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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상 4. 미륵선화, 노힐부득 달달박박

 


■ 미륵선화 미시랑과 진자사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삼맥종 혹은 심맥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양나라 대동 6년 경신(540년)에 즉위하였다.  백부인 법흥왕의 뜻을 깊이 존경하여 불교를 장려했으며, 여러 사찰을 세우고 많은 이들에게 출가를 허락했다. 진흥왕은 또한 천성이 고결하고 품격이 있어 신선을 숭상하며 민가의 처녀들 중 아름다운 자를 선발해 원화로 삼았다. 이는 무리를 모아 인재를 선발하고 그들에게 효도와 충성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방침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당시 선발된 원화는 남모랑과 교정랑 두 명으로,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3~4백 명에 달했다. 그러나 교정이 남모를 질투해 술자리를 마련한 뒤, 그녀를 취하게 한 후 몰래 북천으로 데려가 큰 돌을 들어 그녀를 매장하여 죽게 했다. 남모를 따르던 무리들은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슬피 울며 흩어졌다. 하지만 당시 이 음모를 아는 한 사람이 노래를 만들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에게 불리게 했고, 이를 통해 무리들은 북천의 바위 속에서 남모의 시체를 찾아내 교정을 처단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진흥왕은 원화 제도를 영구히 폐지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뒤 왕은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풍월도(화랑의 도)를 먼저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번에는 양가의 남자들 중 덕행이 뛰어난 자를 선발해 화랑이라 칭했고, 처음으로 설원랑을 국선으로 삼아 화랑 제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왕은 명주에 비석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멀리하도록 가르쳤으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도록 하였다. 그의 시대에는 오상(인, 의, 예, 지, 신)과 육예(예, 악, 사, 어, 서, 수), 그리고 삼사(태사, 태부, 태보)와 육정(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이 널리 시행되었다.

진지왕 때에 이르러 홍륜사의 승려 진자는 미륵상 앞에서 자주 서원하며 맹세를 올렸다. 그는 다음과 같은 간절한 기원을 드렸다.  
"우리 대성께서 화랑으로 현현하셨으니 내가 항상 미륵불의 모습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들게 해 주시옵소서!"  
이러한 진심 어린 소망이 날로 간절해지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한 승려가 나타나 말했다.  
"네가 웅천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진자는 깨어나 기쁨에 차서 즉시 길을 떠났다. 그는 열흘 동안 걸음을 멈추지 않고 경건히 절하며 마침내 그 절에 이르렀다. 절 입구에서 그는 아름답고 온화한 외모를 지닌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그를 작은 문으로 안내해 객실로 인도했다. 진자는 안내받는 동안 감사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모를 텐데 이렇게 따뜻하게 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남자는 답했다.  
"저 또한 서울(신라의 수도) 사람입니다. 스님께서 먼 길을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잠시 뒤 소년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이를 우연한 일이라 여겨 크게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대신 절의 중들에게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와 지난밤 꾼 꿈 이야기를 하며 말했다.  
"잠시 아래 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려보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절의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지만,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조언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과 철인들이 살던 곳이라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니, 그곳에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자는 이 말을 따라 산 아래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산신령이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맞이하며 물었다.  
"여긴 왜 찾아왔는가?"  
"미륵선화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진자가 대답하자, 노인이 다시 물었다.  
"저번에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본 적이 있으면서 어찌 다시 그것을 구하러 다니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깨달음을 얻고는 곧바로 본사로 달려 돌아갔다.  

한 달 뒤, 진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진자를 불러 그 내막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 했으니, 성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성 안을 찾지 않았는가?"  
이에 진자는 왕명을 받들어 동료들과 함께 마을을 돌며 소년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영묘사 동북쪽 길가 한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그는 단정한 옷매무새를 갖추고 있었고, 얼굴은 매우 수려했다.  

이를 본 진자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미륵선화시다."  
그리고 다가가 물었다.  
"당신의 집은 어디며 성씨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소년은 대답했다.  
"제 이름은 미시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을 모두 여의어 성씨는 알지 못합니다."  

진자는 소년을 가마에 태워 왕에게 데려갔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국선(國仙)으로 임명했다. 미시는 화랑들을 서로 화목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예의와 도덕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풍류를 세상에 빛내며 살아갔지만, 7년이 지나자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이를 큰 슬픔으로 여겨 그리워했으나, 미시로부터 받은 자비와 맑은 덕화(德化)를 떠올리며 자신도 깊이 뉘우치고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러나 말년에 그 역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를 전해 들은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未와 彌는 음이 같고, 尸는 力과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가까운 것을 택해 부르게 되었노라. 이는 부처님께서 진자의 정성에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땅과 인연이 있어 가끔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신선을 미륵선화라 부르고, 중매인을 미시라 하는데 이는 모두 진자의 유풍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길가의 나무를 노방수(路傍樹)라 부르는 것도 그 전통에서 유래했다. 우리말로는 이를 사여수라 한다.  

찬미하며 읊는다.  
선화를 찾아가는 한 걸음, 그 모습을 바라보니  
심어진 것은 모두 한결같은 공덕인데,  
어느덧 봄은 지나고 찾을 곳 없어졌네.  
누가 알겠는가, 상림원 한 가지에 깃든 봄을.  


■ 남백월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백월산 양성 성도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아름다웠으며, 산맥은 남북으로 수백 리에 걸쳐 이어진 웅장한 진산이었다고 한다. 

옛 어른들은 서로 전하면서 이야기했다. 
"옛날 당나라 황제가 못을 하나 팠는데, 매월 보름쯤 되면 밝은 달빛 속에서 못 가운데에 산이 나타났다. 그곳엔 사자 모양의 바위가 있어 꽃 사이로 은은히 비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는 화공에게 그 형상을 그림으로 담게 하고 사자를 보내 천하를 돌며 이와 닮은 산을 찾게 했다. 사자가 해동에 이르러 이 산을 바라보니, 사자암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었고, 산의 서남쪽 약 이보(步) 떨어진 곳에는 삼산(三山)이라 불리는 세 개의 산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황제의 그림과 꼭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 길이 없으니, 사자는 신발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놓고 돌아와 황제에게 보고했다. 놀랍게도 그 신발 역시 그림자 형태로 못에 비쳤고, 황제는 이를 이상히 여겨 산의 이름을 백월산이라 칭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더 이상 못 가운데 나타났던 산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백월산 동남쪽으로 3천 보 가량 떨어진 곳에 선천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으로, 그의 아버지는 월장이었고 어머니는 미승이었다. 또 다른 이는 달달박박으로, 그의 아버지는 수범, 어머니는 범마라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비범한 풍모와 골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속세를 초월한 높은 사상을 품고 서로 좋은 친구로 지냈다. 두 사람은 스무 살이 되자 생의마을 동북 고개 근처의 법적방이라 불리는 절로 가서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 법종곡 승도촌에 위치한 오래된 절이 정신을 닦기에 적합하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떠났다. 그곳에서 대불전과 소불전이라 불리는 각각의 마을에 머물렀다. 부득은 회진암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이곳은 양사로도 불렸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꾸리며 서로 왕래하면서도 정신을 수양하는 것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속세를 벗어나려는 마음은 한 순간도 접어두지 않았다. 삶과 세상의 무상함을 절감한 두 사람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이 든 해는 분명 좋지만, 의식주가 스스로 해결되어 배부르고 따뜻함을 느끼는 것만은 못하다. 또한 가정과 부인이 좋아 보이겠지만, 연지화장에서 여러 부처님과 앵무새, 공작새가 어울려 지내며 즐기는 모습에는 미치지 못한다. 더군다나 불도를 배운다면 필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고, 진실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승려가 되었으니 몸에 얽매임을 벗어나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마당에, 이 풍진 속에 파묻혀 속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맞지 않다.“
이들은 인간 세상을 떠나 깊은 산골로 은둔하려는 결심을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서쪽에서 밝게 빛나는 백호의 광채가 비추더니, 그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나타나 두 사람의 이마를 천천히 어루만져 주었다. 꿈에서 깨어 서로 이야기해 보니 둘 모두 같은 꿈을 꾸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큰 감격을 나눈 뒤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박박사는 북쪽 고개에 있는 사자암을 거처로 삼아 판자집을 지어 생활했으므로 그곳을 판방이라 불렀고, 부득사는 동쪽 고개의 바위층 아래 물가에 거처를 마련해 뇌방이라 이름 붙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암자에서 수행에 정진했으며, 부득은 미륵불에 일심으로 귀의하며 기도하고, 박박은 아미타불을 예경하며 염송했다.

세월이 흐른 뒤 경룡 3년, 기유년(709년) 4월 8일은 성덕왕 즉위 8년째 되는 해였다. 날이 저물 무렵, 스무 살가량 되어 보이는 한 낭자가 암자에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고, 몸에서는 난초와 사향 내음이 은은히 풍겼다. 낭자는 북쪽 암자에 이르러 하룻밤 묵기를 청하며 시를 지어 건넸다.

갈 길은 아득한데 해는 지고, 산천은 온통 저녁으로 물들었네.  
길은 멀고 성 또한 멀어 사바의 고요함뿐이오.  
오늘 밤 이 암자에 머물고 싶사오니,  
거룩한 스님께서 노여워 마시길 바라오.

이에 박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은 청정함을 지켜야 하는 곳이니, 이곳은 그대가 머물 곳이 아닙니다. 다른 데로 가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그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절당한 낭자는 남쪽 암자로 발길을 돌렸다. 부득사를 찾아 앞선 곳과 마찬가지로 묵기를 청하자, 부득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이런 밤중에 여기에 왔는가?"  
낭자는 차분히 대답했다.  
"화합과 평온의 경지는 태허와 같아 오고 감의 구별이 없습니다. 다만 어진 선비께서 깊은 뜻과 높은 덕행을 지녔다고 들었기에, 보리(깨달음)를 이루실 길을 돕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어 그녀는 한 편의 게송(불교적 서정시)을 읊었다.

깊은 산길에 해는 저물고,  
걸어도 걸어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소나무와 대나무 그늘은 더욱 고요하고,  
계곡의 시냇물 소리는 새로울 뿐이라네.  
이곳에서 길 잃고 방황하려 함이 아니오라,  
존귀한 스님의 마음을 인도하고자 할 뿐일세.  
부디 하나의 청만 들어주시되,  
낯선 이의 이름 따위는 묻지 마시오라.

낭자의 말과 게송에 부득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득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말했다.

이곳은 여인과 함께 머물기 적합한 장소는 아니지만, 중생을 돕는 것이 곧 보살의 길 중 하나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깊은 산골에서 날까지 저물었으니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낭자를 맞아 읍하며 암자 안에 머물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다잡고 속세의 번뇌를 끊으려 노력하며 희미한 등불 아래 고요히 염불을 올렸다. 날이 밝으려 할 무렵, 낭자가 그를 불러 말했다.

“제가 불행히도 산고를 겪게 되었으니 스님께서 건초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부득은 그녀가 처한 상황을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들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낭자는 해산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다시 목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부득은 내심 부끄럽고 두려웠으나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목욕통을 준비하고 낭자를 통 안에 앉힌 뒤 물을 데워 목욕을 도왔다. 잠시 후, 목욕통 속의 물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며 물이 금빛의 액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부득은 크게 놀랐고, 낭자가 입을 열었다.

“스님께서도 이 물로 목욕을 하면 좋겠습니다.”

더는 거절할 수 없었던 부득은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그의 피부는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옆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연화대가 놓여 있었다. 낭자는 부득에게 연화대에 오르기를 권하며 말했다.

“나는 관음보살입니다. 이곳에 와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성취하도록 한 것입니다.”

말을 마친 낭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한편, 이를 지켜본 박박은 속으로 생각했다.

‘부득이 어젯밤에 반드시 계율을 어겼을 것이다. 그걸 비웃어줘야겠다.’

그는 바로 부득에게로 갔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연화대 위 장엄한 모습으로 빛나는 미륵존상 같은 부득의 모습이었다. 그의 온몸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이를 본 박박은 저절로 고개를 숙여 절하며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신 겁니까?”

부득이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자 박박은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은 다행히 성불하셨지만, 나는 마음속 욕망과 집착으로 인해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당신의 공덕이 지극하기에 저보다 먼저 대보리를 이루셨군요. 부디 옛날의 인연을 잊지 마시고 나 또한 함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부득은 말했다.

“통 속에 남아 있는 금액으로 목욕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에 박박도 금액으로 목욕하니, 부득과 같은 무량수의 빛나는 몸으로 변모되었다. 두 사람은 엄숙히 서로를 마주 바라보며 부처의 모습을 이루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경쟁하듯 산으로 몰려와 이를 우러러보며 크게 감탄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구나!”

두 부처님은 불법의 요지를 그들에게 설명한 뒤,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천보 14년(755년), 신라 경덕왕이 즉위한 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정유년(757년) 사자를 보내 큰 사찰을 짓게 하였다. 그 절에는 백월산 남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광덕 2년 갑진(764년) 7월 15일 절이 완공되자, 미륵존상을 새로 만들어 법당에 봉안하고 액자에 '현신성도미륵지전'이라 명명했다. 또한,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강당에 모셨는데, 남은 금이 부족해 불상을 완벽히 마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아미타불상에는 얼룩이 남았다. 해당 강당에는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는 제목의 액자를 걸었다.

이를 논하여 말하길,  
"낭자는 부녀의 몸으로 중생을 자비로 보호하고 교화했으니, 참으로 섭화의 공덕을 이룬 자라 할 만하다. 화엄경에서 '마야부인'이 선지식으로 열한지(十一地)의 경지에 머물며 부처를 낳아 해탈문을 연 것처럼 여기에도 그러한 뜻이 담겨 있다. 낭자의 각산(順産)은 곧 이를 뜻하며, 그녀가 준 글은 슬픔과 애틋함이 깃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천상의 선녀와 같은 품격이 느껴지는 글이다. 아, 만일 낭자가 중생을 따라 다라니를 깨닫지 못했다면 과연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글 끝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에 머묾을 꾸짖지 말라'고 썼어야 하지만, 세속적인 표현을 피하려 했던 이유에서 그렇게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기리며 읊는다.

푸른 빛이 서린 바위 앞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  
해 저무는데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향하시라.  
내 앞의 푸른 이끼를 밟아 그리 더럽히지 마소서.

이는 북암을 기린 글이다.

산골에 해 지니 어디로 향할까?  
남쪽 창가 빈자리에 잠시 머물다 가오.  
깊어가는 밤, 백팔염주를 세다가,  
떠돌이가 시끄러워 잠을 깨울까 두렵네.

이는 남암을 기린 것이다.

솔그늘 열 리를 헤매던 한 길 위에서,  
밤이 되어 절에 이르러 시름을 내려놓았네.  
새벽 목욕까지 마친 뒤 날 밝으려 할 무렵,  
두 아이를 남기고 서쪽 길로 떠났네.

위 글은 성령(聖娘)을 기린 것이다.

■ 분황사의 천수대비가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다 

경덕왕 시기, 한기리에는 희명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희명을 품에 안고 분황사의 좌전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관음 앞에 나아갔다. 그곳에서 직접 노래를 지어 아이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는데, 기적적으로도 소녀의 잃었던 시야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 꿇어 두 손 모아 천수관음 앞에 간절히 비옵니다  
천 손 중 하나를 내어 주시고 천 눈 중 하나를 거두사  
두 눈 없는 이 불쌍한 몸에 단 하나만이라도 허락해 주소서  
아아, 당신의 자비를 내게 베풀어 주신다면 그 은혜 얼마나 클까요

기적에 감사하며 읊는다.

죽마를 타며 파로 만든 피리를 불며 시장 거리를 뛰놀던 아이  
어느 날 갑자기 두 눈을 잃었나니  
대사님의 한량없는 자비, 눈을 주지 않으셨다면  
버드나무 꽃 한 번 못 보고 수많은 봄날이 흘러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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