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 신라 시조 혁거세왕 

옛 진한 땅에는 여섯 개의 마을이 있었다. 첫 번째 마을은 알천 양산촌으로,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담엄사가 이곳이다. 이 마을의 촌장은 알평이며, 그는 표암봉에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지며, 급량부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마을은 돌산 고허촌으로, 소벌도리가 촌장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형산에서 처음 내려와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현재 남사누라고 불리며,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의 남쪽 마을들이 이곳에 속한다고 한다.

세 번째 마을은 무산 대수촌으로, 촌장은 구례마이다. 처음 이산으로 내려왔다 하며, 점량부 혹은 모량부라 불리며 손씨의 고향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장복부로 알려져 있으며, 박곡촌과 같은 서쪽 마을들이 이에 포함된다.

네 번째 마을은 자산 지지촌으로, 촌장은 지백호라고 전해진다. 그는 처음 화산으로 내려왔으며,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현재는 통선부라 불리며, 시파 등의 남동쪽 마을이 포함된다. 최치원은 본피부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룡사 남쪽 미탄사 부근에 그의 집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번째 마을은 금산 가리촌으로, 촌장은 지타다. 그는 명활산에서 내려와 한기부 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가덕부로 불리며,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의 동쪽 마을이 포함된다.

여섯 번째 마을은 명활산 고야촌으로, 호진이 촌장이었다. 그는 금강산에서 내려와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임천부로 불리는데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 등의 동북 방향의 마을이 속한다고 한다.

위 기록에 따르면, 이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유리왕 9년에 여섯 부족의 이름이 개정되었고 각 부족에 여섯 성씨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오늘날 풍습에서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로 표현했으나 그 유래는 미상이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 여섯 부족의 지도자들은 알천 언덕 위에 모여 나라를 세우기로 의논했다. 당시 그들은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방자하다며 덕 있는 인물을 찾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 후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다 양산 아래 나정 근처에서 땅에서 빛이 나는 괴이한 광경을 발견했다. 한 백마가 꿇어 앉아 절하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자줏빛 알 하나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발견된 알은 이후 깨어져 한 사내아이가 탄생했다. 아이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동천에서 목욕시킨 뒤에는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까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아이에게 혁거세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위호는 거슬감이었다.

백성들은 이를 천자가 내려온 것으로 해석하면서 왕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에서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계집아이가 태어났다. 그녀는 모습이 고왔으나 입이 닭 부리처럼 생겼는데 북천에서 목욕시킨 후 부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알영이라 불렸다.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세워 두 성스러운 인물을 모시고 길렀다. 한 남자아이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이유로 그의 성을 박(朴)이라 지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그녀가 나온 우물에서 따서 알영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나이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오봉 원년 갑자에 남자아이는 왕이 되었고 여자아이는 왕후가 되었다. 이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 서벌, 또는 사라나 사로라고 불렀다.

처음 왕이 계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라를 계림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는 신령한 닭과 계룡의 상서로운 기운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다른 설에 따르면, 탈해왕 시기 김알지를 발견할 때 숲속에서 닭이 울었기에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바꿨다고도 한다. 이후에는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박혁거세가 61년간 나라를 다스린 후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며, 7일 뒤 그의 몸이 땅으로 흩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왕후 또한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함께 묻으려 했지만,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머리와 사지를 따로 나눠 안장하고 다섯 개의 무덤을 조성하여 이를 사릉(蛇陵)이라 불렀다. 이 무덤은 담엄사 북쪽에 있다. 이후 태자인 남해왕이 즉위하여 왕위를 이어받았다.


■ 제2대 남해왕 

남해거서간은 차차웅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존장"(높은 어른)을 뜻하는 칭호로, 오직 이 왕만이 차차웅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혁거세, 어머니는 알영부인, 왕비는 운제부인이다. 그는 전한 평제 원시 4년 갑자(A.D. 4년)에 즉위해 왕위를 이어갔으며, 21년이 지난 지황 4년 갑신(A.D. 24년)에 세상을 떠났다. 남해거서간은 삼황 가운데 첫째라고도 전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칭했는데 이는 진한어로 "왕"을 뜻한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귀인을 부르는 명칭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부르기도 했다. 김대문은 차차웅이 본래 무당을 뜻하는 방언이고, 무당이 귀신을 섬기며 제사를 중시하는 모습을 세상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그들을 존장으로 여겨 자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이사금이라는 칭호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임금을 뜻한다고 한다.

남해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노례는 왕위를 탈해에게 물려주려 하였다. 탈해는 이에 대해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들었다"며 서로 시험할 것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떡을 물어 시험을 치렀는데, 신라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왕을 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왕을 가리켜 마립간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김대문은 마립간을 서열을 나타내는 방언으로 풀이하며, "궐"(왕궁이나 신하의 집)이 위계를 따랐던 점에서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신라 왕 칭호에는 변천이 있었다. 거서간 및 차차웅이라 불린 이는 한 명, 이사금을 사용한 이는 열여섯 명, 마립간으로 불린 이는 네 명이었다. 신라 말기의 저명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집필하며 왕들을 단순히 "모왕(某王)"이라 부르고 거서간 등의 구체적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그 단어들이 혹시 촌스럽거나 낮게 들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도 보이나, 신라 역사를 기록하는 데 방언을 그대로 남기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신라인들은 추봉(죽은 뒤 의례적으로 봉해진)된 인물을 갈문왕이라 불렀지만 그 뜻은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남해왕 재위 시기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물러갔으며, 천봉 5년 무인년에 고구려 속국이었던 일곱 나라가 항복해 왔다.

  
■ 제3대 노례왕(유례왕)

박노례임금은 처음 왕위를 매부인 탈해왕에게 물려주었다. 그러자 탈해왕이 말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대개 이가 많다고 하니, 이를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더니, 박노례 임금이 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을 '이질금'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잇금'이라는 칭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노례임금은 유성공 경시 원년 계미년(23년)에 왕위에 올라 육부의 이름을 새로 정하고, 여섯 성씨를 하사하였다. 이 시기에 처음 도솔가를 지었으며, 도솔가에는 차사와 사뇌격이 포함되었다. 또한, 이 때부터 보습과 얼음창고, 수레를 처음 제작하기 시작했다. 
건호 18년(42년)에는 이서국을 공격해 멸망시켰으며, 같은 해 고구려 군사가 침범해 오기도 했다. 

  
■ 제4대 탈해왕 

탈해 이사금은 남해 왕 시절, 가락국 바다에 정체불명의 배 한 척이 닿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수로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을 동원해 북을 치고 소란을 일으켜 배를 머물게 하려 했지만, 배는 재빨리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의 아진포에 닿았다. 그때 근처 갯가에는 한 늙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진의선이며, 혁거세왕 시절부터 고기를 잡으며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녀는 배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원래 이 바다에는 바위가 없는데, 어찌하여 까치들이 모여 울고 있는 것인가?"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배를 끌어당겨 확인해보니, 까치들이 배 위를 덮고 있었고, 배 안에는 큰 궤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궤는 길이가 스무 자, 너비가 열세 자에 달하는 크기였다. 사람들은 그 배를 끌어서 나무숲 아래에 묶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알 수 없어 하늘에 고했다. 얼마 후 궤를 열어보니 잘생긴 사내아이가 있었으며, 궤 안에는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도 가득 실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7일 동안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자 소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원래 용성국 출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8명의 용왕이 존재했으며, 모두 여인의 태에서 나고 5-6세만 되어도 왕위에 올라 백성을 다스리며 성명(생명과 본성)을 바르게 인도하였습니다. 팔품의 성골이 있어 차별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왕 함달파께서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 왕비로 삼으셨지만 오랫동안 자식이 없으셨습니다. 결국 7년 기도 끝에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이는 고금에도 드문 일이었고 좋은 징조라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궤를 만들어 저를 그 안에 넣고,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와 함께 배에 싣고 바다에 띄워 보내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인연이 닿는 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가정을 이뤄라.’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며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말을 끝낸 뒤 지팡이를 짚고 종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 위로 올라갔다. 그는 돌로 집을 짓고 칠일 동안 머물며 성 안에서 살아갈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초승달 모양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발견했는데, 지형이 오래 살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그곳으로 내려가 확인해보니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는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근처 땅에 묻어두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그 집 문앞에 찾아가 말했다.

"이 집은 대대로 우리 선조의 집입니다."

호공은 이에 반박하며 자기 집이라고 했고, 두 사람은 결국 다투게 되었다. 논쟁이 끝나지 않자 관가에 이를 고하게 되었다. 관가에서 소년에게 물었다.

"그대의 집임을 어떤 증거로 말할 수 있는가?"

소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 선조는 대장장이였으나 잠시 이웃 고을로 떠난 사이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았습니다. 땅을 파 보면 제가 말한 증거가 나올 것입니다."

관가의 명령으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결국 집의 소유권은 소년에게 넘어갔고, 그는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이를 본 남해왕은 어린 소년 탈해가 비범한 지혜를 가졌음을 알고, 자신의 맏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게 했는데, 그녀가 바로 아니부인이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켰다. 백의는 물을 떠서 가져오던 도중, 자신이 먼저 마신 뒤에 탈해에게 주려고 했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그의 입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본 탈해가 크게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며 말했다.

"앞으로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제가 먼저 마시는 일이 없겠습니다."

그 말을 한 뒤에야 비로소 물그릇이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그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거짓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동악에 있는 한 우물을 사람들은 요내정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사건과 관련된 우물이다.

노례왕이 세상을 떠나자, 광호제 중원 6년(57년) 6월에 탈해는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과거 남의 집을 빼앗아 자신의 집으로 삼은 일 때문에 성을 석(昔)씨로 삼았다고 전한다. 다른 설에 따르면, 까치를 이용해 상자를 열게 한 일 때문에 까치(鵲) 자에서 새 조(鳥)를 떼어 석씨로 정했다고도 한다. 또한, 알을 깨고 나온 일로 인해 스스로를 탈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탈해는 왕위에 오른 지 23년째 되던 건초 4년(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소천구에 안장되었는데, 사후 신령이 나타나 "내 뼈를 조심히 묻어라"라고 명했다고 한다. 두개골의 둘레는 3자 2치, 몸 전체의 뼈 길이는 9자 7치에 달했으며, 이들은 모두 서로 긴밀히 엉켜 있었고, 치아도 하나로 이어진 듯 단단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이례적인 골격이었다.

훗날 이 뼈를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했지만, 또다시 신령이 나타나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의 뼈는 동악으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 김알지(탈해왕 代) 

영평 3년(60년) 8월 4일,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지나가던 중 시림 나뭇가지에 걸린 크고 밝은 빛을 발견했다. 그 빛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며 구름 속에서 황금 궤짝이 나타나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커다란 빛은 궤짝에서 뿜어져 나왔으며, 그 아래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이 기묘한 모습을 본 호공은 곧바로 왕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직접 숲으로 나가 그 궤를 열어보았다. 궤 안에는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처음엔 누워 있다가 금세 일어났다. 이는 혁거세의 고사와 흡사했기에 왕은 그 아이를 '알지'라 이름 지었다. '알지'는 우리말로 '아이'를 뜻한다. 왕은 아이를 품에 안고 궁으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새와 짐승들이 환희에 차 춤추고 뛰며 즐거워했다.

왕은 길일을 골라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양보하고 파사왕에게 물려주었다. 결국 그는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궤에서 나왔던 황금과 연관해 그의 성은 김(金)으로 정해졌다. 알지가 후손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아도는 수류를, 수류는 욱부를, 욱부는 구도를, 그리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 이렇게 신라의 김씨 가문은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 연오랑과 세오녀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158년에 동해의 바닷가에서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로 나가 해조를 따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일본에 도착한 연오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은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라며 그를 왕으로 삼았다. 

한편,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던 중,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던 바위에 올라타니, 그 바위가 세오녀를 싣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 왕에게 아뢰었고, 결국 연오와 세오녀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오녀는 귀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 즈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일관이 왕에게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러한 변고가 발생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연오와 세오녀를 찾았고, 연오는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함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대신, 나의 아내가 만든 고운 명주천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연오는 그 명주를 사신에게 건넸다. 

사신이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명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결과 해와 달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후 임금은 이 비단을 창고에 소중히 보관하며 국보로 삼았고, 창고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명명했다.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장소는 영일현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불리게 되었다.

  
■ 미추왕과 죽엽군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대손으로, 대대로 번영을 이루었으며 덕망이 두터웠다. 이러한 배경으로 첨해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고,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능은 홍륜사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제14대 유례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신라를 공격해 왔다. 신라는 군병을 동원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적과의 장기 대치가 쉽지 않았다. 그때 정체불명의 군사가 나타나 신라를 돕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물리쳤으며, 결국 적의 잔병마저 퇴각시켰다.

전쟁이 끝난 뒤, 그 기이한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추왕 능 앞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신라인들은 선왕 미추왕이 은덕으로 나라를 도왔음을 깨달았다. 이후 이 능은 죽현능이라 불리게 되었다.

제37대 혜공왕 시절, 대력 14년(779년) 4월에 갑자기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바람 속에는 준마를 탄 장군 같은 인물이 보였고, 갑옷과 무기를 갖춘 40여 명의 병사가 그를 따라 죽현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리는 목소리는 이렇게 호소하였다.

"저는 평생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데 힘써왔습니다. 재앙을 없애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경술년에 아무 죄 없는 제 후손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으니, 이제는 멀리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려 합니다. 부디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답했다.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아무 말 말고 예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은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왕은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이내 사라졌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두려움을 느껴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유신공의 묘를 찾아가 사죄하게 했다. 또한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내려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만약 미추왕의 혼령이 나서지 않았다면 김유신공의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에 신라인들은 미추왕의 덕을 기려 삼산과 함께 제사를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의 위상을 오릉 위에 두어 대묘라 불렀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