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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 4. 내물왕 ~ 선덕왕,진덕왕,김유신


■ 내물왕과 김제상 

제17대 내물왕 재위 36년(서기 390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 전하기를,  
"우리 임금께서는 대왕의 신성함에 대해 전해 듣고, 신을 보내 백제의 죄를 상세히 아뢰도록 하였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왕자 한 분을 보내 주시어 우리 임금께 그 성의를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내물왕은 셋째 아들 미해를 왜국으로 보냈는데, 당시 미해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다. 아직 말과 행동이 서툴렀기 때문에 왕은 내신 박사람을 부사로 임명하여 함께 보내었다. 그러나 왜왕은 이들을 억류하였고, 무려 30년 동안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눌지왕 3년(서기 419년), 고구려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는 대왕의 아우 보해가 지혜롭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와 가깝게 지내기를 소망하셨습니다. 이에 신을 보내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눌지왕은 기뻐하며 이를 계기로 화친을 맺기로 하였고, 동생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가도록 지시했다. 이때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지정하여 동행케 하였다. 그러나 장수왕 역시 보해와 김무알을 억류하고 그들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눌지왕 10년(서기 426년), 왕은 여러 신하와 나라의 의로운 인물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 술잔이 세 순배 돈 후 음악이 울려 퍼지자, 왕은 눈물을 흘리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옛날 선왕께서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들 미해를 먼 동쪽 땅으로 보냈지만 끝내 다시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웃 나라의 강한 군사력으로 인해 전쟁이 끊이지 않았소. 그러던 중, 고구려가 화친을 제안했길래 그 말을 믿고 아우 보해를 보냈다오. 그러나 고구려마저도 아우를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으니, 비록 내가 지금 부귀를 누리고 있더라도 두 아우를 생각하며 울지 않은 날이 없었소. 만약 두 아우를 다시 만나고 선왕의 사당에서 함께 예를 올릴 수 있다면, 나는 온 나라 백성들에게 그 은혜를 갚게 될 것이오. 과연 이 일을 이룰 방도를 마련할 자가 누구겠소?"

이를 듣고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오니, 반드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자가 필요합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삽라군 태수 제상이 적임자라 생각됩니다."

이에 왕은 제상을 불러 물었고, 제상은 두 번 절하며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 임금께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하여야 하고, 임금께 모욕이 닥치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 하였습니다. 만일 일이 어렵고 쉬움을 따져 행한다면 이는 충성이라 할 수 없으며, 죽음과 삶을 계산하여 움직이는 것은 용맹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부족하지만 명을 받들어 실행하겠습니다."
왕은 그를 매우 아끼며 술잔을 나누고 손을 잡아 작별 인사를 나눴다. 제상은 왕 앞에서 명을 받은 뒤 곧바로 북해로 떠났다. 변복을 마친 후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함께 도망갈 날짜를 약속한 뒤 먼저 고성의 수구에 도착해 배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약속한 날이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핑계로 며칠간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밤을 틈타 몰래 빠져나와 고성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군사 수십 명을 보내 그를 추격하게 했다. 고성에 이르러 추격이 바짝 다가왔지만,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 좌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많아 군사들조차 그를 불쌍히 여겼다. 군사들은 화살촉을 제거한 채 활을 쏘아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추격을 끝냈다.

눌지왕은 무사히 돌아온 보해를 보고 미해를 떠올렸다.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온 왕은 눈물을 흘리며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몸에 한쪽 팔만 있는 듯하고 얼굴에 한쪽 눈만 있는 것 같으니, 하나는 얻었으되 하나는 잃은 셈이다.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들은 제상은 두 번 절을 하고 바로 율포 바닷가로 떠났다. 그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그를 쫓아갔지만, 제상은 이미 배에 올랐다. 아내가 간절히 그를 불렀으나 그는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제상은 결국 왜국에 도착해 거짓말로 자신을 위장했다.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는 제 형제를 죽였기에 저는 도망쳐 온 것입니다.”

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마련해 주며 편히 머물도록 했다. 그곳에서 제상은 종종 미해와 해변으로 나가 유유자적 시간을 보냈다. 물고기, 새, 짐승 등을 잡아 왜왕에게 바쳤고, 왜왕은 크게 기뻐하며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가운데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떠나셔야 합니다.”

그러자 미해는 함께 가자고 말했지만 제상은 이를 거절하며 답했다.

“제가 공과 함께 떠난다면 왜국의 배들이 뒤를 쫓을 겁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 뒤따라오는 것을 막겠습니다.”

미해는 슬퍼하며 말했다.

“지금 나는 그대를 형제처럼 생각하는데, 어찌 나 혼자만 돌아가겠소?”

그러나 제상은 태연히 대답했다.

“전하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남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는 술을 따르며 미해에게 건넸다.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을 때, 미해와 함께 호송 임무를 맡게 되었다. 미해를 떠나보낸 후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 이튿날 아침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미해를 모시던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려 했으나, 제상이 그들을 막으며 말했다. 

"미해공께서 어제 사냥으로 매우 피곤하셔서 쉬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이 진실을 밝히며 말했다. 

"미해공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떠나셨습니다."

미해공의 수행원들은 즉시 왜왕에게 달려가 이를 보고했고, 왜왕은 기병을 보내 추격하게 했으나 끝내 잡히지 못했다. 분노한 왜왕은 제상을 가두고 추궁했다.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보내버렸느냐?"

제상은 담담하게 답했다. 

"나는 계림의 신하일 뿐, 왜국의 신하는 아닙니다. 우리 임금의 뜻을 따랐을 뿐이니, 이 일을 어찌 당신께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왕은 격분하며 말했다.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면서도 감히 계림의 신하라 말하다니! 그렇다면 네게 오형(다섯 가지 중형)을 벌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왜국의 신하임을 인정하면 후한 보상을 내리겠다."

그러나 제상은 단호하게 답했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습니다. 또한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부귀는 바라지 않습니다."

왜왕은 크게 화를 내며 제상의 발가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만들었다. 그 후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냐?"

이에 제상은 변함없이 답했다. 

"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마지막으로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제상을 세우며 계속하여 물었으나, 제상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끝내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목도라는 섬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한편, 미해는 바다를 건너 다다른 곳에서 강구려를 통해 계림에 이 소식을 전했다. 놀라움과 기쁨에 사로잡힌 눌지왕은 백관들에게 명령하여 굴헐역에서 미해를 맞이하게 했으며, 직접 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로 나아가 환영했다. 이후 궁궐로 초대해 잔치를 열고, 큰 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했다. 

눌지왕은 충정과 희생을 기린다는 의미로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으로 봉하고, 그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이렇게 논평하기도 했다. 

"옛날 한나라 신하 주가는 영양 땅에서 초나라 군에게 붙잡혔을 때, 항우가 만호후로 봉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번 제상의 죽음도 그에 못지않은 충절이라 할 만합니다."

제상이 떠날 때 그의 아내는 뒤따라갔지만 이를 쫓지 못하고 망덕사 문 앞 남쪽 모래밭에서 주저앉아 통곡하며 울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곳은 장사(長沙)라 불리게 되었다. 친척 두 사람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아내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으며 땅에 머물렀다. 이후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 이름 붙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부인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끝내 슬픔을 이기지 못한 부인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신모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녀를 기리는 사당이 존재한다.

  
■ 제18대 실성왕 

의회 9년 계축년에 평양 지역에 큰 다리가 완공되었다. 당시 왕은 선왕의 태자인 눌지가 뛰어난 덕을 지닌 인물임을 알고 이를 경계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고구려의 군대를 불러들여 눌지가 그들을 맞이하도록 꾸몄는데, 고구려 군사들은 눌지의 어질고 훌륭한 행동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결국 그들은 창을 위로 들고 실성왕을 제거한 뒤 눌지를 왕위에 올리게 되었다.

  
■ 거문고 갑을 쏘다 (사금갑 射琴匣)

제21대 비처왕(소지왕) 재위 10년인 488년에 왕은 천천정으로 행차하였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어디선가 나타나 울었고, 특히 쥐는 사람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시오."

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에게 명령하여 까마귀를 쫓아가게 하였다. 신하가 남쪽의 피촌에 도착했을 때 돼지 두 마리가 격렬히 싸우는 모습을 목격했다. 신하는 그 장면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까마귀를 따라간 방향을 잊고 말았다.

그 즈음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서 글월 하나를 올렸다. 그 겉봉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신하가 이를 왕에게 가져가 바치니, 왕은 봉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단 차라리 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

그러나 이를 듣던 일관이 나서 말하였다. 
"두 사람은 서민을 뜻하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이를 옳게 여기고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거문고 갑(甲)을 쏘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은 즉시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활로 쏘았다. 그러자 거문고 속에서 내전에서 분향수도를 하던 승려가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즉시 처형되었다.

그 사건 이후 나라의 풍습으로 해마다 정월의 상해일(上亥日), 상자일(上子日), 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는 관례가 생겼다. 이 날에는 감히 움직이는 것을 조심하며, 특히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여 찬밥으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이어졌다. 이 관습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 풍습을 "달도(達忉)"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기하고 경계한다는 뜻이다. 또한, 늙은이가 나타났던 그 못은 "서출지(鼠出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 지철로왕 

제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였으며,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 불렸다. 그의 시호는 지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시호를 사용하는 관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왕을 우리말로 마립간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왕은 영원 2년(500년)에 왕위에 올랐다.

지철로왕은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혼인을 맺기가 어려웠다.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에 달했기 때문에 배필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사자를 세 개의 지방(삼도)에 파견하여 적합한 배필을 찾도록 명령했다. 어느 날, 사자가 모량부에 이르렀을 때 동로수 아래에서 두 마리 개가 북만 한 크기의 똥덩어리를 양쪽에서 물고 다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사자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한 소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던 중 숲속에서 눈 여기에 떨어트린 것입니다."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확인하니, 소녀의 키가 무려 일곱 자 다섯 치에 달했다. 이를 왕에게 고하자, 왕은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황후로 삼았고, 여러 신하들은 모두 이를 축하하였다.

또한, 왕의 치세 중 동해안에서 순풍으로 이틀 거리인 곳에 우릉도가 있었다. 이 섬은 둘레가 2만6730보에 달했으며, 섬 주민들은 바닷물의 깊이에 의지해 교만하게 굴며 신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라고 명했다. 신라의 장군인 박이종(이사부)은 나무로 만든 사자를 이용해 섬 주민들을 위협하며 말했다.

"너희가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풀어 놓겠다."

이에 섬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항복했고, 왕은 박이종에게 포상을 내리고 그를 해당 지역의 관리인 주백으로 삼았다.

  
■ 진흥왕 

제24대 진흥왕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 갈문왕의 부인이었다. 왕은 생을 마감할 때 머리를 깎고 승려의 옷을 입은 채 최후를 맞이하였다.

553년(승성 3년) 9월, 백제의 장수 조사가 진성을 침략하여 신라 백성 남녀 3만 9천 명과 말 3천 필을 약탈해 갔다.

그보다 앞서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이에 진흥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어찌 내가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는가.

왕의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자, 고구려는 크게 감동하여 신라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며 공격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 도화녀와 비형랑 

제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이며 성은 김씨이다. 왕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이었다. 대건 8년(576년)에 왕위에 올라 4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나, 주색에 빠져 음란과 방탕한 정사로 인해 백성들의 신뢰를 잃고 결국 폐위되었다.

그보다 앞서, 사량부의 한 민가에서는 얼굴이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사람들이 그녀를 도화랑이라 불렀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욕심을 채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도화랑은 단호히 말하였다.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는 한 남자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미 남편이 있는 제가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은 하늘의 위엄으로도 허락되지 않을 일입니다."

이에 왕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녀는 흔들림 없이 답하였다.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할지라도 제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왕은 희롱하듯 물었다.

"그럼 만약 너의 남편이 없어진다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도화랑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그렇다면 가능하겠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 해, 왕이 폐위되고 죽음을 맞았으며, 2년 후 도화랑의 남편 역시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밤, 왕의 혼령이 도화랑의 방에 나타나 말했다.

"너는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이제 남편이 없으니 나와 함께 할 수 있겠느냐?"

도화랑은 쉽게 대답하지 않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부모는 말했다.

"임금의 말인데 어찌 이를 피할 수 있겠느냐."

결국 도화랑은 왕의 혼령과 함께 지냈고, 7일 동안 늘 오색 구름이 집을 덮었으며 방 안은 향기로 가득했다. 7일 후, 왕의 형체는 홀연히 사라졌고, 그 후 도화랑은 임신하였다. 시간이 지나 해산할 때 천지가 진동하며 한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그의 이름을 비형이라 지었다.

당시 진평대왕은 이 기이한 소문을 듣고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와 키웠다. 비형이 15세가 되자 왕은 그에게 집사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은 밤마다 멀리 나가 놀곤 했는데, 왕은 용사 50명을 시켜 그를 지키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월성을 넘어 서쪽 황천 언덕 위에서 귀신들과 어울렸다. 용사들은 숲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귀신들이 새벽 종소리와 함께 흩어질 때, 비형 또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왕께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귀신 무리를 거느리고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아 보아라."

비형은 명령에 따라 귀신들을 모아 돌을 다듬어 하룻밤 만에 큰 다리를 완성하였다. 이 다리는 "귀신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왕은 다시 물었다.

"귀신 무리 중에서 인간으로 나타나 조정을 도울 자가 있느냐?"

비형은 대답하였다.

"길달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라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에 왕은 길달을 데려오도록 명했고, 다음 날 비형은 길달을 데리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길달은 집사 벼슬을 받았으며 충직하기로 유명해졌다. 당시 각간 임종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왕은 명하여 길달을 그의 아들로 삼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령하여 홍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했다.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에 가서 잠을 자곤 했기에 사람들은 그 문을 '길달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자 비형이 귀신의 무리를 시켜 그를 붙잡아 죽였다. 이 일로 인해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며 달아나곤 했다. 당시 사람들은 한 구절의 글을 남겨 이렇게 말했다. 

'성스러운 제왕의 혼이 아들로 태어나니, 이곳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 뛰는 잡귀의 무리들은 감히 이곳에 머물지 말지어다.'  

이 문구를 향 속에 붙여, 잡귀를 쫓아내는 데 사용하였다. 

  

■ 하늘이 내려 준 옥대 (天賜玉帶)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며, 성은 김씨다. 대건 11년(579년) 8월에 왕위에 오른 그는 키가 무려 11척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내제석궁에 행차 중, 석제(돌로 된 계단)를 밟자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이에 왕은 좌우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돌은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냥 두어라. 후세 사람들이 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돌은 이후 성 안에 전해지는 다섯 개의 '부동석' 중 하나가 되었다. 

즉위 원년, 궁전 마당에 천사가 내려와 말하기를,  
"상제가 명을 내려 이 옥대를 왕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왕은 직접 무릎을 꿇고 옥대를 받았고, 천사는 곧 하늘로 돌아갔다. 왕은 교묘(나라에 큰 제사를 지낼 때)에 이를 허리에 두르고 참석하곤 했다. 

한편, 이후 고려왕이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우며 물었다. 
"신라에 있다는 세 가지 보물이 무엇이기에 침범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때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이며, 진평왕의 처사옥대가 셋째입니다."
고려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신라 공격을 포기했다. 

이에 찬사를 덧붙인다. 

구름 너머 하늘이 내려준 긴 옥대는  
왕의 위엄과 잘 어울리네  
우리 임금의 몸이 이토록 무거운지라  
다음번 섬돌은 쇠로 만들어야 하리. 


  
■ 선덕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 (知幾三事)

제27대 왕인 덕만의 시호는 선덕왕으로, 김씨 성을 가졌으며 아버지는 진평왕이었다. 그녀는 정관 6년(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미래를 꿰뚫은 세 가지 예지를 남겼다.

첫 번째는 당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온 일이었다. 선덕왕은 그림을 보고 말하길,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 했다. 씨앗을 뜰에 심었고,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왕의 말처럼 향기가 없었다.

두 번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 계속 울어댔던 사건이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백성들이 왕께 보고하자, 왕은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 등에게 명령하여 정병 2천 명을 뽑아 서교로 급히 나가게 했다. 그녀는 여근곡을 수색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각간들은 각각 1천 명씩 병사를 이끌고 서교로 향했고, 부산 아래 여근곡에서 백제 군사 500명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백제 군사를 모두 처단하며 한 사람도 놓치지 않았고, 백제 장군 오소란은 남산 고개 바위 밑에 숨어 있었으나 포위해 활로 쏘아 죽였다.

세 번째는 아무 병도 없는 상태에서 왕이 신하들에게 자신이 어느 해의 어느 날 죽게 될 것이며, 도리천 속에 장사를 지내달라고 말했다. 신하들이 그 위치를 묻자, 왕은 "낭산 남쪽이다."라고 답했다. 왕이 말한 그 해와 날에 실제로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그녀를 묻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 아래 세웠는데, 이는 불경에서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기록된 것과 일치했다. 이 일을 통해 신하들은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운 지혜를 깨닫게 되었다.

신하들은 왕이 죽기 전에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그러한 일들을 예측했는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에 선덕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림 속 꽃에 나비가 없었던 이유로 나는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고, 이는 당나라 황제가 나에게 배우자가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또한 울던 개구리들은 노한 병사의 형태이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뜻한다. 여자는 음(陰)이며, 음의 색은 백색이고 백색은 서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적병이 서쪽에 숨어 있음을 알았다. 여기에 더하여 남근이 여성 생식기에 들어갈 경우 죽음에 이르듯이 적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신하들은 왕의 성스러움과 지혜에 감탄했다. 당 태종이 보내온 세 가지 색의 모란꽃 또한 선덕, 진덕, 진성 세 여왕으로 이어지는 왕위를 의미했으며, 이는 당나라 황제 또한 많은 것을 헤아리고 밝게 통찰했음을 보여준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여러 사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으며, 별기에서는 왕 시절에 돌로 첨성대를 쌓았다고 전하고 있다.

  
■ 진덕왕 

제 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한 후, 친히 태평가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를 태옆가로 수놓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를 바치게 하였다. 비단을 짜고 무늬를 넣어 보냈다는 사실로 보아, 이는 단순히 군사를 요청하기 위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진덕여왕 시기에 일어난 일로, 당시 김흠순의 석방을 요청하던 때의 일로 여겨진다. 태평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큰 당나라가 왕업을 일으키니  
장엄한 황제의 계획이 번성하도다. 
전쟁이 멈추어 천하를 평정하고  
문무를 고루 갖춰 백왕의 뜻을 이었구나. 
하늘을 품으니 비를 내려 만물을 이롭게 하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며 선한 뜻을 품었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으며  
돌아오는 운수는 우임금과 당요보다 뛰어나다. 
깃발은 휘날리고 북소리는 웅장하네. 
외부의 이민족이 황제의 명을 거역하면  
칼 앞에 엎드려 천벌을 받을지어다. 
순박한 풍속이 드러나니 먼곳과 가까운 곳에서 상서로움을 바치네. 
사계절의 기후는 옥처럼 화합하며  
해와 별빛이 온 세상을 비추도다. 
산악의 기운은 성현을 낳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청렴한 신하들에게 국사를 맡겼네. 
오제와 삼황이 덕으로 나라를 이루었으니  
우리 당나라의 황도가 밝게 빛나리라.

진덕여왕 시절,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 등의 대신들이 나라의 일을 논하기 위해 남사나에 있는 오지암에 모였다. 이때 대호 한 마리가 모임 가운데로 뛰어들자, 여러 대신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알천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웃으며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내리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렇게 강해 대신들 사이에서 수석으로 자리 잡았으나, 대신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더 크게 존경을 품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대신들이 이곳에 모여 의논할 경우 반드시 일이 이루어졌다. 신령스러운 땅 네 곳으로는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오지산, 서쪽의 피천, 북쪽의 금강산이 있었다. 

진덕여왕 시기에는 설날 아침에 조례를 행하는 전통이 처음 마련되었으며, 또한 관직명인 시랑이라는 칭호가 이때에 처음 도입되었다.

  
■ 김유신 

호력 이간의 아들인 서현각간 김씨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다. 그의 장남은 유신이고, 막내아들은 흠순이었다. 장녀는 보희로 어릴 적 이름은 아해였으며, 둘째 딸은 문희로 어릴 때는 아지라 불렸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년)에 태어났으며, 탄생 당시 하늘의 기운을 받아 등에 칠성 모양의 무늬가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이 많았다.

유신공은 18세 되는 해인 임신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되었고, 이때 백석이라는 인물이 함께 있었다. 백석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나, 오랫동안 낭도의 무리에 속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 무리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기 위한 계획을 밤낮으로 모의했는데, 백석이 이를 낭에게 제안하며 말했다.

"제가 공과 함께 고구려나 백제에 잠입해 정탐한 후에 일을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낭은 이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백석과 밤길을 떠났다. 그러던 중 고개 위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여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낭과 여인은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과자를 받아 먹고는 서로 마음을 열어 담소했다. 그 과정에서 여인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기를 원하며 말했다.

"공께서 말씀하신 것은 알겠지만, 백석을 잠시 두고 저와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가신 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여인들은 갑자기 호국신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들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공을 유인하려 하고 있지만, 공은 이를 모르고 있기에 우리가 막으러 왔습니다."

이를 들은 낭은 크게 놀라 두 번 절을 한 뒤 정신을 가다듬고 골화관에 머물렀다. 이후 백석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전했다.

"지금 다른 나라로 떠나기 전에 중요한 문서를 놓고 왔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가져오자."

낭은 집으로 돌아와 백석을 심문하며 일을 캐물었다. 이에 백석은 자신의 본래 신분을 밝히며 말했다.

"저는 원래 고구려 사람입니다. 고구려에서는 유신공을 원래 고구려 점장이었던 추남이라 여겨왔습니다. 어느 날 고구려의 국경에 흐르던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일이 생겨 왕께서 이를 점치게 했습니다."

추남은 왕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대왕비께서 음양의 도리를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과 왕비 모두 크게 놀랐고, 왕비는 추남을 요사스러운 자로 여겨 시험할 필요가 있다며 주장했다. 쥐 한 마리를 상자에 넣고 물으며 "이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자, 추남은 대답했다.

"상자 안에는 쥐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끼가 일곱 마리 더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거짓이라 여긴 왕은 그에게 죄를 씌워 처형하려 했다. 죽음을 앞둔 추남은 이렇게 말하며 맹세를 남겼다.

"제가 죽어 대장이 되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습니다.“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본 결과, 안에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었고, 그제야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타났다. 이에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봤더니 모두가 "추남이 맹세를 하고 죽더니 과연 그러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나를 보내어 이곳에 와 이 같은 계획을 꾸미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공은 즉시 백석을 죽이고 각종 음식을 준비해 삼신께 제사를 올렸다. 삼신이 현신하여 이를 흠향하니 모두 감탄스러워하였다.

김 씨 댁의 재매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청연 상곡에 제사를 지내고 재매곡이라 이름 붙였다. 매년 봄철이면 그 집안의 남녀들이 골짜기의 남쪽 시내가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이때 골짜기 안은 만발한 백 가지 꽃과 송화 가루가 숲을 가득 채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골짜기 어귀에는 암자를 짓고 송화방이라 불렀으며, 뒤이어 이를 원찰로 삼았다.

제54대 경명왕 때에는 공의 공적을 기려 흥호대왕으로 추봉하였다. 그의 능은 서산 모지사 북쪽, 동쪽으로 뻗은 봉우리 위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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