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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상 1.  연좌석, 육왕탑, 파사석탑, 장륙존상

 

■ 통경 홍륜사 금당의 10성 


동쪽 벽에 자리 잡고 서쪽을 바라보는 진흙으로 만든 상(니소泥塑)은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의 형상을 담고 있다. 반대로 서쪽 벽에 앉아 동쪽을 향한 니소는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을 나타낸 것이다.
 

[탑상 제4] 

■ 통경 홍륜사 금당의 10성 


동쪽 벽에 자리 잡고 서쪽을 바라보는 진흙으로 만든 상(니소泥塑)은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의 형상을 담고 있다. 반대로 서쪽 벽에 앉아 동쪽을 향한 니소는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을 나타낸 것이다.

 

■ 가섭불의 연좌석 

가섭불의 연좌석에 관한 기록은 옥룡집,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문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라 월성 동쪽 용궁의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존재한다. 이곳은 본래 부처님 이전 시기의 절터였다. 현재 황룡사의 터는 일곱 개의 절 중 하나로 여겨진다."

국사를 통해 살펴보면, 진흥왕이 즉위 14년이던 개국 3년 계유년(553년) 2월에 월성 동쪽에 신궁을 세웠다. 이 신궁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신궁을 황룡사로 개조했다고 한다. 가섭불의 연좌석은 당시 불전의 뒷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가 약 5~6척(약 1.5~1.8미터) 정도로 꽤 높았으며, 둘레는 겨우 세 발(약 90센티미터) 정도로 좁았다. 돌은 똑바로 서 있었는데 윗부분은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뒤 두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돌의 표면이 갈라지는 일이 있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중들이 돌에 쇠를 덧붙여 보강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기리며 지어진 시가 있다.

불교의 쇠락함이 아득하여 기억 속이 희미하니,  
오직 연좌석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네.  
몇 번이나 목화밭이 바다로 변하는 세월이 흘렀건만,  
그 자리에 의연히 스며 있는 감회가 깊구나.

그러나 고려 고종 시기의 몽골 침입(서산대병) 이후, 불전과 탑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 결국 이 돌 또한 땅속에 묻혀 표면과 함께 평평하게 되어버렸다.

아함경을 살펴보면 가섭불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섭불은 현겁(3겁 중 하나) 시대의 세 번째 부처로, 사람 나이로는 2만 세 무렵에 이 세계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불교적 계산법에 따르면 성겁 초기에 모든 생명체는 무량수(끝없는 생명)의 시간을 누렸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며 수명이 점차 줄어들다가 인간의 나이가 8만 세에 이르면, 이는 곧 주겁(세상이 형성되어 존재하다가 소멸로 돌아가는 오랜 시기를 네 등분한 것)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때부터 인간의 수명은 약 백 년마다 한 살씩 감소하여 10세가 되면 이를 일감(一減)이라 한다. 이후 다시 증가하여 인간의 수명이 8만 세에 달하면 일증(一增)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증·감의 순환이 20번씩 이루어지면 한 주겁이 완성된다.

한 주겁 동안 천 명의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며, 석가모니불은 그 가운데 네 번째 부처로 등장한다. 석가모니불은 아홉 번째 감소기(九減中)에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석가모니가 백 세의 수명을 누렸던 시점에서 가섭불이 2만 세의 수명을 누렸던 때 사이까지는 총 200만여 년이 지난 것으로 계산된다. 그리고 현겁 초창기의 첫 번째 부처였던 구류손불(과거칠불 중 한 명)의 시대까지 소급하면 또다시 수만 년이 더해진다. 구류손불 이전, 겁 초창기 인간이 무량세를 누렸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기간은 또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없다.

석가모니의 시대에서 지금까지 계산해 보면, 현재 고려 지원 18년 신사년(1281년)까지 이미 2,230년이 경과했다고 본다.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시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수만 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고려의 학자 오세문이 《역대가》를 지으며 대진국(금 나라) 정우 7년 기묘년(319년)으로 소급하여 약 4만9천6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반고씨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 연희궁 녹사 김희령이 저술한 《대일역법》에서는 천지가 처음 개벽한 상원갑자로부터 원풍 갑자(1084년)까지 총 193만7천641년이라 했다.

중국 역사서 《찬고도》에서는 천지 개벽부터 춘추시대 노나라 애공이 사냥 중 기린을 포획한 획린 시기까지를 276만 세로 계산했다. 여러 기록을 참고해 보면, 가섭불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 연좌석의 나이에 해당한다고도 하는데 이것조차 겁 초창기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다양한 학설에도 불구하고 천지 개벽에 대한 시간적 고증은 매우 빈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 요동성의 육왕탑 

삼보감통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 곁에 위치한 한 탑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고로(古老)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이 국경 지역을 순행하다가 요동성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오색빛 구름이 그 지역을 뒤덮는 모습을 본 왕은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 한 중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중은 보이지 않았고, 멀리서 바라보면 다시 나타났다. 그 중 주변에는 삼중으로 이루어진 흙 탑이 있었다. 탑의 꼭대기는 솥을 덮은 모양새였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왕은 다시 그 중을 찾아보라고 시켰으나, 찾을 수 있는 것은 거칠게 자란 풀뿐이었다. 결국 땅을 파보기로 했는데, 한 길 정도 팠을 때 지팡이와 신발이 나오고, 더 깊이 파자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 그 명 위에는 범서(산스크리트어로 쓴 글)가 있었다. 이를 알아본 시신(侍臣)이 “이것은 불탑입니다”라고 말했다. 성왕이 자세히 묻자 시신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탑은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름은 포도왕입니다. 이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부처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이로 인해 성왕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즉시 7층 목탑을 세웠다. 이후 불법(佛法)이 전래되면서 그 연유와 과정을 자세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원래 탑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썩어 버렸다. 당시 아육왕이 인도를 중심으로 불교를 통해 염부제에 탑을 세웠다고 하니, 이와 같은 일은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 당나라 용삭 연간(661-662)에 요동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행군 중이었던 설인귀가 과거 수양제가 정벌했던 옛 지역에 도달했는데, 산에 있는 불상들이 텅 비어 쓸쓸히 방치된 모습을 발견했다. 이곳은 사람의 발길마저 끊어진 곳이었다. 설인귀는 근처의 고로들을 통해 이를 확인했는데, 그들은 “이 불상은 선대부터 존재해 온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설인귀는 불상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모사한 뒤 이를 서울로 가져왔다.

서한(西漢) 및 삼국 시대의 지리 문헌을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바깥에 위치하였고 한나라 유주에 속한 지역이라고 전한다. 다만 고구려의 성왕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이를 동명성제로 보는 설도 있으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듯하다. 동명성제는 전한 원제 건소 2년(B.C. 37)에 즉위하여 성제 홍가 임인(B.C. 19)에 세상을 떴다. 이 시대에는 한나라에서도 패엽(貝葉)을 접하기 어려웠으니, 고구려의 신하가 산스크리트어 문자를 알아볼 리 만무하다. 하지만 부처를 포도왕이라 부른 기록을 보면, 서한 시대에도 서역 문자를 이해했던 학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범서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고전 속에는 아육왕이 신령들에게 명하여 인구 아홉억 명이 사는 지역마다 탑 하나씩을 세우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염부제 안에 총 8만4천 개의 탑을 세웠으며, 이러한 유물들은 후에 큰 돌 속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난 바 있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가리키는 감응의 깊이를 헤아리기가 여전히 어렵다.

이를 기리며 읊는다.

아육왕의 보탑은 속세의 이곳저곳에 세워졌으니,  
비에 젖고 구름 속에서 묻혀 이끼 무늬 생기네.  
돌이켜 생각해 보매, 그 시절 길손의 눈길은  
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 가리켰나.

 

■ 금관성의 파사석탑 

금관에 위치한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과거 이 지역이 금관국으로 있었을 당시, 시조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동한 건무 24년 갑신년(서기 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실어 가져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는 부모의 명에 따라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했으나, 수신의 노여움을 사서 항해를 지속할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왔다. 이를 부왕께 아뢰자, 부왕은 탑을 배에 실어 가라고 조언했다. 이후로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배를 멈추었다. 당시 배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내걸었으며, 아름다운 보석들을 실은 모습이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그 지역을 주포(珠浦)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공주가 처음으로 비단 바지를 벗었던 곳은 능현이라 불리고, 붉은 깃발이 처음 해안으로 들어왔던 곳은 기출변이라 이름 지어졌다.

수로왕과 허황후가 함께 나라를 다스리며 보낸 세월은 150여 년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이 지역에는 절이 세워지지 않았으며, 불법(佛法)을 신봉하는 문화도 자리 잡지 못했는데, 이는 대개 상교(상像敎=불교)가 그곳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가락국 본기에는 절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제8대 질지왕 재위 시기인 452년(임진년)에 이르러 비로소 절이 세워졌고, 왕후사를 포함하여 오늘날까지 복을 기원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남쪽 왜국을 평정했다는 사실도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파사석탑은 네 면으로 이루어진 5층 구조로, 조각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다. 탑의 돌에는 희미하게 붉은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품질이 훌륭하며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돌이 아님이 분명하다. 본초 관련 문헌에는 "닭 벼슬의 피로 시험하여 진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적혀 있어, 이것이 바로 그 돌임을 알 수 있다. 금관국을 곧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가락국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시를 읊는다:

염을 실어 나른 붉은 돛배, 깃발도 경쾌히 펄럭이고  
신령께 빌고 또 빌어 거친 바다를 헤치며 왔으니  
어찌 황옥만 도우려 이곳 언덕에 닿았겠는가.  
천년 동안 왜국의 노경(노鯨)을 막고자 한 뜻이라네.  


■  고구려의 영탑사 

고승전에 따르면, "중 보덕의 자는 지법이며, 전 고려 용강현 출신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본문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보덕은 평양성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노승이 찾아와 불경 강의를 요청했다. 스님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끝내 마지못해 응하며 열반경 40여 권의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를 마친 후, 그는 성의 서쪽에 위치한 대보산 바위굴 아래에서 좌선을 하게 되었다. 이때 한 신인이 나타나 말했다.  
"이곳에 머무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나서 석장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땅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곳을 파면 8면으로 된 7층 석탑이 있을 것이오."

보덕이 땅을 파보니 말대로 석탑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를 영탑사라 이름 지었다. 이후 그곳에서 생활하며 수행을 이어갔다.


■ 황룡사의 장륙존상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즉위 14년 계유년(553년) 2월, 왕은 용궁 남쪽에 대궐을 건설하려 계획했다. 그런데 황룡이 나타나자, 계획을 변경하여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를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기축년(569년)에 담을 쌓기 시작해 17년 만에 완공되었다.

얼마 후, 남쪽 바다에서 커다란 배 한 척이 항해해 와 하곡현 사포와 울주의 곡포에 도착했다. 배를 조사해보니 공문이 동봉되어 있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축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모니의 존상을 세 개 만들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에 이 재료들을 배에 실어 바다에 보내며 기원하기를, 부디 인연이 있는 땅에서 장육존상이 완성되기를 바란다."  
또한 부처의 상과 보살상 두 개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이에 현의 관리가 이 문서를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고을 성 동쪽의 깨끗한 땅을 선정해 동축사를 세우고 불상들을 모시도록 했다. 이후 금과 쇠를 도성으로 옮겨 진식(남조 진나라 선제 시절) 태건 6년 갑오년(574년)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했다. 작업은 신속히 진행되었으며, 장육존상의 무게는 3만5천7근으로 황금 1만109푼이 들었다. 두 보살상은 각각 쇠 1만2천 근과 황금 1만136푼이 소요되었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다.

그 이듬해, 불상의 눈에서 발꿈치까지 눈물이 흘러 땅이 한 자 깊이로 젖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는 대왕의 승하를 암시하는 징조였다. 한편, 일부에서는 이 불상이 진평왕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된 이야기다.

또 다른 기록(별본)에는 이렇게 전해진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고대 인도의 한 나라)에서 석가모니 열반 후 100년에 태어났다. 그는 생전에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며 금과 쇠를 모아 세 차례 불상 제작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 태자만이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니 왕은 이유를 물었다. 이에 태자는 "혼자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타당하다고 여긴 왕은 재료들을 배에 실어 바다로 떠나보냈다.

그 배는 남염부제(남인도)의 16개의 대국, 500개의 중국, 10천의 소국, 8만의 촌락 등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모두 불상 주조에 실패했다. 마침내 신라에 도착해 진흥왕 시대에 문잉림에서 불상이 주조되었고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이로써 아육왕의 근심도 해소되었다고 전한다.
후에 대덕 자장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끝에 오대산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문수보살의 헌신적인 감응을 받아 비결을 전수받았고, 문수보살은 그에게 부탁의 말을 전했다.

너희 나라의 황룡산은 석가모니와 가섭불이 강의하던 성스러운 장소이며, 그때 사용된 연좌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런 연유로 인도의 무우왕, 곧 아쇼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이는 약 1,300여 년 뒤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형성되고 그 절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는 모두 위덕의 인연 덕분에 이루어진 일이다.

불상이 완성된 후에는 동축사의 삼존불 역시 황룡사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사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진평왕 5년 갑진(584년)에 황룡사의 금당이 완성되었고, 선덕왕 때 이 절의 초대 주지는 진골 환희사가 맡았으며, 제2대 주지는 국통 자장이었고, 그다음은 국통 혜훈, 그리고 그 후에는 상률사가 이었다."

하지만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이어진 병화 이후, 황룡사의 대형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사라지고, 작은 석가상만이 간신히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감회를 담아 아래와 같이 읊는다.

이 세상 어디나 참된 고향 아니랴만,  
향화의 인연은 이 나라가 으뜸이로다.  
그것은 아육왕이 시작 못 한 일이 아니거니와,  
월성의 옛 터를 찾으려 함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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