라고 한다. 이를 놓고 보면 이는 혁거세나 동명왕의 시대보다 약 40년 뒤에 해당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에서 존재했다고 한 것은, 온조왕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이어진 것으로 보아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낙랑 출신 인물이 변한 땅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했던 일이 온조왕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도읍지가 낙랑 북쪽에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구룡산을 잘못 알고 변나산이라 불렀던 데에서 고구려를 변한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일 것이다. 대체로 옛 현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다. 최치원의 설명대로 오늘날 백제 땅에 변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변한이라고 부른 것이다. 백제가 융성했던 시절에는 인구가 무려 15만 2,300호에 달했다고 전한다. 

■ 진한 
후한서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에 도착하자 마한이 동쪽 지역 일부를 떼어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를 '도(徒)'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언어는 진나라 말과 거의 흡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 지역을 '진한(辰韓)'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한의 한 노인이 말한 내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한에는 1만 호 규모의 12개 작은 나라들이 존재했으며, 각 나라는 독립적으로 국가라 불렸다. 또, 신라 시대 학자 최치원은 진한이 본래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해 정착한 곳으로, 그들의 생활 근거지와 마을을 탁수(濯水)의 이름을 따라 '사탁(沙濯)'과 '점탁(漸濯)'이라 불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 전성기 때에는 수도에 총 17만8천9백36호가 있었으며, 1천3백60방과 55리로 이루어졌고, 35개의 부유한 대저택들이 존재했다. 이들 대저택은 각각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아남택(중복 표기),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교남택, 항질택,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및 정하택으로 불렸다.

 

■ 또 계절 따라 노니는 별장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에서, 여름에는 곡량택에서, 가을에는 구지택에서, 겨울에는 가이택에서 지내며 즐겼는데, 이를 사절유택이라 불렀다. 제49대 헌강왕 시절, 성 안에는 초가집이 단 하나도 없었으며, 집들의 처마와 담장이 이웃과 맞닿아 있었다. 거리에는 노랫소리와 피리 소리가 가득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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