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종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 몸을 마치다 (原宗興法 厭髑滅身)
눌지왕 시대부터 약 100년이 지났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본기에 따르면, 법흥대왕 재위 14년째 되는 해인 527년에 이차돈이 불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 당시가 소량(南朝梁)에서는 보통 8년 정미년(527년)에 해당하며, 서천축의 달마대사가 금릉에 도착한 해와도 일치한다. 또한 같은 해에는 낭지법사가 처음으로 영추산에서 법회를 열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불교의 흥망성쇠는 반드시 한 시기 안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화 연간(806~820)에 남간사의 승려 일념이 *촉향분예불결사문*을 집필했는데, 여기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흥대왕이 자극전에서 왕위에 오르며 동쪽의 부상 지역을 살펴보고 이렇게 말했다.
“옛날 한명제가 꿈을 통해 감응하여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졌다 하니, 나 또한 왕위에 오른 이후 백성들을 위해 복을 기르고 죄를 없앨 장소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나 왕의 깊은 뜻을 신하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만 몰두하며 절을 세우겠다는 대왕의 신령한 의도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왕은 한탄했다.
“아아! 나는 덕이 부족한 자로서 조상의 왕업을 이었구나. 위로는 천지의 조화를 갖추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이 기뻐하지 않으니, 정무를 돌보는 틈틈이 불교에 마음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누가 나와 뜻을 함께할 수 있을까?”
그때 박씨 성을 가진 소신(이차돈)이 있었다. 자는 염촉으로, 그의 아버지는 기록이 없으나 조부는 아진 종이고, 습보 갈문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는 쭉정이처럼 겉만 번지르르하지 않았고, 맑은 물에 비친 거울처럼 선명한 내면의 뜻을 품은 사람이었다. 적선을 행하는 가문의 후손으로서 왕궁에서 조아(爪牙, 왕을 보좌하는 무신)가 되길 희망하며, 성스러운 임금을 섬김으로 나라에 평화를 가져오기를 꿈꿨다.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으며 사인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왕의 얼굴을 살펴 그 심정을 깨닫고는 간언했다.
“전하, 신은 예로부터 아무리 하찮은 풀이나 나무조차도 그 용도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히 큰 죄를 무릅쓰고 전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자 왕이 말씀했다.
“그대가 나설 일이 아니라.”
그러나 그는 다시 아뢰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신하로서의 큰 의리이며, 임금을 위해 목숨을 내놓음은 백성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신의 말을 거짓이라 하여 목숨을 거두신다면 백성들은 더 이상 감히 전하의 뜻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이렇게 답했다.
“살점을 도마 위에 올리고 몸을 고통스럽게 하여 겨우 한 마리 새를 살릴 수 있을 뿐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피를 흘려 목숨을 끊으며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것? 내 뜻은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대는 공덕을 남기고자 하나, 차라리 죽음을 피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왕이 만류하자 사인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이 좌우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제가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뿌리내린다면, 부처의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며, 성주께서는 평안을 되찾으실 것입니다.
난새와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부터 하늘을 비상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기러기와 고니는 태어나면서부터 강물을 헤칠 기개를 보인다고 합니다. 만약 그대가 진정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대사의 행위라 불릴 만할 것입니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엄을 과시하며 동서남북에 무시무시한 형구를 늘어놓고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경들은 내가 절을 짓고자 하는 일을 고의로 지연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
신하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황망히 맹세하고, 동쪽과 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왕은 사인을 꾸짖었고, 사인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에 대왕은 크게 노하여 그의 처형을 명령했다. 유산이 그를 묶어 관아로 끌고 갔고, 사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담은 글을 맹세하며 옥리에게 목이 베였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하늘이 어두워져 해가 숨었으며, 땅이 흔들리고 비가 하염없이 떨어졌다. 임금은 슬픔에 젖어 눈물이 곤룡포를 적셨고, 재상들은 근심으로 진땀이 나서 관모까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달콤하게 흐르던 샘물이 갑자기 마르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튀어나오고, 곧게 뻗은 나무들이 저절로 부러졌으며 긴팔 원숭이들이 떼로 몰려 다니며 울부짖었다.
춘궁에서 함께 말을 몰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월정에서 소매를 맞잡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으로 이별을 애도했다. 관을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터뜨리는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비탄에 잠겼다.
모두가 말했다. 개자추가 의리를 위해 스스로 다리 살을 벤 일도, 홍연의 배를 갈라 의공의 간을 품었던 일도 염촉의 고결함에는 비할 바 되지 않는다. 이 일은 대왕의 신력을 이음과 동시에 아도의 본심을 실현한 것이니 참으로 성스러운 분이다!
결국 사인은 북산 서쪽 고개에 안장되었다. 그의 명복을 빌던 내인들은 슬픔에 잠기며 좋은 땅을 선정해 절을 세웠고, 그 이름을 자추사라 명명했다. 이 일 이후로 모든 가정이 부처를 경배하며 대대로 영화로움을 구가했으며, 사람들이 불도를 행하며 불법의 은혜를 얻는 일이 이어졌다.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 14년(527년)의 일이나, 불교의 공인은 그 이듬해에 이루어졌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 참조).
진흥왕 즉위 5년(544년 갑자년에) 대흥륜사가 창건되었다. 대청 초기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져왔으며, 천가 6년(565년)에는 신라 사신 유사가 승려 명관과 함께 불경을 받들어 왔다. 이 시기 절은 별처럼 흩어져 자리 잡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서 있었으며, 법당이 세워지고 범종까지 설치되었다. 이로써 절의 승려들은 천하의 복전(복을 낳게 하는 밭)이 되었고, 대승과 소승의 불법은 도성에 자비로운 구름처럼 퍼졌다.
다른 지방에서는 보살들이 나타나 세상을 돕고, 서역의 저명한 승려들이 신라에 찾아오니, 이로 인해 삼한이 한 나라로 합쳐지고 사해가 하나의 집으로 화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덕망은 하늘 끝까지 전해지고, 위엄과 신성은 물 속 그림자로 비치니, 이는 아도, 법흥, 염촉이라는 세 성인의 위덕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이후 국통 혜륭,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서, 파진찬 김의 등이 사인의 오래된 무덤을 보수하고 큰 비석을 세웠다.
817년 원화 12년 정유년 8월 5일은 신라 제41대 헌덕왕 재위 9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흉륜사의 영수선사는 무덤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 신도들을 모아 매월 5일마다 영혼의 안식을 위해 단을 쌓고 법회를 열었다. 향전(향사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삿날이 되면 고을의 노인들이 모임을 만들어 흉륜사에서 함께 의식을 가졌다."
특별히 이 날은 사인이 자신의 삶을 버리고 불법에 순응한 날로 기려졌다. 아, 이러한 성군(임금)이 없었다면 이런 충신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충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큰 공덕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유비라는 물고기가 제갈량이라는 물을 만난 것과 같으며, 구름과 용이 감응하여 모이는 아름다운 인연이라 하겠다.
법흥왕은 이미 폐지된 불법을 다시 세워 절을 창건하였고, 절이 완공되자 왕은 면류관을 벗고 가사를 입었다. 또한 궁중에 있던 친척들을 절의 종으로 삼게 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주지가 되어 교화를 널리 펼쳤다.
진흥왕은 부친 법흥왕의 덕행을 계승한 성군으로서 군주의 자리에 올라 위엄과 통솔력으로 백관을 다스렸으며, 그의 통치는 완벽하였다. 그는 이 절에 '대왕홍륜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전황(전임 왕) 법흥왕의 성씨는 김씨요, 출가 후 이름은 법운(法雲), 자는 법공(法空)이라 하였다.
책부원귀의 기록에 따르면, 법흥왕의 성은 모(毛), 이름은 진(眞)으로 전해진다. 법흥왕은 535년(법흥왕 22년, 을묘년)에 왕비와 함께 영흥사를 세웠다. 왕비 사씨 또한 신앙심이 깊어 출가해 묘법(妙法)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되었으며, 다시 영흥사에서 거주하다 몇 해 뒤 생을 마쳤다. 『국사』에는 건복 31년(614년)에 영흥사의 소상이 무너졌다는 기록과 함께, 비구니가 된 진흥왕의 왕비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면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였고, 진흥왕의 왕비인 박씨는 모량리 출신 각간의 딸이다. 그녀 역시 출가한 승려였지만, 영흥사를 세운 주인공은 아니었다. 따라서 기록된 ‘眞’자를 ‘法’자로 수정하면 법흥왕의 왕비 파도부인이 승려로서 불상을 세우고 죽음을 맞았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영흥사의 실질적 창건자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법흥왕과 진흥왕 모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사관이 역사에 남기지 않은 이유는, 이 일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본보기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 대통 원년 정미(527년)에도 양(梁)나라 무제(武帝)를 기리기 위해 웅천주에 대통사를 건립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시 한 수를 읊는다.
성인의 지혜가 만세를 도모하니,
평범한 여론은 한낱 하찮을 뿐이다.
법륜이 펼쳐지고 금륜이 돌아가니,
요순 시대의 태평성대가 불교로 이루어졌도다.
이 시는 원종을 찬미한 작품이다.
의를 좇아 스스로 목숨을 버린 일이 놀라우니,
천상의 꽃과 흰 젖의 기이한 자취가 더욱 감동스럽다.
하루아침 칼날 아래 몸은 비록 스러졌으나,
사찰마다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도성을 뒤흔드는구나.
이 시는 염촉을 찬미한 것이다.
법왕 금살(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제29대 법왕(法王)은 이름이 선(善)이며, 별칭으로 효순(孝順)이라 불렸다. 그는 개왕(開王) 10년 기미년(599년)에 즉위하여 그해 겨울 조서를 내려 살생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민가에서 기르던 사냥용 짐승들을 놓아주게 하고, 살생에 쓰이는 모든 도구를 불사르게 하며 생명을 아끼는 정책을 폈다. 이듬해 경신년(600년)에는 30명의 도승을 배치하여 수도 사비성에 왕흥사를 창건하려 했으나, 부지가 완성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며 아버지가 닦아둔 터 위에 절을 완공했는데, 이 절은 미륵사로도 불린다.
미륵사는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빼어난 지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계절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무왕은 종종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절에 들러 경치를 감상하곤 했다.
이에 대한 시 한 수를 남긴다.
짐승을 아끼는 자비심은 그 은혜가 하늘 끝까지 미치고,
돼지와 물고기마저 은덕으로 평화롭네.
성군께서 돌아가셨지만 이를 부정하지 마소서.
천상 도솔천에는 이제 온화한 봄날이 만연했으리라.
■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제29대 법왕의 이름은 선이며, 효순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개왕 10년, 기미년(599년)에 즉위하였다. 그해 겨울, 살생을 금지하는 조서를 반포하고, 민가에서 기르던 매나 사냥용 새들을 놓아주게 했으며, 사냥 도구를 불태우고 일체의 살생을 금지시켰다. 이듬해인 경신년에는 30명의 도승을 배치하고 당시 수도였던 사비성에 왕흥사라는 절을 세우려 했으나, 터를 닦은 상태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무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아버지가 닦은 터 위에 절을 완성하였고, 이 절은 미륵사라고도 불린다.
그 절은 산을 등지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위치에 자리 잡았으며, 그 주위는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어 경관이 뛰어났다. 왕은 종종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이를 기리며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짐승을 보호하는 자비의 은혜는 하늘까지 닿고,
돼지와 물고기조차 그 덕을 입으니 어진 마음이 온 세상에 퍼지네.
성군께서 떠나셨다 말하지 마오.
천상의 도솔천에는 지금 한창 봄이 꽃피고 있으리.
■ 보장왕이 노자를 받들고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말기 무덕·정관 연간(서기 624년)에는 국민들이 오두미교를 신봉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당나라 고조는 도사를 보내 천존상(도교의 최고 신격)을 전달하고, 《도덕경》을 강의하게 했다. 당시 고구려 왕과 백성들은 이를 듣고 큰 관심을 보였다. 이 일은 제27대 영류왕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년(624년)에 있었으며, 그 이듬해 고구려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교와 도교를 배우고자 요청했고, 당나라 황제는 이를 허락했다.
이후 보장왕이 즉위한 정관 16년 임인년(642년)에는 유교, 불교, 도교를 동시에 진흥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재상인 개소문은 왕에게 유교와 불교는 활발히 발전하고 있지만, 도사들의 영향력은 약하다고 지적하며,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 교리를 적극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반룡사에 있던 보덕화상은 도교와 불교가 대립할 경우 국가의 존망에 위기가 닥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여러 차례 왕에게 자신의 생각을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신력으로 방장을 남쪽 완산주(현재 전주)의 고대산으로 옮기며 그곳에서 은거했다. 이는 영휘 원년 경술년(650년) 6월의 일이었다고 하며, 또 다른 기록에는 건봉 2년 정묘년(667년) 3월 3일의 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약 19년 후인 총장 원년 무진년(668년)에 고구려는 결국 멸망하게 된다. 현재 전해지는 경복사의 방장이 바로 그때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고려 진락공(이자현)은 이를 기리며 시를 남겼고, 문열공(김부식)은 그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상에 전했다.
한편, 당나라 역사서에는 수나라 양제가 요동을 정벌하던 시기(612년)의 일이 더 앞선 시점에서 언급되어 있다. 당시 비장 양명이라는 이가 전투 중 불리한 상황에 놓여 죽음을 앞두고 맹세하기를 “반드시 고구려의 실권자가 되어서 나라를 멸망시키겠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개씨가 집권하며 독재를 행하고, 개씨의 권위 속에 양명의 뜻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 고기의 기록은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 임신년(612년)에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했으나, 결국 대업 10년 갑술년(614년) 10월에 고구려의 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항복을 청하는 일로 이어졌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 표문에는 비밀스러운 계획이 숨겨져 있었는데, 한 인물이 작은 쇠뇌(소노)를 품고 표문을 들고 간 신하를 따라 양제가 탄 배에 몰래 들어갔다. 양제가 표문을 읽던 중 소노로 그의 가슴을 쏘았고, 이에 양제는 즉시 군사를 철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천하의 군주인 내가 이 조그만 나라를 직접 공격하고도 승리하지 못하다니, 만대에 웃음거리가 되겠구나.”
이때 우상 양면이 왕에게 아뢰었다.
"신이 죽은 후 고구려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제왕의 원수를 갚겠나이다."
그 후 양제가 죽은 뒤, 그는 과연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되자 그는 비상한 총명함과 신기한 무예를 지녔으며, 그의 능력은 널리 알려졌다. 당시 무양왕(확실하진 않으나 그렇게 불렸다)이 그의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라 하고, 이름을 '금'이라 하였다. 이후 그의 지위는 시중 벼슬에 오를 만큼 높아졌다.
개금은 왕에게 아뢰었다.
"솥에는 세 개의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훈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이 나라에는 불교와 유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니 이것이 나라의 위태로움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이를 옳게 여겨 당나라에 도교를 요청하였는데, 태종은 서달 등 여덟 명의 도사를 보내주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절을 도관으로 바꾸고, 도사들을 예우하여 유학자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혔다. 도사들은 고구려의 이름난 산천을 찾아다니며 이를 진압하고 정비하였는데, 특히 평양성의 지세를 '신월성(半月城)'으로 보고, 주문을 외워 남쪽 물줄기의 용에게 명령하여 성을 확장하고 '만월성(滿月城)'으로 더 쌓아 올려 이를 '용언성'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참기](앞날의 길흉을 기록한 글)를 써서 성의 명칭을 '용언도' 또는 '천년보장도'라고 칭하였다. 이와 함께 어떤 영험한 바위를 깨뜨리는 일도 이루어졌다.
개금은 또다시 왕에게 아뢰어 동북쪽과 서남쪽에 긴 성곽을 쌓게 하였다. 이 대규모 공사는 장장 16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동안 남자들은 부역에 나서고 여자들은 농사일을 맡았다.
보장왕 때에 이르러, 당나라 태종이 직접 6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고구려는 이를 막아냈고 당군은 퇴각하였다. 그러나 총장 원년(668년) 무진년에 우상 유인궤, 대장군 이적, 그리고 신라의 김인문 등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왕은 사로잡히고 나라의 운명은 막을 내렸다.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가구를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대안 8년 신미년(1092년), 고려의 우세승통(대각국사 의천)은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을 방문하여 보덕성사의 초상을 뵙고 한 편의 시를 읊었다.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
우리의 스승으로부터 전해졌네
애석하도다, 승방을 떠도는 혼백이여
동명왕의 옛 고국이 위태롭도다
그 발문에는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이 도교에 빠져 불교를 믿지 않으니, 이에 보덕법사는 승려들의 거처를 남쪽 마이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어떤 신령스러운 존재가 고구려 마령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너희 나라가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밖의 상세한 내용은 본전과 승전에 적혀 있다. 또한 보덕법사에게는 11명의 높은 덕망을 가진 제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들 중 무상화상은 제자 김취등과 함께 금동사를 세웠으며, 적멸과 의융은 진구사를 창건하였다. 지수는 대승사를, 일승은 심정과 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를 세웠다. 수정은 유마사를 건립하였으며, 사대는 계육 등과 함께 중대사를 설립하였다. 개원화상은 개원사를, 명덕은 연구사를 창건하였다. 이 외에도 개심과 보명 또한 각각 특별한 기록이 있으니, 이 역시 본전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기리며 한 구절 읊는다.
불교는 한없이 깊고 넓은 대양 같구나.
수많은 유파도 품어 안는 넓디넓은 가르침.
어리석도다, 여왕이 여기를 메우니
와룡이 대양으로 옮겨 감을 알지 못하는구나.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