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 6. 장춘랑, 문호왕
■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전투를 벌일 때, 장춘랑과 파랑이 진영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백제를 공격하던 중 태종 임금의 꿈에 두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이전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지금은 백골만 남았지만 여전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움터에서 게으름 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정방의 위세에 눌려 남의 뒤를 따르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저희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를 들은 대왕은 놀람과 이상함을 느끼고, 두 혼령을 위해 하루 동안 모산정에서 불경을 외우게 하였으며, 또한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게 했다.
■ 문호왕 법민(文虎王 法敏)
661년 왕이 즉위한 해, 사비 남쪽 바다에서 거대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 키는 73척, 발 길이는 6척, 음장은 3척이었다고 하나, 어떤 기록에서는 키가 18척이었다고도 전하고 있다. 이는 667년 건봉(乾峯) 2년의 일이었다.
668년 총장(總章) 원년에 왕은 군사를 이끌고 인문, 흠순 등을 대동하여 평양에 도착하였고, 당(唐)나라 군대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의 장수 이적(李勣)은 고구려의 고장왕(高藏王)을 생포해 당나라로 압송하였다. 고장왕이란 이름은 그 성이 고씨(高氏)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당서(唐書) 고종기에 따르면, 현경(顯慶) 5년(660년) 소정방 등이 백제를 정벌한 후, 12월에는 계여하를 패강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고, 소정방을 요동도대총관으로, 유백영을 평양도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듬해 정월에는 소사업을 부여도총관으로, 임아상을 패강도총관으로 임명해 35만 대군을 지휘하며 추가로 지원하도록 지시하였다.
같은 해 8월 소정방 등이 패강 전투에서 패하고 도주하는 일이 있었으며, 건봉 원년(664년) 병인(丙寅) 6월에는 방동선, 고임, 설인귀 그리고 이근행 등이 투입되어 후방 지원을 담당했다. 그러나 9월에 방동선이 고구려와 대치했으나 또다시 패배하였다.
12월 기유일에는 이적이 요동도행군총관에 임명되어 여섯 총관의 군대 지휘권을 맡고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총장 원년(668년) 9월 이적은 마침내 고장왕을 생포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황제에게 그 보고를 올렸다.
674년 상원 원년, 당의 고종은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신라 기록에 따르면 육로장군 공공과 수로장군 유상이 신라의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하나, 당서 고종기에는 인문과 흠순만 언급되어 있고 김유신에 대한 기술은 없다.
이 무렵 당나라 유병(遊兵)과 여러 군대가 주둔하며 신라를 치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를 파악한 신라는 병력을 동원해 이를 공격했다. 다음 해에 당 고종은 좌우신하를 질책하며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우리의 병력을 빌었으면서 어찌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가?"라며 인문을 꾸짖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어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기록에 따르면 당 고종이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임명해 신라를 정벌케 하고, 설인귀는 천성을 공격하다가 패주한 일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의상법사는 유학 중 당나라에서 인문을 만났고, 인문은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의상법사는 급히 귀국하여 왕에게 이를 알렸고, 왕은 크게 두려워하며 여러 신하들을 불러 대책 마련을 논의했다. 이때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근래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아 돌아왔으니 그를 청해 자문하십시오."라고 제안하였다.
명랑법사가 이야기하기를,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바로 그때, 정주에서 사자가 급히 달려와 보고하기를,
“당나라 군대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우리의 국경에 몰려왔으며, 해상을 장악하며 활보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하였다.
이를 듣고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좋겠소?”
이에 명랑이 대답하기를,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라도 절을 지으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의 말대로 즉시 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오방신상을 세운 다음, 유가의 명승 12인을 모아 명랑을 상수(지도자)로 삼아 문두루 비밀법을 실행하도록 했다. 그러자 당병과 신라군이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 당나라의 배들이 모두 침몰하고 말았다. 이후 절을 새로 보수하여 완성한 뒤 사천왕사라 이름 지었으며, 이곳의 단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로부터 몇 해 뒤인 신미년(문무왕 11년, 약 671년으로 보이나 일부 착오가 있는 듯하다. 문무왕이 당나라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난 것은 문무왕 14년인 674년이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참고하라), 당나라는 다시 조헌을 장수로 임명하여 5만 병력을 이끌고 신라를 침략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같은 비법을 사용하니 전과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배들이 모두 먼바다에서 침몰하였다.
그 시기, 한림랑 박문준이 김인문과 함께 당나라에서 옥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의 황제 고종이 박문준을 불러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어째서 우리 대군이 번번이 바다에서 침몰하여 살아 돌아오는 이가 없느냐?”
박문준이 대답하기를,
“배신들은 상국에 온 지 오래되어 본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듣기로는 신라가 상국의 은덕으로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으므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천왕사라는 절을 짓고 황제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법석을 열었다고만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들은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괴를 신라로 파견해 천왕사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고민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절을 직접 보여 주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천왕사 남쪽에 새로 절을 지어두고 대응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사신이 도착하여 말하기를,
“우선 황제의 장수를 축원하고자 천왕사에 가 분향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사신들을 새로 지은 절로 안내하였다. 그러나 사신들은 절 입구 앞에 멈춰서더니 말하였다.
“여기는 천왕사가 아닌 망덕요산의 절인 것 같소.”
결국 사신은 절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황금 천 냥을 건넸고,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보고하기를,
“신라는 새 절을 지어 황제 폐하의 축수를 행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발언을 계기로 새 절 이름을 망덕사라 하였다. 혹은 이 일이 효소왕 때 이루어진 일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왕은 문준이 당나라 황제에게 곡진히 말하여 그 죄를 용서받을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강수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내용의 표문을 작성하게 하였다. 이 표문은 사인(舍人) 원우에게 전달되어 당 황제에게 올려졌고, 황제는 표문을 읽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위로하고 그의 죄를 용서해 석방하였다. 인문이 옥에 갇혀 있을 당시, 신라 사람들은 그의 속죄와 안전을 기원하며 절을 짓고 이를 인용사라 하였으며 관음도량도 개설하였다. 그러나 인문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사망하자 미타도량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이 절은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문무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째 되던 영융 2년 신사(681)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언으로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자신을 장사지내도록 당부하였다. 생전에 왕은 지의법사에게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며 신라를 수호하고자 하오."
이에 법사가 응답하길,
"용은 짐승의 응보인데 어찌 그런 존재가 되시려 하십니까?"
그러자 왕은,
"나는 이미 세속의 부귀영화를 버린 지 오래다. 만약 추한 응보로 인해 짐승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이다."
라고 답하였다.
문무왕이 즉위 초기에 남산에 장창(저장고)을 건설하였는데, 길이 50보, 너비 15보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주곡과 병기가 비축되었으며, 이를 우창이라 불렀다. 또한 천은사 북서쪽 산 위에도 또 하나의 장창을 세웠으니, 이는 좌창이라 불렸다.
별본 기록에 따르면, 건복 8년 신해(621)에 남산성을 쌓았으며 그 둘레는 2080보로 되어 있다. 이는 진덕왕대에 처음 축성된 것을 이번에 와서 개수한 것이다. 또 이 시기에 부산성을 쌓기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하였으며, 안북하변에는 철성도 축조하였다.
한편, 수도에 성곽을 세우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의상법사의 간언으로 중지되었다. 의상법사는 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아뢰었다.
"왕의 정치가 밝으면 풀밭 위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이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재앙은 사라지고 복은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반면, 정치가 어둡다면 아무리 웅장한 성곽을 쌓는다 해도 재난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이 서신을 읽고 공사의 진행을 멈췄다. 이는 문무왕 21년(681)의 일이었다.
인덕 3년 병인(666) 3월 10일, 길이라는 여자가 한 번에 세 아들을 출산하였다. 또한 총장 3년 경오(670) 정월 7일에는 한기부 소속의 관료 일산급간(혹은 성산아간)의 여종이 한 번에 네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세 명은 아들이고 한 명은 딸이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곡식 200석을 상으로 내렸다. 또 같은 시기 고구려를 정벌하여 그 왕손을 포로로 신라에 데려와 진골 신분으로 편입시켰다.
어느 날 왕이 서동생 차득공을 불러 말했다.
"그대가 재상이 되어 백관을 다스리고, 온 나라를 평온하게 만들라."
그러자 차득공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신을 재상으로 삼으시려거든, 감히 청컨대 제가 나라 안팎을 두루 살펴 민간의 무역 활동이 괴로운지 또는 편안한지, 조세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관리들의 청렴함과 부패 여부를 먼저 조사한 후에야 그 역할을 맡고자 합니다."
왕은 그의 요청을 허락했다.
차득공은 거사의 모습으로 변장해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고 서울을 떠났다. 그는 여러 고을을 거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현재의 강릉인 아슬라주, 춘천인 우수주, 충주인 북원경을 지나 마침내 해양인 무진주에 이르렀다.
그는 마을 곳곳을 둘러보던 중, 무진주의 관리 안길이 차득공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날 밤 안길은 자신의 아내들과 첩들을 불러 말했다.
"오늘 밤 거사를 모시는 이는 평생 나와 함께할 사람이라 생각하오."
두 아내가 말했다.
"당신께서 종신토록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면, 어찌 다른 이를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 아내는 이렇게 답하며 남다른 태도를 보였다.
"당신께서 그렇게 허락하신다면, 저는 당신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안길의 뜻대로 행동했다.
다음 날, 차득공은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말했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 우리 집은 황룡사와 황성사 두 절 사이에 있소. 단오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니 혹 서울에 올 일이 생기면 꼭 찾아오라."
이후 차득공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나라에는 각 주의 지방 관리 한 명을 매년 서울의 관청에 보내 일정 기간 동안 근무하게 하는 ‘상수리’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안길이 상수리로 뽑혀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단오거사의 집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도 그 집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안길이 오랫동안 길가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지나가며 묻고는 말했다.
"황룡사와 황성사 사이에 있는 집이라면 그것은 대궐일세. 단오는 바로 차득공일 것이니, 외지에 잠행하던 시절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군."
안길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노인은 조언했다.
"궁성 서쪽의 귀정문으로 가시오. 거기에서 출입하는 궁녀를 만난 뒤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
안길은 그의 말을 따라 귀정문에서 한 궁녀를 만나 말했다.
"무진주에 사는 안길이라 합니다. 상공님을 뵙고 싶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차득공은 직접 나와 안길을 맞이하며 손을 잡고 궁으로 데려갔다. 이후 자신의 부인을 불러내 잔치를 베풀었다. 준비한 음식은 무려 50여 가지에 달했다.
차득공은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며, 무진주의 성부산 아래 토지를 상수리들이 사용하는 소목전으로 정하고, 사람들의 벌목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자연환경이 보호되었으며, 이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산 아래에는 약 30묘에 달하는 밭이 있었는데, 여기에 세 섬가량의 종자를 뿌렸다. 이 밭이 풍작이면 무진주도 풍요로웠고, 반대로 흉작이면 무진주 또한 흉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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