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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興法 1. 불교의 전래 - 순도, 마라난타,  아도화상

 

■ 순도조려(順道肇麗)

고구려 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년(372년)은 동진 함안(咸安) 2년이며, 이 해는 동진 효무제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 불경과 경문을 전달했고, 4년 갑술년(374년)에 아도가 동진에서 고구려로 왔다. 다음 해 을해년(375년) 2월에는 초문사를 지어 순도가 머물게 했고,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그곳에 머물게 했다. 이것이 고구려 불교의 시작이었다.

또한, 《해동고승전》에서는 순도와 아도가 위나라에서 왔다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그들은 전진에서 온 것이 맞다. 그리고 초문사를 현 흥국사라 하고, 이불란사를 현 흥복사라 하였으나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이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를 다른 이름으로 안정홀이라 불렀고, 위치는 요수 북쪽이었다. 요수는 또 다른 이름으로 압록이라 불렸으며, 오늘날에는 안민강이라 부른다. 당시의 국도는 국내성이었는데, 일연의 《지리고증》은 모두 오류로 가득하다. 따라서 송도의 흥국사 명칭이 여기에 있을 리 없다.

이 모든 것을 기리며 한 수 읊는다.

압록강에 봄빛이 깊어 물풀은 곱고, 
백사장에 갈매기들 한가로이 노니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노의 소리, 
어느 곳에서 온 고깃배인가, 나그네는 이미 도착했네. 


■ 마라난타가 백제의 불교를 열다 - 난타벽제(難陀闢濟)

백제본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년(384년)에, 호국(胡國)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건너오자, 이를 맞아들여 궁궐에 머물게 하고 예를 다해 공경하였다.' 
이듬해인 을유년(385년)에는 새로운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열 명의 도승(나라에서 승려 자격을 공인받은 고승)을 배치했는데,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작이다. 

또한, 아신왕은 즉위 17년(372년) 2월에 명을 내려 백성들에게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믿어 복을 구할 것을 권하였다. 여기서 마라난타를 해석하면 '어린 학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기리며 읊는다. 

하늘의 조화는 아득히 오래되었으니, 
그 솜씨는 세속의 시야로 보기가 어렵더라. 
어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곁에 있는 이를 이끌어 눈을 뜨게 하였네. 

 

■ 아도가 신라 불교의 초석을 다지다 - 아도기라(阿道基羅)

신라 본기 제4권에 따르면, 제19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신라 일선군으로 왔다. 이때 일선군에 살던 모례라는 사람이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묵호자를 편히 머물게 했다. 

그즈음, 양나라에서 사신이 의복과 함께 향을 보내왔지만, 신라의 군신들은 그 향의 이름이나 사용법을 알지 못해 나라 안을 두루 돌며 물어봤다. 묵호자는 이를 보고 말했다. "이것은 향이라는 것입니다. 태우면 진한 향내가 퍼지며, 이는 정성이 신성한 곳까지 닿기 때문입니다. 신성함은 삼보(三寶)보다 귀한 것이 없으니, 이 향을 태우고 기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왕녀가 위중한 병에 걸려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게 하고 축원을 하니, 병이 곧 나았다. 왕은 이를 기뻐하며 묵호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내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취를 감췄다.

제21대 비처왕 때, 아도 화상이 세 명의 시자를 데리고 다시 모례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의 모습은 전의 묵호자와 비슷했다. 아도 화상은 몇 해를 그곳에서 머물렀으며, 특별한 병 없이 숨을 거두었다. 이후 시자 세 명은 머물며 경과 율을 강독했고, 점차 불교를 믿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도의 본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고구려 출신으로 어머니는 고도령이라고 불렸다. 고도령은 정시 연간(240~248)에 조위의 사신 아굴마와 관계를 맺어 아도를 낳았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를 출가시켰다. 16세가 되던 해 아도는 위나라에서 굴마를 만나고 현창화상이 강독하는 곳에서 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19세에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는 아직 불법을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3천여 달이 지나면 신라에 성왕이 나와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신라의 서울에는 일곱 곳의 가람 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이고, 둘째는 3천의 갈래, 셋째는 용궁의 남쪽, 넷째는 용궁의 북쪽, 다섯째는 사천의 신유림, 일곱째는 서청전이다. 이곳들은 모두 전불(석가모니 이전 부처)의 가람 터로, 앞으로 불법이 전파될 곳이다. 그러니 너는 그곳에 가서 대교를 전하면 불교의 개조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들은 아도는 계림으로 건너가 왕성 서쪽 마을에 정착했다. 이는 지금의 엄장사이며, 당시 미추왕 즉위 2년 계미년(263년)이었다.

아도는 궁궐로 들어가 불교를 전하고자 청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일이었기에 이를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는 자들까지 있었다. 결국 아도는 산속으로 도망쳐 숨어 지내게 되었다. 미추왕 3년, 성국 공주가 심한 병에 걸려 무당과 의원에게 치료를 맡겼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에 왕은 사방으로 명의(名醫)를 구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법사가 대궐에 들어와 공주의 병을 치유하였다.

왕은 이를 크게 기뻐하며 법사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이에 법사는 답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일으키고 국가의 복을 빌면 좋겠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고, 공사를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기에, 법사는 간소한 초가집을 짓고 머물며 불법(佛法)을 강론하였다. 가끔씩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는 일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 절을 홍륜사라 이름 붙였다. 한편, 모록의 누이동생 사씨는 법사를 찾아와 스님이 되었고, 삼천지에 절을 세우며 머물렀다. 그 절은 영흥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추왕이 서거하자, 나라 사람들은 법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자결하였다. 이후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불교 또한 쇠퇴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제23대 법흥왕이 중국 남조(南朝) 양나라 천감 13년, 갑오년(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부흥시켰다. 미추왕 계미년(263)에서부터 무려 252년 만의 일이었다. 이를 통해 고도령이 말한 3천여 달의 계산이 맞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기록은 서로 어긋나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따르면, 양(梁)과 당(唐)의 두 승전(僧傳) 및 삼국본사(三國本史)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에서 불교가 동진(東晉) 말,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도와 아도 두 법사가 고구려 소수림왕 갑술년(374)에 온 것은 분명하므로, 이 전기의 기록은 신뢰할 만하다.

만약 비처왕 때 아도가 처음 신라에 왔다면, 이는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년이나 머문 후 신라에 온 것이 되어야 한다. 비록 대성(大聖)의 행동이나 능력이 범인과 다를지라도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머물렀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더구나 신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가 그렇게 늦었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또한 미추왕 시기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파된 갑술년(374)보다 100여 년 앞서게 된다. 이 당시 신라는 문물이나 예교가 정착되지 않았고, 심지어 나라의 이름조차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도가 신라에 와 불교를 전하고자 청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고구려 자체에 불교가 정착되기 전에 신라로 넘어왔다는 주장도 어긋난다.

설령 불교가 잠시 흥했다가 폐해졌다고 해도 그 중간에 아무런 소문도 전하지 않았다거나, 향(香)의 이름조차 잊혔다고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연대가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문제이다. 한 쪽은 지나치게 뒤처져 있고, 다른 한 쪽은 지나치게 앞선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불교가 동방으로 점차 확산된 흐름은 분명히 고구려와 백제에서 시작해 신라에서 완결되었을 것이다. 신라 눌지왕과 고구려 소수림왕의 시대가 이어져 있었으므로,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시기는 눌지왕 재위 시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왕녀의 병을 치유한 일도 모두 아도의 행적으로 전해지니, 이른바 '묵호'라는 이름 역시 그의 참이름이 아니라 별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마치 양나라 시기 사람들이 달마를 벽안호라 부르고, 진나라에서 승려 도안을 조롱하며 칠도인이라 칭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도는 세속을 초월한 고고한 행실을 통해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들은 대로 그를 묵호 혹은 아도라 부르며 한 사람을 마치 두 사람처럼 전승해 온 것이다. 특히 아도의 외형이 묵호와 동일했다고 전하니, 두 이름이 같은 인물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방문하며 말한 것은 절을 처음 세운 순서와 관련된 예언이었다. 그러나 이 두 전기는 소실되어, 현재에는 사천의 끝을 다섯 번째로 기록하고 있다. '3천여 달'이라는 기록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눌지왕 시대로부터 정미(527년)까지는 약 백 년에 해당하니, 만약 1천여 달이었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더 근접한 계산이었을 것이다. 아도의 성씨가 '아'이며 단명(單名)으로 불린 부분은 허구에 가까운 것 같으나, 자세히는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원위(북위)의 승려 담시의 전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담시는 관중 출신으로 출가 후 여러 기이한 행적으로 유명했다. 동진 효무제 태원 9년(384년) 겨울, 그는 경장과 율장 수십 권을 지니고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 이곳에서 그는 삼승(성문, 연각, 보살의 열반에 이르는 세 가지 교학)을 가르쳐 사람들을 불도의 길로 이끌었다. 이 일이 고구려에서 불교가 최초로 접한 계기로 보인다.

의회 초년(406년), 담시는 다시 관중으로 돌아가 삼보(당시 한나라 장안 일대)를 중심으로 불교를 전했다. 그는 발이 얼굴보다 더 흰 특이한 외모를 지녔으며, 진흙탕을 지나더라도 더러워지거나 젖지 않았다고 하여 백족화상이라 불렸다. 동진 말기, 흉노 혁련발발이 관중을 침략하여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지만, 담시는 칼날에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에 발발은 놀라며 승려들을 석방하고 단 한 명도 해치지 않았다. 이후 담시는 몰래 산책으로 몸을 숨겨 두타의 수행에 전념했다.

그 후 척발도가 다시 장안을 점령하면서 그 영향력이 관중과 낙양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기 박릉에는 최호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도교 좌도를 조금 익혀 불교를 적대시하였다. 최호는 위보의 재상 자리를 얻어 척발도의 신임을 받던 중 도교 지도자 구겸지와 함께 척발도를 설득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불교는 아무런 실질적 이익도 없으며 백성들의 생업에 해를 끼칠 뿐입니다." 

그 결과 불교를 폐지하도록 권고했다고 한다.

태평 말년에 담시는 드디어 척발도를 감화시킬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정월 초하룻날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대궐문에 나타났다. 이 소식을 들은 척발도는 그를 죽이라 명했으나,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담시의 몸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다. 척발도가 직접 나서서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북원에서 기르던 범에게 던졌지만, 범조차 담시를 해치기는커녕 가까이 가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이를 계기로 척발도는 크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역질에 걸리고 말았다. 또한,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마저 연이어 중병에 걸리는 일이 벌어졌다.

척발도는 이 모든 재앙이 담시를 해치려 한 죄 때문이라고 여기고, 두 집안의 종족을 모두 죽여 없앤 후, 불교를 성대히 장려하도록 나라에 선언했다. 이후 담시는 어디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이에 논평하건대, 담시는 태원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회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0여 년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도 동국 역사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담시는 이미 이세상 사람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괴이한 존재에다 뛰어난 재주로도 알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나 행적이 같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들 중 한 사람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측된다.

다음과 같이 이를 기리는 시가 전한다.

금교 위에 눈 내리고 얼음은 아직 녹지 않았으나 
계림의 봄빛도 완연히 돌아오지 않았네 
어여쁘다, 봄 신령의 빼어난 재주여 
모랑의 집 매화가 가장 먼저 꽃을 틔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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