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로부인
성덕왕 시절,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며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근처에 있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싼 채 우뚝 서 있었는데, 그 높이는 천 장에 달하였으며 철쭉꽃이 만발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 수로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누군가 저 꽃을 꺾어 나에게 줄 수는 없을까?"
종자들이 이에 대답했다.
"저곳은 사람이 발 디딜 수 없는 곳이옵니다."
그들은 모두 이를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때 한 노인이 암소를 몰고 그곳을 지나가다 부인의 말을 듣고는 꽃을 꺾어와 읊조리며 바쳤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었다.
며칠 뒤, 순정공과 부인은 임해정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던 중, 홀연히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순정공은 주저앉아 애통해하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또 다른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옛 속담에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 하였습니다. 바다의 짐승도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이 고을의 사람들을 모아 노래를 부르며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순정공은 그 말을 따랐고, 마침내 용이 부인을 돌려보냈다. 공이 바닷속 삶에 대해 묻자, 부인은 대답했다.
"7보(七寶)로 장식된 궁전에서 지낸 시간은 꿈결 같았습니다. 음식은 달콤하고 향기로웠지만 인간 세상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부인의 몸에서는 세상에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신비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과 기품으로 인해 깊은 산이나 큰 못에 이르면 신령들의 눈길을 끄는 일이 잦았다.
사람들은 부인을 되찾기 위해 해가(海歌)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가는 이렇게 노래되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을 앗아간 죄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아느냐
만약 이를 거역하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너를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또한 노인의 헌화가는 이렇게 전해졌다.
붉고 짙은 바위 끝
암소를 멈추게 하여
내가 부끄럽지 않다면
꽃을 꺾어 바치리라
■ 효성왕
개원 10년 임술년(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이 세워졌다. 현재의 모화촌, 즉 경주의 동남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변방 요새로 사용된 곳이다. 이는 성덕왕 21년의 기록으로, 효성왕 때의 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고기 및 지리지에서도 모화군에 축성된 사실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 일대에 그 일부 관문 흔적이 남아 있다.
주변 길이는 6,792보이며, 사용된 인력은 총 3만 9,262인이었다고 한다. 감독관은 우너진 각간이 맡았다.
한편, 개원 21년 계유년(733)에는 당나라가 북쪽의 적(북적)을 공격하기 위해 신라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이때 당나라에서 사자를 604인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는 성덕왕 32년에 일어난 일로서, 마찬가지로 효성왕 시기의 사건이 아니다. 당시 당나라 현종은 등주로 진입한 말갈을 제압하기 위해 신라 숙위였던 김사란을 출병시켰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조에 기록된 사실이다.
■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당에서 『도덕경』 등을 보내오자 대왕은 정중히 이를 받아들였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 되는 해, 오악삼산의 신들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 대궐 뜰에서 왕을 알현하였다.
3월 3일, 왕은 귀정문 누상에 올라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도중에서 능력 있는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소?"
그때 마침 한 큰스님이 단정히 차려 입고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 왕께 뵈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찾는 스님은 이런 위의를 갖춘 분이 아니오."
왕은 그 스님을 돌려보내고, 곧이어 또 다른 스님이 납의(소박한 옷)를 걸치고 등에 앵통 혹은 삼태기를 짊어지고 남쪽에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누상으로 이끌었다.
스님의 앵통 속을 들여다보니 온통 차(茶)를 우리기 위한 도구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에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스님은 대답하였다.
"충담이라 합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스님은 답하였다.
"저는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마다 차를 다려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봉헌합니다. 오늘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에 왕이 요청하였다.
"나에게도 한 잔의 차를 주시겠소?"
충담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올렸다. 차 맛이 특이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가 잔에 가득했다. 왕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그대가 기파랑을 기리는 사뇌가(향가)를 지었는데 그 뜻이 매우 깊다고 하더이다."
"그러합니다."
왕이 다시 요청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백성을 다스리고 편안케 할 사뇌가도 지어주시겠소."
충담스님은 즉시 명에 따라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높이 평가하며 스님을 왕사(王師)로 봉하려 하였으나, 충담스님은 두 번이나 절하며 겸손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스님이 지은 **안민가(安民歌)**는 아래와 같다.
임금은 백성의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처럼 보호하시니
백성들이 그 사랑을 알아야 하리라
스스로도 어려운 삶이라 하지만
백성들을 먹여 달래 다스리며,
이 땅을 떠날 곳 없음을 깨달아야 하리니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처신할 때
나라가 태평해지리라!
또한, 스님이 만들었던 **기파랑 송가**는 다음과 같다.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여,
흰 구름 따라 흘러가는 듯하구나.
푸르른 시냇물에 비친 기파랑의 형상이여!
일오천 강가의 조약돌처럼 변함없는 마음으로
낭(郎)의 높은 뜻을 따르고자 하나이다.
아, 잣나무 가지처럼 우뚝한 모습이고,
서릿발 같은 결연함 속에 정의를 품었도다!
한편,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을 새로 맞아들였다. 후에 만월부인을 후비로 삼았는데, 그녀의 시호는 경수태후이며, 의충 각간의 딸이었다. 어느 날 왕은 표훈대덕에게 말하였다.
"나는 복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했소. 원컨대 당신께서 하늘에 기도하여 내게 아들을 얻게 해주소."
표훈대사는 하늘에 올라 기도하고 돌아와 전하였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아이를 얻는 것은 가능하나, 아들은 허락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왕이 다시 말했다.
"뜰을 바꿔 아들을 점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에 표훈이 상제께 다시 청하자 상제가 대답했다.
"가능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표훈이 하계로 내려가려 하자, 상제가 그를 불러 말했다.
"하늘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대사께서는 이웃 마을을 오가는 것처럼 천기를 드러내고 다니니, 앞으로는 아예 발걸음을 삼가라."
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고, 왕은 크게 기뻐했다. 태자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바로 혜공대왕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태후가 섭정을 맡았으나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를 막아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표훈대사의 경고가 적중했던 것이다.
한편, 혜공왕은 여성이었으나 남성으로 자라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줄곧 여자의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비단주머니 차기에 심취했고, 도사들과 어울려 희롱하며 놀았다. 이는 나라에 큰 혼란을 가져왔고,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16년 기록에 따르면,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고 상대등 김양상이 이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혜공왕은 난병들에게 변을 당했다고 한다.
표훈은 이후 신라의 성자로 칭송받았으나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혜공왕
대력 초년 강주의 관아 동쪽 지역에서 땅이 점차 내려앉아 작은 못을 형성했다. 어떤 기록에서는 이를 대사 동쪽의 작은 못이라 칭했다. 이 못은 세로 13척, 가로 7척의 크기를 보였다. 어느 순간 잉어 다섯에서 여섯 마리가 출현했는데, 서로 자라면서 못의 크기 또한 점점 커져 갔다.
768년, 정미년 2년에 천구성이 동쪽 누각 남쪽으로 떨어졌다. 천구성은 머리가 항아리처럼 생겼고, 꼬리는 약 세 자 길이였으며 불꽃처럼 밝게 타올랐다. 이와 함께 천지가 크게 흔들리는 진동도 있었다. 같은 해 김포현의 논 약 5경 넓이에서 벼가 모두 이삭을 맺었고, 7월에는 북궁 뜰 중앙에 별 두 개가 떨어진 뒤 또 하나가 추가로 떨어져, 세 개의 별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대궐 북쪽 변소에서 두 줄기의 연꽃이 피어났고, 봉성사의 밭에서도 연꽃이 자라났다. 한편 성 안으로 들어온 호랑이를 잡으려다 놓쳤으며,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는 참새 떼가 몰려드는 현상도 목격되었다.
안국병법 하권에서는 이러한 이변이 나타날 때 천하에 큰 전쟁이 일어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왕은 죄수들을 사면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였다.
7월 3일, 각간 대공이 적도로 거병하였고, 왕도와 오도주 군대 소속 96명의 각간들이 맞붙어 나라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는 혜공왕 4년(768년)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등장하는 사건이다. 결국 대공 각간이 죽음에 이르고 그의 가문이 몰락하면서, 그 재산과 보물이 왕궁으로 이관되었다.
같은 해 신성 지역의 장창이 불에 타버리자 사량과 모량 지역 마을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들을 왕궁으로 옮겼다. 이 난리는 석 달 만에 진압되었으나 많은 이들이 상을 받았고 동시에 다수의 희생자도 발생했다. 이는 표훈이 말했던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징조'와 일치하는 상황이었다.
■ 원성대왕
이찬 김주원이 처명으로 첫 상재가 되었을 때, 왕은 각간으로 강등된 뒤 복두(귀인들이 쓰는 모자)를 벗고 흰 갓을 쓴 채 12현금을 들고 천관사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 점을 쳐보니 이와 같은 해석이 나왔다.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12현금을 든 것은 칼을 사용하게 될 조짐이며,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크게 근심하여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시기, 아찬 여삼이 왕을 찾아뵙고자 하였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다시 요청이 있자 결국 아찬을 만나게 되었고, 아찬은 왕에게 근심의 이유를 묻는다. 왕은 꿈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고, 이에 아찬이 절하며 말했다.
“이는 길몽입니다. 만약 왕께서 왕위에 오르시더라도 저를 잊지 않으신다면 이 꿈을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좌우 사람들을 물리친 후 아찬에게 꿈의 해몽을 부탁하자, 아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당신 위에 군림할 자가 없음을 뜻하고, 흰 갓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에 걸쳐 후손이 왕위에 오를 조짐이며,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곧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상징입니다.”
그러나 왕은 “주원이 있는데 어찌 내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라며 의아해했고, 이에 아찬은 몰래 북천 신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권유했다. 왕이 이를 따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은 김주원을 섭립하려 했으나, 북천 북쪽에 있던 주원의 집 근처 냇물이 크게 불어나 건널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고, 대신들도 이를 따랐다. 왕위에 오른 이는 바로 원성왕이었다. 그 길몽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반면, 김주원은 명주로 물러나 살았다. 왕으로서의 체통을 유지했지만 이미 여산(왕비)은 사망했기에 그의 후손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원성왕에게는 다섯 명의 손자, 즉 혜충태자, 헌평태자, 예영잡간, 대룡부인, 소룡부인이 있었다.
원성왕은 인간사에 있어 고난과 행운의 이치를 깨달아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그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이 물려준 만파식적(천리귀감과 평화를 상징하는 피리)을 간직했던 덕분에 하늘의 은총을 받아 그 덕명이 널리 퍼졌다.
정원 2년(786년), 일본왕 문경이 신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계획을 철회하였다. 이후 일본 사자가 금 50냥을 가져와 만파식적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진평왕 시기에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답하며 거절하였다. 이듬해에도 재차 청원이 있었으나 동일한 이유로 거절하고 은 3천냥만 선물로 돌려보내는 한편, 만파식적은 내황전에 보관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째 되는 해인 을해(795년), 당나라의 사신이 서울에 머물러 한 달을 보낸 후 귀국했다. 그 다음날, 두 여인이 왕에게 어전에서 아뢰었다.
"폐하, 저희는 동지와 청지입니다. 청지는 곧 동천사의 샘을 뜻합니다. 절의 기록에 따르면 이 샘은 동해의 용이 드나들며 불법을 들었던 곳이고, 이 절은 진평왕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또한 500명의 성중과 5층탑, 그리고 전민(田民)을 헌납하여 봉헌된 곳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동천사를 지키는 두 용의 아내들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들과 함께 와서 저희 남편들과 분황사 우물의 용까지 총 세 마리의 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해 통속에 감추어 가져갔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그자들에게 명령하셔서 저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
이 말을 들은 왕은 도시 밖 하양관까지 직접 나아가 연회를 열어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을 대접하고 그들에게 추궁했다.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세 용을 붙잡아 간단 말인가? 사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반드시 처형될 것이다."
결국 하서국 사람들이 통속에서 세 마리의 작은 물고기를 꺼내 바치자 왕은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 풀어주었다. 물속에 놓인 세 생명체는 곧 다시 용으로 변화하여 각각 높이 물 위로 뛰며 기뻐했다. 이후 그들은 유유히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당나라 사신들은 왕의 지혜와 결단력에 무척 감복했다.
그 후 어느 날, 왕은 황룡사의 승려 지해를 궁으로 초대하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외우게 했다. 이때 사미(승려 수행자) 묘정은 늘 금광정 근처에서 바릿대를 씻곤 했는데, 물속에서 자라 한 마리가 나타났다 잠기기를 반복했다. 이 자라는 묘정이 남긴 밥을 받아먹으면서 점점 그와 친밀해졌다. 법회가 끝나갈 무렵, 묘정은 자라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너에게 오래도록 은혜를 베풀었으니, 너는 무엇으로 나에게 보답하려느냐?"
며칠 후, 자라가 입에서 구슬 한 개를 토해 내더니 그것을 묘정에게 내밀었다. 묘정은 이 구슬을 받아 허리띠 끝에 매달았다. 이후 왕은 묘정을 각별하게 생각해 내전에 불러들이며 가까이 두었다.
그 무렵, 신하 중 한 사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묘정을 사랑하여 함께 갈 것을 청했고, 왕도 이를 허락했다. 당나라로 간 두 사람 중 묘정은 황제에게도 깊은 사랑과 신뢰를 받았고, 승상과 여러 신하들 역시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어느 날 관상가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 사미는 외모에 길한 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것은 필시 특별한 보물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명령하여 묘정의 몸을 수색하자 허리띠 끝에 매달린 작은 구슬이 발견되었다. 황제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내가 여의주 네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작년에 한 개를 잃어버렸네. 그런데 이번에 발견한 이 구슬이 바로 내가 잃었던 여의주와 동일하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묻자, 묘정은 사실을 세세히 설명했다. 황제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그 구슬을 잃어버린 날이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황제는 구슬을 묘정에게서 빼앗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거나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보은사와 망덕루를 세웠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훈입잡간을 흥평대왕으로 추봉했고, 증조부인 의관잡간은 신영대왕으로, 고조부인 법선 대아간은 현성대왕으로 추봉하였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바로 마질차갑간이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