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 오대산의 5만 진신 

산중의 고전을 살펴보면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이산이 문수보살의 거처로 여겨지게 된 것은 자장법사부터 시작되었다. 자장법사는 신라 선덕왕 시절, 정관 10년(636년)에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당나라로 향했다. 그는 중국 오대산에 도착해 경건한 마음으로 7일간 기도했는데, 그때 문득 꿈속에서 부처가 네 구절의 게(偈)를 전해 주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그 글귀만은 기억했지만, 게가 모두 범어로 되어 있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한 중이 붉은 비단에 금빛 점이 찍힌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발우(바리때), 그리고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다가와 자장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자장은 "꿈에서 네 구절의 게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 풀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중은 자장이 전한 게를 듣고 번역하며 이렇게 말했다.

"‘가라파좌낭’은 '일체의 법을 깨달은’이라는 의미이고, ‘달예다거야’는 '본래 성품에는 아무것도 없다’를 뜻합니다. ‘낭가사가낭’은 '이와 같이 법성을 깨달았다’를, '달예노사나’는 '노사나불(부처의 진신)을 곧 본다’를 의미합니다."

중은 이어 자신이 가져온 가사와 물건들을 자장법사에게 넘기며 부탁했다. "이것은 석가세존께서 사용하시던 물건들이니 잘 보관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고국 동북쪽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문수보살께서 항상 그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돌아가면 그곳을 찾아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고 중은 이내 사라졌다.

자장은 문수보살의 유적지를 두루 돌아본 후 귀국을 준비하던 중, 태화지에 사는 용이 나타나 공양을 청하며 7일 동안 제사를 지냈다. 용은 자장에게 "이전에 게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문수보살입니다"라고 말하며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정관 17년(643년), 자장은 강원도의 오대산에 도착해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기 위해 기도했으나, 계속된 어둠과 안개로 인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 원녕사에서 머물며 비로소 문수보살을 만나게 되었다.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칡덩굴이 엉킨 곳으로 가라"고 알려주었고, 자장은 그곳에 도착해 정암사를 세웠다. 이 일화 역시 별전에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 후, 자장의 뒤를 이은 두타 신의는 범일대사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왔고, 자장이 머물렀던 곳에 암자를 지어 살았다. 신의가 세상을 떠난 뒤 암자는 오랫동안 스러져 있었으나, 수다사 장로 유연이 다시 암자를 새로 짓고 생활했는데, 오늘날 월정사이다.

자장 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진신대왕의 두 태자 보천과 효명을 만났다. 그날 저녁, 그는 세헌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넘은 뒤 각각 천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성오평에 도착했다. 몇 날 며칠 유람을 즐기던 중, 두 형제는 속세에서 벗어나기로 몰래 결심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대산으로 도망쳤다. 이로 인해 시위들은 그 행방을 알 길이 없어 수도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렀을 때, 땅 위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발견했다. 형은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머물며 이를 '보천암'이라 불렀다.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약 600보를 걸어가자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서도 푸른 연꽃이 피어 있었다. 아우 효명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며 각기 자신의 수행에 전념했다.

어느 날, 두 형제가 나란히 다섯 봉우리로 참례하러 올랐다. 동쪽 대인 만월산에서는 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났고, 남쪽 대인 기린산에서는 팔대보살을 필두로 한 만 지장보살의 진신이 현현했다. 서쪽 대 장령사나에 이르러서는 무량수여래를 중심으로 대세지보살의 진신이 나타났으며, 북쪽 대 상왕산에서는 석가여래를 필두로 한 500명의 대아나한이 현현했다. 중앙에 위치한 풍로산, 일명 지로산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만 문수보살의 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태자는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들 앞에 일일이 참례했다.

매일 아침이면 문수보살은 현재 '상원', 옛 '진여원'에 나타나 36가지 모습으로 변하곤 했다. 때로는 부처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때로는 보주(寶珠)의 모습으로, 혹은 부처의 눈이나 손 그리고 보탑과 같은 형태로도 변했다. 또 만불두, 만등, 금교, 금고, 금종, 금루, 금륜과 같은 형태로 나타났으며, 금강저나 금옹, 금비녀 또는 오색 광명과 원광으로도 모습을 바꿨다. 길상초, 푸른 연꽃, 금전(절)이나 은전(도량)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처의 발이나 뇌전(雷電) 또는 여래가 솟아나는 모습, 지신(地神)이 나오는 형태로 변하기도 했다. 또한 금봉(金鳳), 금오(金烏), 말이 사자를 낳는 모습, 닭이 봉을 낳는 모습, 청룡이나 백상(白象), 까치 모양으로도 변형되었다. 심지어 소가 사자를 낳거나 유저(遊猪), 청사(靑蛇)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두 태자는 산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을 올렸고, 밤에는 각자의 암자에서 스스로 도를 닦으며 수행하는 삶을 이어갔다.
이 시기, 정신왕의 동생이 왕과 왕위를 두고 갈등을 빚자 나라 사람들은 그를 폐위시키고 네 명의 장군을 보내 산속으로 가서 두 태자를 모셔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의 암자 앞에 도착해 환호를 보냈다. 그 순간 오색 구름이 일곱 날 동안 그곳을 뒤덮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 신비로운 구름을 보고 모두 모여들어 의전을 준비하며 두 태자를 맞이하려 했으나, 보천은 눈물을 흘리며 왕좌를 사양했다. 이에 효명을 왕으로 세워 귀환시켰으며, 그는 여러 해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신룡 원년 을사(갑사)해 3월 초 나흘날에 이르러 효명이 진여원을 재정비하고 설립하였다. 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 예배당을 세운 뒤, 문수보살의 신상을 만들어 신전에 봉안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지식, 영변을 포함한 다섯 인물에게 화엄경을 오래도록 독송하게 했으며, 화엄사를 설립하여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매년 봄과 가을이면 인근 주현에서 창고 세금 백 석과 정유 한 섬을 바치도록 규칙을 제정했다. 또한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약 6천 보 떨어진 모니점 고이현 외곽까지에 걸쳐 15결의 땔감 채취지, 6결의 밤나무밭, 2결의 좌위지를 배정하여 장사에 활용했다.

보천은 평소 영동의 물을 애용하며 마셨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몸이 허공을 떠다닐 정도로 도를 닦았다. 그러다 유사강 밖 울진국 장천굴에 이르러 머물며 밤낮으로 수구다라니경을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이에 장천굴의 신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이 굴의 신으로 2천 년을 살았으나, 오늘 처음으로 수구다라니경의 진리를 들었습니다."  

신은 보살계를 청하며 이를 받았고, 그 다음날 굴마저도 형체를 감췄다. 이에 보천은 크게 놀라고 기이히 여겨 그곳에 20일간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갔다. 이후 그곳에서 다시 50년간 정성을 다해 심신을 수련했으며, 도리천의 신이 세 차례 법문을 들으러 왔고, 정거천의 거주 신선들이 차를 준비해 올렸다. 성인 40명은 하늘 높이 날아다니며 그를 호위했고, 그의 지팡이는 하루 세 차례 울림을 내며 그의 방을 세 바퀴씩 돈 후 경쇠와 종소리처럼 학습의 신호로 사용되었다. 때로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부으며, 그가 성불할 것을 예언해주기도 했다.

보천이 입적하던 날, 그는 미래에 나라를 위한 계시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 산은 곧 백두산의 주요 줄기로, 매 곳마다 신성함이 깃들어 있는 장소입니다.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의 방위와 관련하여, 동대의 북쪽 경계 아래와 북대 남쪽 기슭 끝에는 관음방을 건립하되, 원상 관음보살과 더불어 푸른 바탕 위에 그려진 만관음보살상을 봉안하라. 복전승 5명을 배치하여 낮에는 8권의 금경(나라를 수호하는 경전)과 인왕반야경, 천수주를 낭독하게 하고, 밤에는 관음경과 예참을 염송케 하며, 이곳을 원통사라 칭하라.

남쪽을 의미하는 붉은 빛 방위와 관련하여, 남대 남쪽 면에 지장방을 두고, 원상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려진 8대보살을 중심으로 한 만지장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경 예참을 염송하도록 하여 이곳을 금강사라 명명하라.

서쪽을 상징하는 백색 방위와 관련해서는 서대 남쪽 면에 미타방을 설치하여, 원상 무량수불과 흰 바탕 위에 그려진 무량수여래를 중심으로 한 만대세지보살상을 모시게 하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8권의 법화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아미타불 예참을 염송하도록 하며, 이곳은 수정사라 부르도록 하라.

북쪽을 나타내는 검은 빛 방위와 연결하여, 북대 남쪽 면에는 나한당을 설치하고, 원상 석가불과 검은 바탕에 그려진 석가여래를 주축으로 한 500나한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경 예참을 염송하도록 하며, 이곳은 백련사라 명명하라.

황색 방위를 상징하는 중대의 중심부인 진여원에는 중앙에 점토로 제작된 문수보살 불동상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 위에 그려진 비로자나불과 36문수보살상을 봉안하라. 이곳에서는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화엄경과 6백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염송하게 하여 화엄사라 부르도록 하라.

또한 보천암을 재건하여 화장사라 이름 붙이고, 원상 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안치하되 복전승 5명에게는 낮에는 문장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화엄신중 예참을 행하게 하라. 매년 백일 동안 화엄회를 개최하여 이를 법륜사로 칭하고, 화장사를 다섯 대사의 중심 사찰로 삼아 철저히 보호하게 하라. 정행 복전에게 지속적으로 향화를 올리도록 명하여, 국왕의 장수와 백성의 평안을 도모하며, 문무 백관의 화평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게 하라.

또한 하원에는 문수갑사를 배치하여 본 사찰이 도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며, 복전승 7명을 두어 밤낮으로 화엄신중 예참을 지속적으로 행하게 하라. 이러한 설비와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은 하서부도 내 8주의 조세로 충당토록 하여 각종 필수 자금을 조달할 것을 명하시기 바라니, 이렇게 역대 임금들이 이를 잊지 않고 꾸준히 실천한다면 매우 길상스러운 일이 될 것이니라.


■ 명주 오대산 보질도태자 전기 

신라 정신왕의 태자 보즐도(보천)는 동생 효명태자와 함께 하서부의 세헌각간 집에 머물러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대령을 넘어 각각 1천 명의 인원을 거느리고 성오평에서 며칠간 머물렀다. 이후 태화 원년 8월 5일에 형제는 함께 왜산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당시 그를 따르던 무리들 중 일부는 형제의 행방을 찾지 못한 채 모두 서울로 되돌아갔다.

형이었던 보즐도 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에 위치한 진여원 아래 산기슭에서 푸른 연꽃이 핀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풀로 암자를 지어 머물기 시작했다. 두 형제는 매일 부처님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에 전념했으며,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臺)를 순례하며 공경과 예배를 올렸다.

동쪽 청색 방위의 만월형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 만 명이 항상 존재했고, 남쪽 적색 방위의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중심으로 한 만 명의 지장보살이 머물렀다. 서쪽 백색 방위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와 대세지보살의 무리가 있었으며, 북쪽 흑색 방위 상왕산에는 석가여래와 함께 500명의 대아라한이 상주했다고 한다. 황색 방위 중앙대의 풍로산(지로산이라 불리기도 함)에는 비로자나불과 만 명의 문수보살이 있었다.

진여원에서는 매일 새벽 문수보살이 36가지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두 태자는 매일 이른 아침 골짜기의 물을 길어 차를 끓여 문수보살 진신 만 명에게 공양하며 수행을 이었다.

한편, 정신태자의 두 친척 가운데 한 명이 서울에서 왕위를 다투다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신라 사람들은 네 명의 장군을 오대산으로 보내 효명태자를 찾아냈고, 그를 만나며 만세를 외쳤다.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 신라까지 뻗쳐 7일 7야 동안 빛을 발했으며, 사람들은 그 빛을 따라 오대산으로 와 두 태자를 찾은 후 서울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보즐도 태자는 돌아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며 눈물 흘렸고, 효명태자를 대신 왕위에 오르게 했다. 효명태자는 왕위에 오른 후 약 20년간 통치했으며, 신룡 원년(705) 3월 8일에 진여원을 설립했다고 한다.

그 후 보즐도 태자는 신령한 골짜기 물을 마시며 수행을 이어갔는데, 점차 신통력을 얻어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사강을 건너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고, 다시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와 50여 년 동안 수행했다.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 이어지는 산맥이며, 각 대(臺)마다 항상 보살이나 신령한 존재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 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중 

절 안에 전해 내려오는 고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장법사가 처음 오대산에 도착했을 때,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작은 초막을 지어 머물렀다. 그러나 7일 동안 아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자 묘범산으로 옮겨가 정암사를 세웠다. 이후 한 신효거사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는데, 그는 유동보살의 화신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효거사는 공주에 살았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고기 없이는 밥을 먹지 못했기에 거사는 어머니를 위해 고기를 구하러 다녔다. 어느 날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발견하고 활로 쏘았으나, 겨우 한 마리의 깃 하나만 떨어지고 나머지 학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신효거사가 떨어진 깃을 주워 그것으로 눈을 가리자,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결국 고기를 얻지 못한 그는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도려내어 어머니께 드렸다. 이후 그는 집을 내놓아 절을 짓고 승려가 되었다. 그 절이 바로 오늘날의 효가원이다. 

거사는 경주 부근에서 하솔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다시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들을 보니 이번에는 모두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보였다. 이에 그는 그곳에 정착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길에서 우연히 한 노부인을 만나 생활할 만한 좋은 장소를 물었더니,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이 좋습니다." 부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사라졌고, 거사는 그것이 관음보살의 인도임을 깨달았다. 즉시 성오평을 지나 자장법사가 처음 초막을 지었던 장소로 들어가 머물렀다.

잠시 후, 다섯 명의 승려가 찾아와 물었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그들은 다시 말했다. "그대가 주워 눈을 가리고 사용한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였소." 이에 거사가 깃을 내놓자, 승려 중 한 명이 가사의 찢어진 부분에 가져다 대었더니 꼭 들어맞았다. 그런데 그것은 깃이 아니라 옷감 조각이었다. 거사는 그들과 작별한 뒤에야 그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월정사는 자장법사가 처음 세운 초막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신효거사가 머물렀고, 그다음에는 범일국사의 제자인 신의 두타가 암자를 짓고 생활하였다. 나중에는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머물게 되었으며, 이처럼 점차 확장하여 지금의 큰 절로 발전하게 되었다. 월정사의 다섯 성중과 9층 석탑은 모두 대성인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능한 어느 지관이 말하기를, "나라 안의 명산 가운데 이곳이 가장 길지(吉地)로, 불법(佛法)이 길이 흥성할 장소이다"라고 하였다.


■ 남월산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금당주 미륵존상 화광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개원 7년 기미년(719년) 2월 15일, 중아찬 전망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을 위해 정성을 다해 감산사의 돌미륵 하나를 제작하였다. 또한, 이 공덕을 통해 개원 이찬, 아우 간성 소사, 현도사, 누이 고파리, 전처 고노리, 후처 아호리와 서형 급한 일길찬, 일당 살찬, 총민 대사, 그리고 누이동생 수힐매 등에게까지 보탬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를 실행하였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곳을 동해유우변산야라 불렀다.

미타불 화광의 기록에서는 중아찬 김지전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김지전은 과거 상의봉어와 집사시랑이라는 관직에 몸담고 있었으나, 67세에 벼슬을 내려놓고 집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국왕 및 이찬 개원과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 양성, 사문 현도, 돌아가신 아내 고로리, 누이동생 고파리, 그리고 현재의 아내 아호리를 위해 감산사의 재산 일부를 내어 절을 세웠다. 나아가 석미륵 하나를 조성하여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에게 공양했으며, 그로 인해 이곳을 동해유우변산야라 칭하게 되었다.


■ 천룡사 

경주 남산의 남쪽에는 하나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사람들은 이를 고위산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는 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속칭 고사 또는 천룡사라 한다. 

《토론삼한집》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계림에는 두 줄기의 객수(외지에서 흘러온 물)와 한 줄기의 역수가 있는데, 이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하늘의 재앙)를 막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민간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역수는 이 고장의 남쪽에 위치한 마등오촌의 남쪽을 흐르는 시내로, 그 근원은 천룡사에서 시작된다. 중국에서 온 사자(使者) 악붕귀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하였다."

또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과거 단월(시주자)이었던 한 부부에게 천녀와 용녀라는 이름의 두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 부모는 딸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며, 그 이름을 따서 천룡사라 명명했다.

이곳은 경치가 뛰어나고 불도를 닦기에 이상적인 도량이었으나, 신라 말기 폐허가 되어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 그러던 중 중생사의 관음보살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의 후손 승로가 태어났고, 그가 숙을 낳아 이어 제안을 낳았다. 제안은 이 절을 다시 중수하여 사라졌던 천룡사를 되살렸다. 더불어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고 이를 조정에 보고했으며 신서와 원문을 절 안에 남겼다. 제안은 세상을 떠난 후 이 절을 지키는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신기한 일들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남긴 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월이자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주국인 최제안이 서술한다. 경주 고위산의 천룡사는 쇠락하여 파괴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이에 나는 국가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며 전당, 낭각, 방사, 주고 등을 이룩하고, 석조불상과 이소불상을 몇 구 제작하여 석가만일도량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이미 이 절을 나라를 위해 복원했으니 관가에서 주지를 임명해 보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주지가 자주 교체될 경우, 도량의 승려들이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희사된 토지가 절의 유지와 충족에 기여하는 것을 보면 팔공산 지장사는 200결, 비슬산 도선사는 20결, 서경 사면의 여러 산사들도 각각 20결씩 보유하고 있었다. 모두 직책 여부를 막론하고 반드시 계율을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중망(衆望)에 따라 주지로 임명해왔다. 이에 나는 천룡사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 절의 승려들 중 덕망과 재능을 겸비한 고승을 선발하여 영구히 분향수도하게 하고자 한다."

"이를 자세히 문서로 남겨 강사에게 맡겨 두었으며, 이후 새로이 임명된 주지들은 유수관의 공문을 통해 이를 도량의 여러 승려들에게 알릴 것이다. 모든 승려는 반드시 이를 숙지해야 할 것이다."

신서에는 중희 9년 6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중희는 거란 홍종의 연호이며, 이는 우리나라 정종 7년 경진년(1040년)이다.


■ 무장사의 미타전 

서울(경주)에서 동북쪽으로 약 20리 떨어진 암곡촌 북쪽에는 무장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절은 신라 제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인 대아간 효양, 즉 추봉된 명덕대왕이 숙부 파진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그윽한 골짜기는 주변 지형이 마치 깎아 세운 듯 험준하며, 골짜기 깊숙히 들어서면 어둡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마음이 비워지고 깨끗해지는 허백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이곳은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기기에 더없이 신령스러운 장소였다.

절 위쪽에는 아미타불과 관련한 고전적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소성대왕의 비였던 계화황후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큰 슬픔에 잠겨 피눈물을 흘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아름답고 바른 일을 함으로써 대왕의 명복을 빌기로 결심했다. 당시 서방에 아미타라는 부처가 있으며, 지성을 다해 귀의하면 구원받아 극락으로 인도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후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스스로를 속일 수 있겠는가!"라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입던 화려한 육의를 희사하고 9부에 보관해 두었던 재물을 풀어 명공들을 불러들여 아미타불의 상을 조성하였다. 또한 신중의 조각상들도 함께 제작하여 절 내에 봉안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무장사에는 한 노승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꿈에서 진인이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들에게 설법을 펼치는 장면을 보았다. 이에 노승은 "이곳은 분명 불법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나,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묵묵히 마음속에 간직했다. 그러나 정작 그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물살이 급해 공인들조차 손대기 어려운 장소로 여겼으며, 다른 사람들 또한 터가 좋지 않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정작 터를 닦기 시작했을 때 평탄한 곳이 나타나 건물을 세우기에 적합한 땅이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크게 놀랐으며, 그 터의 신령스러움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근래에 미타전은 허물어졌지만 절 자체는 여전히 남아 시대를 견뎌내고 있다. 세간에서는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숨겨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백엄사의 석탑사리 

개운 3년 병오(946년) 10월 29일, 강주계(진주)에 전해진 임도대감주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선종의 백엄사는 초팔현에 위치해 있으며, 절에 머무는 중인 간유 상좌는 나이가 39세라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 절이 처음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신라 시대에 북택청 터를 기증받아 이 절을 세웠으나, 이후 한동안 폐허가 되어 방치되었다. 그러던 중 병인년(1026)에 사목곡 양부 화상이 이곳을 중수하여 주지가 되었고, 정축년(1037)에 입적하였다. 을유년에는 희양산의 긍양화상이 와서 이 절에 10년간 머물다가 을미년에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같은 시기, 신탁 화상이 남원의 백암수에서 이곳으로 와 기존의 법도를 따라 주지가 되었다. 또한 함웅 원년(1065) 11월, 주지 득오미정대사 석수림이 절의 상규 10조를 제정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5층 석탑을 세우고, 탑 안에는 진신 불사리 42알을 봉안했다. 이외에도 사재로 보(寶)를 세워 여러 제례와 의식을 규정하였다.

특히 이 규정에는 해마다 공양을 올리며, 절의 법도를 지켰던 경승이었던 엄흔, 백흔 두 명신과 근악 등 세 인물 앞에 보재(寶齋)를 두고 공양하며 금당 약사여래 앞 나무 주발에는 매달 초하루 공양미를 갈아 두도록 정하였다. 그 외 조항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 영취사 

절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신라 진골 출신으로 제31대 신문왕이 통치하던 영순 2년(683년) 무렵,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 온천에서 목욕을 한 뒤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굴정역 동지야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고 한다. 그때 한 사람이 매를 풀어 꿩을 쫓았는데, 꿩은 날아 금악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매의 방울 소리를 따라 추적한 끝에 굴정현 관청 북쪽 우물가에 도달했을 때, 매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고 꿩은 우물 속에 있었다. 우물물은 핏빛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꿩은 두 날개를 펴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놀랍게도 매조차도 이 장면을 보고 측은함을 느꼈는지 꿩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충원공은 깊은 감명을 받아 그 땅의 기운을 점쳤고, 절을 세우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판단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왕에게 전했고, 왕은 현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해당 장소에 절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 절의 이름은 영취사라 불리게 되었다.


■ 유덕사 

신라의 대부각간 취유덕이 자신의 집을 내놓아 절로 삼고, 이를 유덕사라 불렀다. 그의 후손이자 삼한공신 최언위가 유덕의 초상화를 이곳에 걸어 모셨으며, 비석 또한 세웠다고 전해진다.

 

■ 오대산 문수사의 석탑기

문수사 뜰가에 서 있는 석탑들은 대부분 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 제작 기법이 다소 소박하고 정교함은 부족하나, 신기한 영험함이 깃들어 있어 모든 사연을 기록하기는 어렵다. 그중에서도 여러 노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옛날 연곡현의 한 어부가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갑자기 한 탑이 배를 따라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탑의 그림자가 물 위로 드리워지자 물고기들은 놀라 흩어져 버렸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어부는 화가 나서 그림자를 따라가 결국 그 탑을 발견했다. 그는 격분하여 도끼로 탑을 내려쳤고, 그 여파로 현재 탑의 네 귀퉁이가 부서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충격과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그 탑이 동쪽으로 약간 옮겨져 중앙에 위치하지 않은 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현판을 올려다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비구 처현이 일찍이 이 절에 머물면서 탑을 뜰 중앙으로 옮겼더니, 그 후 20여 년간은 어떠한 영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지관(일자)이 이곳을 방문해 탄식하며 '이 뜰 중앙은 탑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리인데, 왜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중들이 깨달아 다시 원래 자리로 탑을 옮겼으며, 현재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면서, 부처님의 위신으로 만물이 감응하는 모습에 경외심을 느꼈다. 불자로서 이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정풍 원년 병자년(1156년) 10월에 있었던 일로, 제자인 백운자가 기록한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