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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이른 눈 (早雪)

제40대 애장왕 말년인 무자년(808)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제41대 헌덕왕 시기, 원화 13년 무술년(818) 3월 14일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제46대 문성왕 기미년(839) 5월 19일에는 다량의 눈이 내렸으며, 같은 해 8월 1일에는 천지가 어두워졌다.


■ 홍덕왕과 앵무새 

제42대 흥덕대왕은 보력 2년 병오(826년)에 즉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이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앵무새 한 쌍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컷이 죽고, 수컷 앵무새만 남아 슬피 울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왕은 사람을 시켜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두게 하였다. 수컷 앵무새는 거울 속 자신의 반영을 짝으로 착각하고, 그 그림자를 쫓아 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단순한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금 슬픔에 잠겨 울다 결국 죽고 말았다. 이에 왕이 이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하며, 그 가사는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 신무대왕,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제45대 신무왕이 즉위하기 전, 그는 협사 궁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겐 함께 살아갈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다. 흥덕왕이 서거했을 때, 누군가 그의 부인 균정을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김명 등을 통해 제륭 희강왕이 즉위하였다. 결국 나는 희강왕 2년인 837년에 청해진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내 원수는 바로 김명, 즉 민애왕이다. 만약 네가 나를 대신해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네 딸을 왕비로 맞이하겠다."

궁파는 이 제안을 수락했고, 마음을 모으고 병력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했다. 그렇게 신무왕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여러 대신들이 강력히 반대하며 말했다.
"궁파는 매우 신분이 낮은 자입니다.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왕은 이 조언을 받아들였다. 당시 궁파는 청해진에서 병력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분노하고 반란을 계획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군 염장이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반역을 꾀하려 합니다. 소신이 직접 가서 그를 처단하겠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명령을 받고 청해진으로 향하여 인도자를 통해 궁파에게 전했다.
"제가 왕에게 다소간 원망이 있어 몸과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귀하에게 의탁하려 합니다."

궁파는 이 말에 크게 분노하며 외쳤다.
"너희들이 왕에게 나의 딸을 폐위시키라고 간언하고도 어찌 나를 보려는가!"

그러나 염장은 다시 사람을 통해 말했다.
"그것은 다른 신하들이 간한 것입니다. 저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저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염장을 청사로 불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이유로 이곳을 찾았는가?"
"저는 왕의 뜻을 거슬러 곤경에 처했기에, 공의 품 아래 몸을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잘된 일이오."

궁파는 기뻐하며 술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잔치 자리에서 염장은 기회를 틈타 궁파의 긴 칼을 뽑아 그를 죽였다. 이를 목격한 궁파의 부하들은 놀라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가 왕에게 보고하였다.
"궁파를 제거하였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염장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이라는 벼슬을 하사했다. 이는 신라 제46대 문성왕 8년(849)의 일이었다.

 

■ 제48대 경문대왕 

왕의 이름은 응렴이었다. 그는 스무 살이 아니라 열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국선이 되었고, 그의 재능과 됨됨이를 알아본 헌안대왕은 특별히 궁중에서 잔치를 열어 그를 불렀다. 대왕은 응렴에게 물었다.

“낭은 나라 곳곳을 두루 돌아다녔다니, 그 동안 어떤 특별한 일이라도 보았는가?”

그러자 응렴이 대답했다.

“제가 여행 중에 만난 참으로 훌륭한 세 사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왕이 궁금해하며 말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말해 보거라.”

“첫 번째는 높은 위치에 있을 만한 자격을 갖췄지만 겸손하여 아래사람으로 남기를 선택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힘과 부를 가졌음에도 의복을 소박하게 입는 사람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본래 귀하고 권세를 가졌으나 그 위세를 자랑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응렴의 이 말을 듣던 왕은 그들의 어짐에 깊이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다.

“내게 두 딸이 있는데, 낭이 그와 혼인해 주길 바란다.”

응렴은 놀랐으나 왕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공손히 절을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물러나 자신에게 닥친 일을 부모에게 알렸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부모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자식들과 의논했다.

“국왕의 첫째 공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수수하다고 하며, 둘째 공주는 매우 고운 용모를 지녔다고 하니, 둘째 공주를 아내로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 계획을 흘려들은 범교사라는 인물이 응렴의 집을 찾아와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낭에게 배필로 주신다는 말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낭께서는 어느 공주와 혼인하려 하십니까?”

“부모님은 둘째 공주를 아내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에 범교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낭이 둘째 공주를 택하신다면 저는 목숨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반드시 큰 혜택 세 가지가 따를 것이니 부디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응렴은 깊게 고민한 끝에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사자를 보내 그의 선택을 물었고, 응렴은 심사숙고 끝에 맏딸을 아내로 맞겠노라 대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도 흔쾌히 승낙하며 결정을 존중했다.

그러던 중 3개월 후, 왕이 병에 들었다. 죽음을 앞둔 왕은 신하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내게 아들이 없는 바, 내 죽음 이후에는 첫째 딸의 남편인 응렴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튿날 왕이 서거한 뒤 응렴은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한편, 범교사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맏공주를 아내로 맞아 왕좌에 오르신 것이요, 둘째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 공주를 가까이에 둘 수 있게 된 것이며, 셋째는 장가를 잘 들어 당신과 왕후께서 크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응렴은 범교사의 말에 감사를 표하며 그에게 ‘대덕’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금 130냥을 하사했다. 후일 응렴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경문’이라는 시호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응렴 왕의 생애에는 기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이 잠드는 침전에는 매일 밤마다 뱀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본 궁인들이 두려워 쫓아내려 했으나 왕은 만류하며 말했다.

“뱀이 없으면 나는 편히 잠들 수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
왕이 잠들 때면 항상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의 가슴을 가득 덮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 왕의 귀는 갑자기 길어져 당나귀 귀처럼 변했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궁 안에서 단 한 명, 복두장뿐이었다. 그는 이 비밀을 평생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죽음을 예감했을 때, 그는 도림사 대나무 숲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

이후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는 이렇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임금님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

왕은 이 소리를 몹시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내고 대신 산수유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의 귀는 길다."

그 무렵, 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의 관료들이 강원도 통천의 금란 지역으로 유람을 떠났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이에 세 곡조의 노래를 지었고, 심필 사지를 시켜 공책과 함께 대구화상에게 보내 또 다른 세 곡조를 짓게 했다.

첫 번째 곡은 '현금포곡', 두 번째 곡은 '대도곡', 그리고 세 번째 곡은 '문군곡'이었다. 이들을 대궐로 가져가 왕께 올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그러나 그 노랫말은 이후로 전해지지 않았다.


■ 처용랑과 망해사 

제49대 헌강대왕 시절, 왕도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장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초가집은 단 한 채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거리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넘쳐났으며, 계절마다 바람과 비는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현재의 울주)로 행차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강가에서 잠시 쉬던 중, 갑자기 짙은 안개와 구름이 몰려와 길을 잃게 되었다. 이에 괴이하게 여긴 왕이 신하들에게 자초지종을 묻자, 일관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것은 동해 용왕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이를 풀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에 왕은 한 관료에게 명하여 그곳에 절을 지어 용왕에게 바치도록 했다. 왕명이 내려지자마자 구름과 안개는 즉시 사라졌다. 이로 인해 그 지역은 ‘개운포’라 불리게 되었다.

동해의 용왕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그의 덕을 찬양하며 춤과 음악으로 경의를 표했다. 이들 중 막내아들은 왕을 따라 서라벌까지 가서 정사를 보필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축복하였고, 급간이라는 관직도 내려주었다. 그러나 처용의 아내는 탁월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역신(악령)이 그녀를 흠모하였고, 밤마다 인간으로 변신해 그녀와 몰래 동침했다. 어느 날 처용이 집으로 돌아와 이를 목격했으나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고 한편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동경 밝은 달 아래, 밤새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라네.
두 다리는 내 것이고, 나머지 둘은 누구 것인가.
분명히 내 자리인데 빼앗겼으니 어찌하리오.

이를 듣고 역신은 본 모습을 드러낸 채 처용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공께서 노여움 없이 관용을 베푸시니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맹세코 앞으로는 공의 형상이 그려진 물건만 보아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역신을 쫓고 복을 기원하는 풍습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로 돌아온 왕은 곧 영취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망해사’라 하였다. 이 절은 동해 용왕을 위한 기념물로, ‘신방사’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모습은 오직 왕에게만 보였다. 이에 왕은 신의 춤 동작을 따라 춤을 추며 그 형상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 신의 이름은 심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사람들은 이를 전승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이라는 춤으로 불렀다. 어떤 이는 신의 모습을 새겨 후대에 전하기 위해 상심(祥審)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흰 수염에서 비롯한 상염무(霜髥舞)라는 별칭도 생겨났다.

한편, 왕이 금강령에 들렀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이라 불렀다. 또 동례전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지신(地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며, 이 신의 이름은 지백급간이라 전해진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그 당시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하며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고 외쳤는데, 여기서 "도파"란 말은 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 나라의 상태를 예견하고, 도읍이 곧 파괴될 징조를 알아 도망친다는 의미이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의 멸망을 예감하고 이를 경고하기 위해 춤을 춘 것이었으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좋은 징조로 여겨 술과 여색에 더욱 빠져들었다. 결국 그 결과로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진성여왕이 임금으로 오른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유모인 부호부인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몇몇 총신들이 권력을 농단하며 국정을 어지럽혔다. 이에 도적 떼가 벌떼처럼 일어나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백성들이 이를 크게 걱정했다. 그들은 비밀스럽게 다라니(주문)의 은어를 만들어 길거리에 던졌다. 이 은어를 발견한 왕과 권신들은 이를 보고 말했다.

"이 글을 지은 자는 왕거인 외에 누가 있겠는가?"

결국 왕거인은 억울하게 옥에 갇혔고, 자신의 억울함을 하늘에 호소하며 시를 지었다. 그러자 벼락이 감옥에 내리쳐 그를 풀어주었다. 그때 왕거인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연단의 피 맺힌 눈물이 무지개 되어 하늘을 가르고,
추연의 품은 슬픔이 여름 서리가 되어 내린다.
내 불우함이 그들과 같으니,
왜 하늘은 아무런 상서도 내리지 않는가.

또한 다라니의 은어는 다음과 같았다.

찰니나제란은 여왕을 가리킨 것이고,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고위 관직명)을 뜻한다. 우우삼아간은 세 명 또는 네 명의 총신을, 부이는 부호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당시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후백제 해적들이 진도에서 길을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궁수 50명을 뽑아 그와 동행하도록 했다. 배가 곡도에 이르렀을 때 거센 풍랑이 닥쳐 열흘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양패공은 이를 심히 걱정하며 점쟁이에게 점을 보게 했다.

"이 섬에는 신령스러운 땅이 있으니 제사를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점쟁이의 말에 따라 못 위에 제물을 차려놓자, 못물이 한길 이상 솟구쳤다. 그날 밤,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양패공은 꿈에서 깨어 이를 신하들에게 전하며 말했다.

"누구를 이 섬에 남기는 것이 좋겠소?"

이에 신하들은 제안을 내놓았다.

"나무 조각 50개에 각자 이름을 써서 물에 띄우면, 가라앉는 나무 조각의 주인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패공은 그 말에 따랐고, 군사 거타지의 이름이 적힌 나무 조각이 가라앉았다. 결국 거타지를 섬에 남겼더니 곧 순풍이 불어 바다도 잔잔해져 배는 순조롭게 항해를 이어갔다. 섬에 남겨진 거타지는 근심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노인이 나타나 못 속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약(서쪽 바다의 신)이다. 해가 뜰 무렵이면 항상 하늘에서 중 하나가 내려와 다라니 주문을 외우며 못 주변을 세 바퀴 돈다. 그러면 나와 내 아내, 자식들이 물 위로 떠오르는데,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먹는다. 이제는 딸 하나만 남은 상태이다. 내일 아침에도 중이 올 테니 활로 쏘아주게."

거타지는 이에 응하며 말했다.

"활 솜씨라면 저를 믿으십시오."

노인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 정말로 중이 내려와 전처럼 주문을 외웠다. 중이 간을 빼먹으려 할 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자 중은 순간 늙은 여우로 변해 죽고 말았다. 노인은 나와 거타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말했다.

"그대 덕분에 우리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내 딸을 그대의 아내로 삼겠소.“
   "저에게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참으로 원하던 바입니다."
노인은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변하게 만든 뒤, 그 꽃을 거타지의 품에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두 마리의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가며 배를 호위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배는 당나라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신라 배를 호위하는 두 마리 용을 본 당나라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황제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이를 들은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 사람들은 필시 범상치 않은 이들일 것이다."

이에 황제는 잔치를 열어 거타지를 비롯한 일행을 귀빈으로 대접했고, 여러 신하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힌 뒤 금과 비단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거타지는 본국으로 돌아온 뒤 품에 간직했던 꽃가지를 꺼내들었고, 그것은 곧 한 여인으로 변하였다. 그는 그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갔다.


■ 효공왕 

제52대 효공왕 시기인 광화 15년 임신년(사실은 주량의 건화 2년, 912년)에 봉성사 외곽 문 양쪽 동서 21칸에 까치들이 집을 지었다.
또한 신덕왕 즉위 4년 을해(915년)에는 영묘사 내부 행랑에 까치 집이 34개, 그리고 까마귀 집이 40개나 있었다.
같은 해 3월에는 서리가 두 번 내렸으며, 6월에는 참포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맞붙은 물결이 3일 동안 싸움을 벌였다.


■ 경명왕 

제54대 경명왕 치세인 정명 5년(918년) 무인년에, 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를 막기 위해 3일 간 불경을 외워 개의 기운을 물리쳤으나, 반나절이 지나 개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7년 경진(920년) 2월에는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사지 집 뜰 안에 거꾸로 드리워졌으며, 이러한 현상이 한 달간 지속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는 일이 있었고, 벽화 속의 개가 실제로 뜰로 뛰어나왔다가 다시 벽 속으로 사라졌다.


■ 경애왕 

제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 갑신년(924년) 2월 19일, 황룡사에서 백좌 설법회가 열려 불경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선승 300명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대왕이 직접 향을 피워 불공을 올렸다. 이는 백좌 설법을 통한 선교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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