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종 춘추공
제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성은 김씨이다. 그는 용수 각간으로 추증된 문흥대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부인은 문명황후 문희로, 바로 유신공의 막내누이였다.
문희의 언니 보희가 어느 날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서울 전역에 가득 차는 꿈이었다. 다음 날 보희는 이 꿈 이야기를 문희에게 들려주었다. 문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말했다.
"내가 그 꿈을 살게요."
보희가 "무엇을 줄 건데?"라고 묻자, 문희는 "비단치마를 드리면 되겠지요"라고 응대했다. 이에 보희는 "좋다" 하고 승낙하였다.
문희는 치마폭을 벌리고 꿈을 받을 준비를 했고, 보희가 "어젯밤의 꿈을 너에게 준다"고 말하며 꿈을 넘겼다. 문희는 이에 대한 대가로 비단치마를 보희에게 주었다.
10일 후, 유신은 정월 초닷새 아침에 춘추공과 함께 자기 집 앞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공의 옷자락을 밟아 고름이 떨어지게 한 뒤 말했다.
"집에 들어가서 옷고름을 매도록 하시지요."
춘추공은 유신의 요청을 따랐다. 집에 들어온 후 유신은 하녀에게 고름을 달아줄 것을 명했지만, 하녀는 이를 거부하며 말했다.
"어찌 사소한 봉침 일로 귀한 공자와 가까워질 수 있겠습니까?"
이에 유신은 다른 하녀 아지에게 명령했고, 이 과정에서 춘추공은 유신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는 문희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자주 방문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유신은 누이 문희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질책하며 말했다.
"네가 부모님도 모르게 임신한 것이 무엇 때문이냐?"
그리고는 이를 온 나라에 알리겠다고 나서며,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으로 행차한 틈을 이용해 유신은 뜰에 나무를 가득 쌓아 불을 지르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왕이 먼발치에서 연기를 보고 그 이유를 묻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답했다.
"유신이 누이를 불태워 죽이는 것 같습니다."
왕이 그 이유를 다시 묻자 신하들은 대답했다.
"범부도 없이 몰래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문득 춘추공이 왕의 곁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이를 알아챈 왕이 말했다.
"이것은 너의 소행이니 곧 가서 살리도록 하여라."
춘추공은 왕명을 받들고 곧바로 말을 달려 유신에게 가서 처형을 멈추게 했다. 이렇게 상황이 해결된 후, 그는 문희와 떳떳하게 혼례를 올렸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 5년(654년)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나라를 다스린 지 8년째 되는 용삭 원년(661년)에는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59세였다. 왕은 애공사 동쪽에 안장되었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이 세워졌다.
태종왕은 김유신과 함께 기지와 강력한 힘을 발휘해 삼국을 통일하고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웠다. 그 공로로 인해 묘호를 태종이라 공식적으로 정하였다.
왕의 적자들로는 태자인 법민과 각간 인문, 문왕, 노저, 그리고 지경과 개원이 있었는데, 모두 왕비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다. 이들은 태어날 당시부터 나라의 미래를 상징하는 계시적인 꿈이나 징조들로 주목받았다. 한편 서자로는 개지문 급간, 차득 영공, 마득 아간이 있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딸까지 합하면 모두 다섯 명이 되었다.
그는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식사로 즐겼으나,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부터는 점심을 중단하고 아침과 저녁만을 먹었다. 그러나 하루 식량 소비량을 계산해 보면 여전히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그리고 꿩 열 마리였다고 한다. 당시 성안에서는 물가가 안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베 한 필의 가치가 벼 30석 내지 60석에 달했으며, 사람들은 이를 들어 왕의 통치 시대를 '성군의 시대'라고 칭송했다.
춘추공이 태자였던 시절, 그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러 갔다. 이때 당 황제는 그를 보고 풍채가 출중하며 신성한 인물이라 칭찬하며 사위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귀국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덕왕 2년의 일로, 당국은 그와의 군사적 동맹을 약속했다고 한다.
한편, 백제의 최후 군주인 의자왕은 호왕의 아들로 출중한 영웅성과 용맹함,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 간의 우애로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해동 증자'라 부르며 기렸지만, 그가 정관 15년(신축) 왕위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색에 빠져 국정이 혼란에 빠지고 나라가 위기에 몰렸다.
이에 좌평 성충은 간곡히 간언하며 왕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의자왕은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옥살이 중 여위어 죽어가는 처지에서도 성충은 마지막으로 상소를 올려 말하길,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머지않아 큰 변란이 있을 것입니다. 군사를 운용할 때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야 합니다. 상류에서 적에 대비한다면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온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수군은 기벌포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입니다. 험준한 곳에서 적을 방어한다면 나라는 안전할 것입니다"라고 충언하였다. 그러나 왕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경 4년(659년), 백제의 오회사에서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시간을 돌아다녔다. 같은 해 2월에는 많은 여우 무리가 의자궁에 들어왔고, 그중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는 일이 발생했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는 이변이 일어났으며, 5월에는 사비수 언덕 위에서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큰 물고기가 발견되어 죽었다. 그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고, 밤에는 귀신이 궁의 남쪽 길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660년 2월에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해버렸고, 서해 바닷가에서는 많은 물고기들이 죽어 떠올랐으나, 백성들은 이를 먹을 수 없었다. 같은 시기 사비수의 물마저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어 4월에는 수만 마리의 개구리들이 나무 위로 몰려들었고, 서울 시민들 중 일부는 이유도 없이 놀라 달아나다가 갑작스럽게 자빠져 죽는 일이 백 명 이상 발생했다. 또한 많은 이들의 재물이 사라지는 혼란스러운 상황도 이어졌다.
6월에는 왕흥사의 승려들이 큰 물결을 따라 절 안으로 배가 들어오는 듯한 광경을 목격했고, 사슴과 비슷한 모습의 큰 개가 들판에서 사비수 언덕까지 나타나 왕궁을 향해 짖고 울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이후 궁 안에 귀신 하나가 나타나 큰 소리로 외쳤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그 말을 남기고 귀신은 땅속으로 사라졌고, 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땅을 파보도록 명령했다. 땅을 세 자 정도 파자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 등에 새겨진 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백제는 온달(滿月)이고 신라는 초승달(新月)이다."
왕은 무당을 불러 물었고, 무당은 이렇게 답했다.
"온달은 차오른 달이니 곧 기울 것이고, 초승달은 아직 다 차지 않았으니 점차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화가 나서 무당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다른 신하가 말하기를,
"온달은 가득 찼으니 이는 번영을 뜻하고, 초승달은 아직 약하니 쇠약함을 뜻합니다. 살펴보건대 이는 우리 국가가 점점 더 번창하고 신라는 점점 더 약해질 것이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왕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백제에 이어지는 괴변 소식을 전해 듣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5년(660년)에 김인문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당나라 고종은 좌호위대장군 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 행군총관으로 임명하고, 좌위장군 유백영 및 좌호위장군 방효공 등 주요 인사를 이끌어 13만 대군과 함께 출정하도록 했다. 더불어 신라군과 협력하게 하기 위해 춘추(훗날 문무왕)를 우이도 행군총관으로 임명하고 김유신에게 병사 5만 정예군을 이끌고 합세하도록 지시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자, 신라 왕은 김유신에게 정예 병사 5만을 이끌고 가도록 명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제의 의자왕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병법과 대처 방안을 물었다.
좌평 의직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당나라의 군사는 먼 바다를 건너와 피로할 것이며, 수전에 익숙지 않습니다. 또한 신라군은 당나라라는 강한 지원군이 있다는 점에 기대어 경솔히 행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우리가 당나라 병사의 약점을 먼저 파악하여 일전을 벌인다면, 그들은 두려워하여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 상영 등은 이에 반대하며 말했다.
"그 의견은 옳지 않습니다. 당군은 먼 길을 달려온 탓에 서둘러 전투를 끝내려 할 것이니, 그들의 첫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신라군은 이전에 우리 병사들에게 패배했던 경험이 많아 이미 강한 두려움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린 후, 우선 일부 병력으로 신라군의 사기를 꺾는 것이 더 나은 계책입니다. 이후 적절한 기회를 엿보아 최후의 결전을 벌이면 불필요한 희생 없이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여러 의견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이때 좌평 흥수가 죄를 지어 고마비지현으로 유배된 상태였으나, 왕은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흥수는 이렇게 답하였다.
"제가 보기에 좌평 성충의 의견이 가장 타당합니다."
하지만 대신들은 흥수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죄를 받은 자로서 왕에게 원망을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대신 당군이 백강으로 내려오더라도 이를 저지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의 좁은 길로 내려올 때 진형을 흐트러트리면 됩니다. 그 순간 병력을 투입하여 기습한다면, 이는 닭장 속 닭이나 그물 속 물고기를 잡는 격이 될 것입니다."
왕은 이를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 신라군과 당나라 병사는 이미 백강과 탄현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왕은 장군 계백에게 결사대 5천 병력을 맡겨 황산으로 가 적진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병력이 부족해 패하고 전사하였다.
당군과 신라군은 연합하여 진격했고, 진구에 이르러 강가에 군사를 배치했다. 이때 갑작스레 한 마리 새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맴돌자 그의 군사들은 이를 불길하게 여겼다. 점괘는 "앞으로 반드시 적장에게 불운이 닥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소정방은 두려워하며 전투를 주저하였으나, 김유신이 나서 설득하였다.
"날아다니는 새 따위에 의존하여 하늘의 섭리를 거스른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하늘의 뜻에 부합하고 백성의 마음에 순응하며 악행을 저지른 자를 바로잡는 것이 올바른 길 아닙니까? 어찌 주저한단 말입니까?"
김유신은 즉시 신검을 뽑아 새를 겨눈 뒤 베어냈고, 새는 갈기갈기 찢겨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은 용기를 되찾아 군사를 이끌고 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가 산을 등진 채 진을 치고 백제 군사를 공격하였다. 백제군은 대패하였으며, 당나라 군사는 조류에 따라 배를 이어 북소리와 함성을 내며 공격해왔다.
결국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진격해 약 30리 지점에 진을 쳤다. 이때 성 안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해 맞섰으나 거듭 패배하여 전사자가 만여 명에 달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승세를 몰아 성을 압박하자, 백제의 왕은 더 이상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내가 어찌 성충의 충언을 듣지 않고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왕은 결국 태자 융과 함께 북쪽의 비산으로 도피했다.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성을 포위하자, 남아있던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성을 굳게 지키며 저항했으나 문제가 발생했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숙부인 태에게 말했다.
"왕께서 태자와 함께 성을 떠나셨는데, 숙부께서 마음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다면, 우리는 과연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문사는 말이 끝난 뒤 자신의 좌우 측근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에 백성들도 그를 따라 움직였으나, 태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소정방은 군사를 시켜 성벽을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태는 사태가 급박해짐을 느끼고 스스로 성문을 열어 항복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왕과 태자 융, 둘째 아들 태, 대신 정복을 비롯한 여러 성의 지도자들이 모두 항복하게 되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다른 왕족 연 및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을 포로로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한편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에 인구가 76만 호에 달했으나, 패망 후 당나라는 여기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의 다섯 도독부를 설치하고 관리들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 낭장 유인원에게는 도성을 지키게 하였고, 좌위랑장 왕문도는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다스리며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소정방이 포로들을 데리고 당나라 황제를 알현했으나, 황제는 그를 꾸짖기만 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백제의 의자왕은 포로로 잡혀 머물던 곳에서 병으로 숨졌다. 이에 당나라 조정은 그에게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의 관직을 추증하고, 백제 옛 신하들에게 그의 장례를 치르게 했다. 또한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옆에 묘를 마련하고 비석도 세워주었다.
용삭 2년(662년),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에게 요동도 행군대총관 직책을 명한 이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변경해 고구려 정벌을 지시했다. 소정방은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령해 진영을 세운 뒤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큰 눈이 내려 작전을 중단하고 퇴각했다. 이후 황제는 소정방에게 양주안집대사의 직책을 내려 토번 정벌을 담당하게 했다.
건봉 2년에 소정방이 사망하자, 당나라 황제는 깊이 애도하며 좌효기대장군 유주도독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내렸다. *신라별기*에 따르면, 문호왕 즉위 5년(665년) 가을 8월 경자일에 왕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웅진성으로 가서 가왕(假王) 부여융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단을 세우고 흰 말을 잡아 맹세를 행했는데, 먼저 천신과 산천의 영에게 제사를 올린 뒤 말의 피를 입가에 묻혀 서약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날 백제 신왕이 순응과 반역을 반복하며 이웃 나라와 화목하지 못하였고, 인척 간에도 우호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혹하고 포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또한 신라를 침략하여 성과 읍을 파괴하고 백성을 학살하며 쉴 틈 없는 불안정을 야기하였다. 천자는 한 사람이라도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을 참담히 여기시며, 백성이 피해를 입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권고하셨으나, 백제는 지세가 험하고 거리가 멀다는 것을 핑계로 천경(天經)을 저버렸다. 이에 황제께서 노하시어 직접 정벌을 시행하시니, 당의 군기가 나아가는 곳마다 한 번의 전투로 백제가 평정되었다.
이는 마땅히 악행의 근원을 뽑아내고 궁택을 허물어 후대에 본보기가 될 길을 열어야 하였다. 그럼에도 귀순한 백제인을 회유하고 반역자를 토벌하는 것은 선왕들께서 남기신 명분이니, 나라를 부흥시키고 끊어진 명맥을 이으려 하는 것은 역대의 통례였다.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사책의 가르침에 따라, 전 백제왕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의 가문을 보전하도록 하노라. 이후로는 신라를 의지하여 길이도록 여국(隸國)의 위치를 유지하며 서로 묵은 감정을 씻고 새로운 화친 관계를 맺으며 함께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삼가 황제의 조명을 받들어 이를 영원히 거스르지 않겠다."
이어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파견하여 내 뜻을 상세히 전하도록 하였다. 또한 혼인을 약속하며 맹세를 거듭해 희생 제물을 잡고 피를 뿌리며 다음과 같이 다짐하였다. "시작과 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며, 재앙과 고난을 함께 나누고 은혜를 형제처럼 공유하겠다. 황제의 계명을 엄중히 따를 것을 약속하며, 이미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기거나 배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만일 이를 어기거나 배반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동원해 경계를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하늘의 신이 응징하여 백 가지 재앙으로 자손을 끊고 제사마저 끊어지게 할 것이다." 금서철계(金書鐵契)를 작성해 종묘에 보관하였으니, 자손 대대로 이를 감히 어기지 말라는 경고였다. 신께서 이를 들으시길 바라며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하였다.
맹세가 끝난 후에는 폐백을 단의 북쪽에 묻고 맹세문은 신라의 대묘에 보관하였다. 이 맹세문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작성한 것이다.
총장 원년(668년), 신라로부터 요청받은 당군이 평양 교외에 주둔하며 서신을 보내 급히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신라 왕은 신하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적의 영토에 주둔 중인 당군에게 군량을 보내야 하지만, 지형이 험난하고 매우 위험하다. 군량을 보내지 않는 것도 옳지 않은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김유신이 나서 말했다.
"제가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습니다. 왕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에 김유신과 김인문 등이 이끄는 수많은 군사가 고구려 국경 안으로 들어가 군량 2만 석을 수송하여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했다. 이후 신라는 당군과 합세하기 위해 연기와 병천 두 사람을 먼저 보내 합류 시점을 묻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그림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원효에게 문의하였고,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것은 군대를 빨리 철수하라는 뜻입니다. 난새와 송아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반절(反切)로 풀이한 것입니다."
김유신은 군사를 후퇴시키기로 하고, 패수를 건너려 하면서 엄격히 명령했다.
"나중에 강을 건너는 자는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군사들이 절반쯤 강을 건넜을 때, 고구려 병사가 들이닥쳐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죽였다. 다음 날 김유신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고구려 병사를 추격하여 수만 명을 사살했다.
백제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성 북쪽 바위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 의자왕과 후궁들이 화를 피하기 어려움을 알고 자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들은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하기보다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고, 이로 인해 그 바위를 타사암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전설일 뿐이며, 실제로는 궁녀만 떨어져 죽었고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숨졌다는 것이 당나라 기록에 명확히 전해진다.
또한 신라의 고전에는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후 신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김유신이 이를 사전에 알고 당 병사들을 초대해 향연을 베푼 뒤 독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구덩이에 묻혔으며, 지금의 상주 지역에 있는 당교가 그 장소라고 전해진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점령한 뒤 본격적으로 철군한 후, 신라왕은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백제 잔당을 소탕하고 한산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이 이를 포위하며 치열히 싸웠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5월 11일부터 6월 22일까지의 격전 속에서 신라군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고, 이를 보고받은 왕은 신하들과 논의하며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타개할 계책을 찾을 수 있겠는가?"
왕은 망설였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했다.
유신이 급히 뛰어와 아뢰며 형세가 위급하여 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 오직 신술을 써야 한다고 전했다. 이에 성부산에 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실행하자, 갑자기 큰 독만 한 광채가 나타나더니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한산성 안의 군사들은 지원군이 오지 않으니 서로 원망하며 바라보고 울기만 했다. 적병이 공격하려는 순간, 남쪽 하늘 끝에서 갑자기 광채가 나타나더니 벼락으로 변해 적진의 포석 서른 곳 이상을 내리쳤다. 이로 인해 적군의 활, 화살, 창이 부서졌고 군사들은 땅에 엎드렸다. 한참 후 깨어난 적병들은 흩어져 도망쳤으며, 아군 또한 무사히 돌아왔다.
태종이 즉위 초기에 머리 하나에 몸은 둘, 다리가 여덟 개나 되는 기이한 멧돼지를 바치는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천하를 통일할 길조라 했다.
이 임금의 시대에 신라는 중국의 의관과 아홀(牙笏)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장 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요청해 가져온 것이다.
신문왕 때, 당 고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 당나라 태종은 어진 신하인 위징과 이순풍을 얻어 마음과 덕을 함께하여 천하를 통일했기에 그 이름이 태종활제라 불렸다. 하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감히 태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불충하니 이를 속히 고치라."
이에 신라왕은 글로 답하기를,
"우리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성신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태종이라 명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그 답서를 보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과거 그가 태자였을 때, 하늘에서 "33천 중 한 명이 신라에 태어나 김유신이 되었다."는 예언이 있었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일이 기억났다. 이에 책을 펼쳐 확인하니 과연 그러하여 두려움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사신을 보내, 신라가 태종이라는 칭호를 계속 사용해도 좋다는 답변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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