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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 7. 만파식적, 성덕왕 등

 

■ 만파식적 (萬萬波波息笛)

제31대 신라의 통치자인 신문왕의 이름은 김정명이다. 그는 계요 원년인 681년 음력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에 절인 감은사를 세웠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처음 착공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계요 2년(682년)에 감은사가 완성되었다. 절 뜰 아래 동쪽에 구멍을 냈는데,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무왕의 유골을 모신 곳은 대왕암이라 불렸으며, 절 이름은 감은사라 명명되었다. 후일 용이 나타난 장소를 이견대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 다른 기록에서는 천수 원년으로 잘못 표기되고 있다,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동해에 떠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 주변을 떠돌고 있다고 보고했다. 왕은 이를 기이히 여겨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했다. 김춘질은 대왕의 아버지 문무왕이 바닷속 해룡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고 있으며, 김유신 또한 하늘 세계에서 신이 되어 대왕과 뜻을 함께한다고 풀이했다. 그들은 왕에게 보물을 전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며, 보물을 얻기 위해 왕이 직접 바닷가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신문왕은 같은 달 7일에 이견대로 나아가 그 산을 바라보며 사자를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형상은 거북의 머리 모양이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대나무 한 줄기가 있었다. 이 대나무는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기묘함을 보였다. 사자의 보고를 들은 왕은 감은사로 가서 머물렀다.

다음날 오전, 대나무가 합쳐지자 천지가 진동하며 강풍과 폭우가 몰아쳤고, 이런 날씨는 7일간 지속되었다. 이날 16일 저녁 무렵에야 날씨가 잔잔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떠있던 산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용이 검은 옥대를 바치며 왕을 맞이했다. 왕이 그 대나무의 특징에 대해 묻자 용은 대나무는 두 조각으로 나뉠 때 아무 소리가 나지 않지만, 합쳐질 때야 소리가 난다며 이를 길조로 해석했다. 이어 왕이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용은 문무왕과 김유신의 뜻이 담긴 값비싼 보물을 왕에게 주러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문왕은 용에게 감사하며 비단과 금, 옥을 선물로 주었다. 이후 사자를 보내 대나무를 베어오게 한 뒤 산과 용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왕은 감은사에 머물렀다가 다음 날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서 행차를 멈추고 점심을 들었다.

그 시각, 태자 이공(훗날 효소대왕)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축하하며 옥대를 살펴보았다. 태자는 옥대의 특정 부분이 용의 형태임을 알아채며 이를 증명하고자 왼쪽 둘째 눈금을 떼어 물에 넣었고, 그 즉시 눈금이 용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다. 눈금이 남긴 자리는 못이 되었으며, 그곳은 용연이라 불리게 되었다.

왕은 돌아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에 위치한 천존고레 보관하게 했다. 이 피리는 만파식적이라 불렸으며, 적군을 물리치고 병을 치유하며 가뭄이나 홍수를 막는 기적적인 힘을 지녔다. 이후 국보로 지정되었다.
효소대왕 시기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693년)에 부례랑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사연으로 인해 다시 이름을 지어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 효소왕 대의 죽지랑 

효소대왕 시절, 천수 4년(693년)에 부례랑이 기이한 연유로 살아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다시 봉하여 "만만파파식적"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그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32대 효소대왕 시대에 죽지랑(또는 죽만랑) 무리 중 득오급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리고 매일 관직 활동에 열심이었으나, 열흘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죽지랑이 그의 어머니를 찾아 물었다.

– "그대의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 "당진 모량부의 익선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의 창직(창고 관리직)으로 임명했습니다. 급히 떠나다 보니 작별 인사를 못한 것 같습니다."

이에 죽지랑은 말하였다.

– "그대의 아들이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면 찾을 필요도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다니 마땅히 찾아가 대접해야겠소."

죽지랑은 설병(떡)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준비하고 노복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죽지랑 무리 중 백삼십칠 명이 예를 갖추어 그를 따랐다. 부산성에 도착한 그는 문지기에게 물었다.

– "득오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문지기는 대답했다.

– "지금 익선의 밭에서 부역 중입니다."

죽지랑은 곧바로 밭으로 가서 준비해 간 술과 떡으로 득오와 일하는 사람들을 대접했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요청하며 득오와 함께 돌아가려 했으나, 익선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 능절에서 거두어들인 세금 곡식 30석을 성으로 운반하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간진은 죽지랑의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아름답게 생각하며, 반대로 익선의 융통성 없음은 낮게 평가하여 곡식 30석을 익선에게 주며 득오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익선은 여전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간진은 다시 자신의 말안장을 익선에게 주자, 그제야 익선은 득오를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가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 그를 벌하고 치욕을 씻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익선이 도망쳤고, 대신 그의 장자를 체포했다. 마침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던 때로, 그들은 성내의 연못에서 그를 목욕시키려 했으나 결국 얼어 죽고 말았다. 

효소대왕은 이 사건을 전해 듣고 명하기를, 모량리에 거주하며 벼슬을 가진 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한 검은 의복을 입게 하고 승려가 되는 것 또한 금지했다. 이미 승려가 된 사람이라도 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한편, 칙사는 간진의 후손을 특별히 기려 평정호손으로 삼으며 표창했다. 당시 원측법사가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 출신이라는 이유로 승직을 받지 못하였다.

죽지랑의 아버지 술종공은 삭주 도독사로 부임하던 길에 삼한 병란이 발생해 기병 3천 명이 따라 호위했다. 행렬이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길을 다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술종공은 이를 보고 크게 감탄했고, 거사 또한 술종공의 위엄에 놀라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 후 술종공이 임무에 부임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꿈속에서 거사가 집에 오는 것을 보았다. 부부가 같은 꿈을 꾼 일이기에 더욱 놀라고 신기하게 여기며 사람을 보내 거사의 안부를 물어보았는데, 그가 며칠 전에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자가 돌아와 그 사실을 알리니, 그날이 마치 이전에 꿈꾸었던 날과 같았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아마도 위대한 인물이 우리 집안에서 태어날 것 같소."라고 하였다.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돌에 미륵불 한 구를 새겨 무덤 앞에 세우게 하였다.

그 뒤 공의 아내는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이런 연유로 아이의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이 죽지랑은 자라서 벼슬길에 올랐고, 훗날 유신공을 따라 부수(副帥)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처음 득오곡이 낭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지어 부른 바가 있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봄 그리워하던 마음에
모든 것이 시름에 잠겼네.
아담한 그 얼굴에도 주름이 잡히려 하니,
눈 돌리는 순간만이라도 뵈옵고 싶구나.

낭이여, 그리움에 오고 가는 길 위에서
쑥 우거진 그 마을에 머물 수 있겠는가?


■ 성덕왕 


제33대 성덕왕 재위 시기인 신룡 2년 병오(706년),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듬해 정미년에 접어들어,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나누어주었는데, 1인당 하루치 분량을 3되로 책정하였다. 이 일이 마무리된 후 확인해 보니, 총 30만500석에 달하는 곡식이 사용되었다.

성덕왕은 태종대왕을 기리며 봉덕사를 건립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인왕도량을 7일간 열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대사령을 반포하고 새로운 관직인 시중의 자리를 신설하였다. 일부 문헌에서는 이 사건이 효성왕 때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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