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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상 2. 황룡사, 홍륜사, 중생사


■ 황룡사의 9층탑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636년, 당나라 정관 10년 병신년)에 자장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떠났다. 그는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법을 전수받았는데, 문수보살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 국왕은 천축(인도)의 크샤트리아(찰리종) 계급 출신의 왕으로, 이미 부처님의 예언을 받았으므로 동이(동아시아 변방의 야만족으로 여겨진 이들)의 종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그 나라의 험난한 산천으로 인해 성품이 거칠고 방탕하며 사악한 믿음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간혹 하늘의 신들이 내려오기도 하지만, 다행히 법문을 많이 들어 아는 다문비구가 나라 안에 있어 군신이 평화롭고 백성이 안녕을 누리고 있다."

이 말을 남기고 문수보살은 홀연히 사라졌다. 자장법사는 이를 대성(大聖, 위대한 성인)의 변화를 깨닫고 크게 슬퍼하며 물러났다. 중국 대화지 근처를 지나던 그는 갑자기 신인을 마주치게 되었다. 신인이 물었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

"보리(깨달음의 길)를 구하러 왔습니다."

자장의 대답을 들은 신인은 그에게 절하며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는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자장은 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접하고 남쪽으로 왜국과 인접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는 등 외세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이에 신인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 그대 나라에는 여인이 왕위에 있어 덕은 있지만 위엄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웃 나라들이 침략을 꾀하는 것이다. 그대는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자장이 물었다. "그러면 고국에 돌아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신인은 답했다. "황룡사에서 호법용(나라를 지키는 불법의 용)은 바로 나의 큰아들로, 그는 범왕(불교를 수호하는 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에서 나라를 보호하고 있다. 고국에 돌아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라.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고, 9한(한반도 내 여러 부족이나 세력)이 조공을 바쳐 왕업이 길이 평안할 것이다. 탑을 세운 후 팔관회를 열어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감히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나를 위해 경기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세우고 내 복을 빌어주면 나도 은덕에 보답하겠다."

그 말을 마치고 신인은 옥을 자장에게 건네준 뒤 사라졌다. 이후 신과 같은 존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자장은 종남산 원향선사에게 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듣고 이를 깊이 마음에 새겼다.

정관 17년 계묘년(643년),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 등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황룡사 9층탑 건립에 대해 선덕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여러 신하와 상의하였다. 신하들은 말했다.

"이 공사를 위해서는 백제에서 기술자를 초빙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사람을 보내 기술자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아비지라는 장인이 명령을 받고 신라로 와서 목재와 석재를 점검했으며, 이간 용춘이 건립 책임을 맡았다. 수백 명의 소匠(기술자)을 거느리고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아비지는 작업 중 마음속 의혹이 생겨 일을 중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졌다. 이때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철반 위쪽의 높이는 42척, 철반 아래쪽의 높이는 183척이다.  
자장은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백 알을 탑 기둥 안과 통도사의 계단(스님이 계戒를 받는 장소) 그리고 대화사의 탑에 나눠서 모셨다. 이는 용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탑을 세운 뒤로 천지가 조화를 이루고 삼국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이것이 탑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후, 고구려의 왕이 신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며 물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의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고구려의 왕은 결국 공격 계획을 포기했다. 주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나라가 감히 주나라를 넘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와 유사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이에 시로 찬미한다.  

귀신이 떠받드는 듯 황제가 머무는 도성을 누르니,  
찬란한 금빛으로 처마가 빛나며 움직이는 것 같네.  
이곳에서 어찌 삼한만의 항복을 바라겠는가!  
하늘과 땅이 평온해지는 이치를 이제야 깨닫는다.  

또한,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서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신라 제27대 여왕이 즉위했으나, 비록 도덕은 있으나 국위와 위엄이 부족해 외세의 침입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황룡사 남쪽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탑이 세워졌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다."  

또한 《국사》 및 사원의 <사중고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 14년(553) 계유년에 황룡사를 처음 세웠으며, 선덕왕 정관 19년 을사(645)년에 이르러 탑이 완성되었다. 이후 효소왕 즉위 7년 성력 원년(698) 무술년에 벼락을 맞았고, 성덕왕 경신(720)년에 다시 복구되었으나, 경문왕 무자(868)년 벼락을 두 번째로 맞아 재건하였다. 고려 광종 즉위 5년(953) 계축년 10월에는 세 번째로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1021) 신유년에 네 번째 중수를 거쳤다. 정종 2년(1035) 을해년에는 또 네 번째로 벼락을 맞아 문종 갑진(1064)년에 다섯 번째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현종 말년 을해(1095)년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 원년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복구했으나, 고종 16년 무술(1238) 겨울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탑과 장육존상 및 사찰 건물 전체가 모두 파괴되는 재앙을 겪었다."  

 

■ 생의사의 돌미륵 

선덕여왕 시대, 생의라는 승려는 늘 도중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남산에 올라가 풀을 묶어 표시를 하게 한 뒤, 남쪽 골짜기로 이끌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께서는 나를 파내어 고개 위에 편히 안장해 주십시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친구와 함께 그 골짜기로 향하였다. 표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보니, 그곳에서 돌로 된 미륵불이 나왔다. 이들은 그것을 삼화령 위로 옮겨 모셨다. 이후 선덕여왕 13년(644년)에 그곳에 절을 세웠으며, 절의 이름을 후에 생의사라 불렀다고 한다.  

 

■ 홍륜사 벽에 그린 보현보살 

제54대 경명왕의 치세 동안, 홍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두 승려, 정화와 홍계가 시주를 받아 장차 복구 공사를 진행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정명 7년 신사년(921년) 5월 15일, 제석신이 이 절의 왼쪽 경내에 내려와 열흘간 머물렀다. 그 기간 동안 전탑을 비롯한 풀, 나무, 흙, 돌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기고, 절을 감싸는 오색 구름이 나타났다. 또한, 남쪽 연못의 물고기와 용들도 기쁨에 겨워 뛰노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한데 모여 이 전에 없던 기이한 현상에 놀라 경탄하며 옥과 비단, 곡식을 시주했는데, 그 양이 산처럼 쌓였다. 공교롭게도 장인들 또한 자연스레 모여들어 단 하루 만에 복구 공사가 완성되었다. 수리가 마무리된 후 제석신이 돌아가려 하자, 두 승려가 간청했다.

"천제께서 궁중으로 돌아가시려 한다면, 저희에게 천제님의 얼굴을 그려 공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를 통해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 초상을 여기에 모셔 세상의 평안을 오래도록 기원하게 하소서."

이에 제석신이 대답하였다.

"나의 바람과 능력은 보현보살의 깊고 묘한 조화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보현보살의 형상을 그려 공경하며 공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정성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두 승려는 제석신의 가르침에 따라 보현보살의 상을 벽에 정성껏 그리고 그 모습을 공양하였다. 이 화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 삼소관음과 중생사 

신라 고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중국의 한 천자가 어여쁜 여인을 총애했는데, 그 여인의 미모가 뛰어나 천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금의 그림들 중에서도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에 천자는 그림 솜씨가 뛰어난 화공에게 여인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도록 명령했다. 화공의 이름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장승요라는 설이 있다. 장승요는 오나라 사람으로 양나라 천감 연간에 무릉왕국의 시랑, 직비각지화사로 봉직했으며 훗날 우장군과 오흥태수를 지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천자는 양나라와 진나라 무렵의 황제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당나라 황제라고 전해 내려오는 이유는 조선의 사람들이 중국을 통칭하여 '당'이라고 쉽게 부르던 관례 때문일 것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어떤 시대의 황제였는지는 알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 화공은 천자의 명령을 받고 그림을 완성했다. 그러나 작업 중 실수로 붓이 떨어져 배꼽 아래쪽에 붉은 점을 찍고 말았다. 이를 지우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화공은 그 점이 원래부터 여인의 몸에 있었을 가능성을 떠올린 후 그림을 그대로 올렸다. 이 그림을 본 황제는 분노하며 말했다.

“외형은 실물과 똑같으나 어찌하여 숨겨진 배꼽 아래의 점까지 알았단 말이냐?  ”

황제는 화공을 크게 꾸짖으며 그를 옥에 가두고 처벌하려 했다. 이때 승상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매우 정직한 자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황제는 시험 삼아 말했다.

“만약 저 사람이 성실하고 곧은 자라면, 내가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사람을 그려 바치게 하라. 꿈과 같다면 용서하겠다.”

이에 화공은 십일면관음보살의 형상을 그려 황제에게 바쳤고, 그림은 황제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이에 황제는 마음을 누그러뜨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죄를 벗어난 화공은 박사 분절과 함께 다음과 같은 약속을 나누었다.

“내가 듣기로 신라국에서는 불법에 귀의하여 이를 숭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로 가서 불사를 닦아 그곳의 백성들에게 이익을 베푸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두 사람은 신라로 건너와 이곳의 중생사에 관음보살상을 제작했다. 나라 백성들은 이 보살상을 두고 기도했고, 그 복덕의 결과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신라 말년인 천성 연간(926-929), 정보 최은함은 오랜 세월 아들이 없었기에 절의 관음보살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기도 끝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석 달도 지나지 않아 후백제의 견훤이 서울을 침략하며 성 안이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최은함은 어린 아들을 안고 이 절로 피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웃 나라의 군사들이 갑작스럽게 쳐들어와 급한 상황입니다. 이 아이로 인해 누군가에게 화를 입힌다면, 저와 아이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대성께서 이 아이를 저희에게 주신 것이 진실이라면, 간절히 바라건대 큰 자비를 베푸셔서 아이를 보살펴주시고, 저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세 번 간곡히 기도한 후,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의 예좌 아래 숨겼다. 슬픈 마음으로 떠난 뒤 반 달이 지나 적병이 물러가자 다시 돌아와 아이를 찾았다. 놀랍게도 아이의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처럼 맑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스러워졌으며, 입에는 아직도 젖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와 키우면서 보니, 아이는 자라며 비범한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지녔다. 이 아기가 바로 승로로, 그는 벼슬이 정광의 자리까지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 최숙을 낳았고, 숙은 낭중 제안을 낳았다. 그 후로 이 가문의 자손은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과 함께 고려로 들어와 대성의 가문이 되었다.

통화 10년(992) 3월, 절의 주지 중인 성태는 보살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제가 이 절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향화를 받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절의 토지가 부족하여 향사를 지속하기 어려우니,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며 이곳을 떠나려 합니다.”

그날 성태는 잠시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관음대성이 나타나 말했다.

“법사는 아직 이곳에 머물며 떠나지 마시오. 내가 직접 시주를 해서 향사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충당해 주겠소.”

꿈에서 깨어난 성태는 큰 기쁨을 느끼며 절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기로 했다. 그로부터 13일째 되던 날,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소에 물건을 실어 절의 문 앞에 도착했다. 절의 스님이 나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금주 지방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 어떤 스님이 찾아오길, 자신은 동경 중생사의 스님이며 제사용 네 가지 물품(북, 음식, 침구, 탕약 등)을 마련하기 어려워 시주를 구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 마을에서 시주를 모아 쌀 여덟 섬과 소금 네 섬을 가져왔습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우리 절에서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아마도 잘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했다. 한 스님이 우리를 데리고 오다가 이 신기한 우물가에 이르러 "목적지가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말대로 따라왔던 것입니다.

이에 절의 스님은 그들을 데리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관음보살상을 바라보며 공손히 절하고 서로 속삭였다.  
"이 부처님이 바로 우리를 데리고 왔던 스님의 모습 그대로야."  
이렇게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하여 이 절에는 해마다 끊임없이 쌀과 소금이 시주되었다.

또 어느 날 밤, 절 대문 근처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이 급히 달려와 불을 껐다. 그런데 법당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사라져 있었다. 궁금해 찾아보니 뜰 한가운데 서 있었다. 누가 밖으로 옮겼는지 물었지만, 아무도 그런 이가 없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관음보살의 신령스러운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정 13년(1173년)에 이르러, 한 중인 점숭이 이 절에 살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글을 읽거나 쓰지는 못했으나, 본래 성품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항상 부지런히 향을 올리고 염불을 드렸다. 그러던 중 어떤 다른 중이 이 절을 차지하려고 하자, 점숭은 친의천사에게 이러한 사정을 호소했다.  
"이 절은 국가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곳이니,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를 뽑아 맡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천사는 그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점숭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글을 거꾸로 된 상태로 써서 내밀었다. 그런데 점숭은 그것을 받아 들고 막힘없이 읽어 나갔다. 이에 천사는 마음속으로 크게 놀랐으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조용히 앉아 그에게 똑같은 글을 또 읽어 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점숭이 전혀 읽지 못하고 침묵했다. 이를 본 천사는 말했다.  
"상인은 진정으로 관음보살의 가호를 받는 분이군요."

그렇게 하여 끝내 이 절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당시 점숭과 함께 이 절에 거주하던 처사 김인부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주었고, 이를 기록으로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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