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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상 3. 백률사, 전후소장 사리

 


■ 백률사 

계림 북쪽에 위치한 산은 금강령이라 불리며, 그 남쪽 기슭에는 백율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절에는 한 부처의 상이 있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영험함이 두드러져 많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부처상이 중국 신장이 중생사의 관음보살을 만들 때 함께 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이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에 들어설 때 발판으로 삼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고 전한다. 또 어떤 이는 이 발자국이 부처께서 부례랑을 구출하고 돌아왔을 당시의 흔적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천수 3년 임진년(692년) 9월 7일, 신라의 효소왕은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으로 임명했다. 당시 화랑인 주리의 구룹은 천명이나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부례랑과 안상은 절친한 사이였다. 이듬해 천수 4년 계사년(693년) 3월, 부례랑은 무리들과 금란으로 놀러 나갔는데, 북명(현 원산만 근처) 경계에서 적적(말갈)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함께 있던 무리들은 모두 할 수 없이 돌아왔으나, 안상만 홀로 부례랑을 구하러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당시 날짜는 3월 11일이었다.

소식을 접한 효소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선왕께서 신笛과 현금이라는 보물을 나에게 전해 주셨고, 이를 내고(내부 창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국선이 갑작스레 적에게 잡혀가다니, 대체 무슨 이치란 말인가! 이를 어찌 해야 하겠는가?"  

그 순간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어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를 확인시켜 보니, 창고 안에 보관 중이던 신笛과 현금 두 보물이 사라진 것이었다. 왕은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짐이 역량이 부족하여 국선을 잃게 된 것도 모자라 이제 보물까지 잃다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왕은 즉시 창고 관리자인 김정고 등 다섯 명을 가두었으며, 4월에는 전국적으로 사람들을 소집해 말했다.  
"누구든 사라진 현금과 신笛을 찾아오면 1년 동안의 조세를 면해 주겠다."  

5월 15일, 부례랑의 부모는 백율사로 찾아가 불상 앞에서 여러 날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향탁 위에 신笛과 현금 두 보물이 놓여 있었고, 뒤이어 부처상이 있는 곳에서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나타났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이 기적 같은 상황에 크게 기뻐했다.

부모는 부례랑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그는 대답했다.  
"적국에 끌려간 후, 저는 대도구라라는 사람의 집에서 말 돌보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조가 들판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을 때, 문득 단정한 용모의 스님 한 분이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나타났다. 스님은 그를 위로하며 물었다.  

"고향이 그리운가?"  

대조는 자신도 모르게 스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임금과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그렇게 하여 대조는 바닷가로 스님과 함께 갔고, 그곳에서 안상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신적(神笛)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대조와 안상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러자 그들은 신적을 타고 바다 위로 날아 올라 순식간에 지금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놀라운 일을 대조는 황급히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크게 놀라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들였다. 대조는 현악기와 신적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금과 은으로 된 그릇 각 다섯 벌, 50량의 금과 은, 그리고 마납가사 다섯 벌, 대초 3천 필을 백율사에 바쳤다. 또한 밭 1만 경을 헌납하였다.  

왕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라 안의 모든 죄인들을 풀어주었으며, 관리들의 벼슬을 세 계급씩 올려주었다. 백성들에게는 세금 3년 면제를 선포하였고, 절 주지의 거처를 봉성사로 옮기게 했다. 대조를 대각간으로 봉하고 그의 아버지 대현아찬은 태대각간으로 삼았으며,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의 경정궁주(敬貞宮主)로 삼았다.  

한편 안상을 대통으로 임명하고, 과거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명에게는 모두 용서를 베풀며 각자 관작 5급씩을 내렸다.  

6월 12일에는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났고, 17일에는 다시 서쪽 하늘에 나타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일관(천문학 담당 관직자)이 왕께 아뢰었다.  

"이 혜성은 신적과 관련된 예우가 아직 미비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왕은 이에 신적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제목(書名)했고, 이후 혜성은 곧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에도 여러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들이 많았으나 기록하기에는 너무 번잡하여 생략한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영랑의 무리 중 한 사람으로 여겼으나, 이와 관련된 자세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영랑의 무리들 중 진재(眞在), 번완(蕃完) 등의 이름이 전해지기는 했으나, 이들 역시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다.  


■ 민장사 

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에게는 장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바다를 떠도는 상인들을 따라나선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민장사의 관음보살 앞에서 7일간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장춘이 무사히 돌아왔다. 그간의 사정을 묻자 장춘은 이렇게 말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동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간신히 널빤지 하나를 붙잡고 떠다니다가 오나라 해변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사람이 저를 거두어 들판에서 농사일을 도울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스님 한 분이 찾아오셨는데, 마치 고향에서 오신 것처럼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더군요. 그러고 나서 스님은 저를 데리고 길을 나섰고, 길을 걷던 중 깊은 도랑을 앞에 두고는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단숨에 뛰어넘으셨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졌던 제가 깨어나 보니, 고향의 사람들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장춘은 오나라를 신시(오후 3-5시)에 떠났고, 이곳에 도착한 것은 술시(오후 5-7시) 초였다. 그날은 천보 4년 을유년(745년) 4월 8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경덕왕은 민장사에 논밭을 하사하고 재물 또한 시주하며 공경의 뜻을 표했다.


■ 전후소장(前後所將) 사리

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 재위 시기 대청 3년(549년)에 양나라에서 심호를 통해 사리 몇 알을 보내왔다. 이어 선덕왕 시기 정관 17년 계묘년(643년)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머리뼈, 어금니, 사리 100알, 그리고 부처님이 입었던 붉은 비단에 금빛 무늬가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탑에, 또 하나는 태화사탑에, 마지막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의 계단에 안치했다. 그 나머지는 어디에 보관했는지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통도사의 계단은 두 층으로 되어 있으며, 상층부에는 돌 뚜껑이 놓여 있어 뒤집어진 가마솥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속설에 따르면, 고대에 고려의 안렴사 두 명이 통도사 계단에서 예를 갖춘 후 돌솥을 들어보았는데, 처음에는 큰 구렁이가 돌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에는 큰 두꺼비가 돌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이 돌을 들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최근의 기록으로는 상장군 김공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려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 지역을 다스릴 때 부절을 지니고 절로 가서 돌을 들고 예를 올리려 했는데, 절의 승려들이 이전 사건을 떠올리며 난감해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병사를 시켜 돌을 들게 했다. 그 안에는 작은 돌함이 있었으며, 돌함 속에는 유리 통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겨우 4개의 사리만 발견되었다. 이를 두 사람이 함께 살펴보며 공경의 예를 표했다. 그런데 통 안에는 약간 훼손된 부분이 보여 유공(유시랑 석)이 지니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해 추가 보관하게 하고, 이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강도로 수도를 옮긴 지 4년이 되는 을미년(1235년)의 일이었다.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리 100개를 세 곳으로 나누어 보관했으나, 지금은 단지 네 개만 남았다. 사리는 드러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하니, 이를 본 사람마다 수효가 다르게 전하곤 했다. 따라서 많고 적음을 기이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또 다른 속설에서는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돌솥 동쪽 면에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그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고 전한다. 이 사건은 요나라 응력 3년 계축년(953년), 고려 광종 5년에 발생했으며, 번번한 불 가운데 황룡사탑이 세 번째로 소실되었던 때와 일치한다.

조계의 무의자(진각국사) 또한 이를 시로 남겼다.

듣자니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불길이 번졌어도 한쪽 틈 없이 견고했다네.

라는 구절은 당시의 이 일화를 언급한 것이다.

지원 갑자(1264) 이후로 원나라의 사신과 고려의 황화(사신)들이 서로 다투어 이 돌함에 절하며, 사바의 운수(여행하는 승려)들 또한 몰려와 참배했다. 일부는 이 돌함의 존재를 듣고 찾아왔지만, 또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돌함 안에는 진신(부처)의 사리 네 알이 있었고, 변신사리들은 마치 모래알처럼 부서져 돌함 밖으로 흩어져 있었다. 때때로 이곳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짙게 퍼졌으며, 이러한 향기는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일로 여겨졌다. 이는 혼란한 시대에 한 지방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이었다.

당나라 대중 5년 신미(851)에 고려의 사신 원홍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어금니와, 후당 동광 원년 계미(923), 즉 고려 태조 즉위 6년에 윤질이라는 사신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5백나한의 상은 현재 북승산의 신광사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 선화 기묘(1119)에 입공사였던 정극영과 이지미가 송나라에서 가지고 온 또 다른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왕실 내전에 모셔져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로 가서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 존자(중국 화엄종 2대 교주)와 함께 머물렀다. 근처에는 선율사라는 다른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은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으며 특별한 예식을 올릴 때마다 하늘의 부엌에서 음식이 내려왔다. 어느 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초대하여 예식을 함께 올렸지만, 의상이 자리를 잡고 오래 앉아 있었음에도 하늘에서 음식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의상은 빈 그릇만 들고 돌아갔는데 그제야 천사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왜 이렇게 늦었는지 묻자 천사가 대답했다.

"온 마을에 신병(신성한 병사)이 가득 차 있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듣고 선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령의 보호가 따르고 있음을 깨달았고, 의상의 도력이 자신의 능력을 초월함을 인정하며 감탄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은 그대로 두었다. 다음 날, 선율사는 지엄과 의상을 다시 초대하여 예식을 열고 자신의 깨달음을 털어놓았다. 이에 의상은 조용히 말했다.

"율사께서는 이미 천제의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제가 듣기로는 제석궁에 부처님의 치아(40개 중 한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 천제께 청하여 인간 세상에 내려 보낸다면 큰 복이 될 것입니다."

그 후 율사는 천사와 함께 의상의 이 뜻을 천제에게 전달했다. 천제는 7일의 기간을 약속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의상은 예를 다하여 이 치아를 맞이했고 대궐에 모셨다.

그 후 송나라 휘종 시대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예식이 더욱 발달했으나, 이와 함께 도참설(예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금인(金人)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예언했으며, 황건(도교를 따르는 무리)이 이 예언을 악용하여 권력층을 선동하며 주장했다.

"금인이란 불교를 의미하며, 이는 앞으로 국가에 해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정은 불교를 근본적으로 없애려는 움직임을 계획하였다. 중들을 처형하고 경전을 소각하며, 따로 제작한 작은 배에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넓은 대양에 띄워 보내, 인연이 닿는 곳으로 흘러가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던 중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방문했다가 이를 알게 되었고, 천화용 50령과 저포 3필을 배를 호송하는 관리에게 은밀히 건네 부처의 어금니를 받아내고 빈 배만 흘려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이들은 어금니를 고려로 가져와 왕에게 보고하였고, 예종은 이를 매우 기뻐했다. 그 후 어금니를 궁중의 십원전 왼쪽 작은 전각에 안치하고 항상 문을 잠갔으며, 밖에는 향과 등불을 밝혀 두었다. 이 문은 오직 왕이 친히 나오는 특정한 날에만 열어 예를 올리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년(1231)에 서울을 강화도로 옮길 때의 혼란으로 내관들이 이를 챙기지 못하고 빠뜨린 일이 발생했다. 시간이 흘러 병신년 4월, 왕실의 명복을 비는 역할을 했던 신효사의 중 온광이 부처의 어금니를 예배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며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왕은 내관들에게 명해 궁중을 샅샅이 뒤져 보게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당시 백대 시어사 최충은 설신과 여러 알자들에게 급히 수소문했으나 아무도 이를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내신 김승노가 조언하기를, 임진년에 작성된 궁중 일기를 조사해 보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기록을 조사했더니, 일기에 "입내시대부경 이백전이 불아함을 받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백전을 불러 물었으나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집에 돌아가 자신의 일기를 다시 살펴보기를 요청했다. 이후 찾아온 그는 좌번알자 김서룡이 불아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찾아내 제출했다. 김서룡을 불러 추궁했지만, 그 역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에 김승노의 제안대로 임진년부터 병신년까지 5년간 어불당과 경령전에 근무했던 책임자들을 체포해 심문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로부터 3일 후 밤,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언가 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확인해 보니 그것은 분실됐던 불아함이었다. 본래의 불아함은 침향합, 순금합, 백은함, 유리함, 나전합으로 안팎 여러 겹으로 구성된 정교한 상자였으나, 발견된 것은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이를 대궐로 가져가 왕에게 기쁘게 보고했으나, 유실의 책임으로 인해 김서룡과 어불당 및 경령전에 속한 인물 전원을 처벌하려 하였다.

하지만 진양부에서 이와 관련해 상소하며 "불사 문제로 너무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라며 탄원하였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후 궁궐 십원전의 앞뜰에 특별히 불아전을 세우고, 불아함을 모셨으며, 경비를 위해 장사들을 배치하였다. 좋은 날을 골라 신효사의 상방인 온광을 청하고, 30명의 승려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와 정성을 다해 불교 의식을 올리게 했다. 그날 입직 중이었던 승선 최홍, 상장군 최공연, 이영장과 내시 다방의 관원들은 불아전 뜰에서 왕과 함께 서서 차례로 불아함에 정성을 드렸다. 불아함의 구멍 사이로 빛나는 사리가 나타났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진양부에서는 이를 백은 상자에 담아 소중히 모셨다.

그때 왕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불아를 잃은 후 네 가지 의심이 들었소. 첫째는 천궁의 7일 기한을 다하여 하늘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국난을 피하기 위해 인연 있는 무사한 나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고, 셋째는 탐욕 많은 소인이 상자를 훔쳐 불아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며, 넷째는 도둑이 보물을 훔쳐 집 안에 감추어 두었을 가능성이었소. 그런데 결국 네 번째 의심이 맞았소."  

말을 끝낸 뒤 왕은 크게 통곡했고, 뜰에 있던 사람들 또한 눈물을 흘리며 헌공하였다.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며 정성을 드리는 사람까지 나타날 정도로 감동스러웠다. 이 기록은 당시 내전에서 기도하며 향을 피웠던 전 지림사 대선사 각유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이라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경오년(1270)에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던 시기, 난리는 임진년에 비해 더욱 심각했다. 이 과정에서 십원전의 관주였던 선사 심감은 자신의 위험조차 돌보지 않고 불아함을 지켜 적난에서 보호하였다. 이 일이 대궐에 알려지며 왕은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해 보상하고, 그를 큰 절로 옮겨 살게 했다. 그는 현재 빙산사에 머물고 있으며, 이 내용 또한 각유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

또한 신라 진흥왕 천가 6년 을유(565)에는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중명관을 통해 불경 경·논 1700여 권을 보내왔다. 정관 17년(643)에는 자장법사가 삼장(경장·율장·논장) 400여 상자를 가져와 통도사에 안치하였다. 흥덕왕 태화 원년 정미(827)에는 고구려 학승 구덕이 당나라에서 불경 몇 상자를 가지고 돌아오자 왕은 여러 승려들과 함께 홍륜사 앞길에서 맞이하였다. 대중 5년(851)에는 사신 원홍이 당나라에서 불경과 축(軸)을 가져왔으며, 나말에는 보요선사가 두 번이나 오월국에서 대장경을 가져왔는데, 그는 곧 해룡왕사의 개산조였다.

송나라 원우 갑술년(1094)에는 어떤 사람이 보요선사를 추모하며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거룩하시도다, 개조 스님이시여!
                그 모습 숭고하고 빛나셨네.
                두 번이나 오월에 다녀오시며,
                대장경을 무사히 가져오셨고,
                보요라는 호칭을 받으셨으며,
                조서를 네 번이나 받으셨네.
                그 덕을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리라,
                "밝은 달과 맑은 바람처럼 고결하시다.“

금의 대정 연간(1161-1189)에는 한남의 관기였던 팽조적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물과 구름이 고요한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더욱이 신룡이 이 경계를 보호하고 있네.  
마침내 이 좋은 절을 따를 곳이 어디 있으랴.  
불법은 이제 남쪽에서부터 이곳에 전해졌네.  

그 발문(跋文)은 다음과 같다.  
옛날 보요선사가 처음으로 남월에서 대장경을 구해 돌아오던 중, 갑작스러운 바람으로 조각배가 물결 속에서 뒤집힐 뻔한 일이 있었다. 이를 보고 선사는 “혹여 신룡이 대장경을 이곳에 머물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하며 정성을 다해 주문을 외우고 축원했다. 그러자 신룡이 감응하여 바람과 물결이 잠잠해졌다. 이후 보요선사는 본국으로 돌아와 산천을 유람하며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찾다가 이 산에 이르렀다. 산 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인 홍경과 함께 연사(연꽃의 사찰)를 세웠다. 이는 불교가 동방에 전해진 중요한 시작이었다.  

한남의 관기 팽조적은 여기에 제목을 붙이며 기록했다.  
해룡왕사에는 용왕당이 있었고, 그곳은 신령스러운 기운과 기이한 일들로 가득했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을 따라 이곳에 안주하였고, 그 증거로 지금까지도 용왕당이 남아 있다.  

천성 3년(928) 무자년에는 승려 묵화상이 후당에 들어가 대장경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또한 본조 예종 시기에는 혜조국사가 황제의 칙령을 받고 중국으로 유학하여 요본 대장경 3부를 가져왔는데, 그중 한 부는 현재 정혜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어 대안 2년(1086) 본조 선종 때 우세승통 의천이 송나라에 들어가 천태종 교리를 연구하며 다수의 관련 서적을 가져왔다. 이 외에도 서적에 실리지 않은 많은 고승과 신자들이 왕래하며 불법 관련 자료를 전하고 있으니, 이를 모두 기록하기란 어렵다.  

불교가 동방으로 전파된 과정은 참으로 장대하고 길했으니 이를 경사로운 일로 여긴다. 이에 감회를 담아 읊는다.

중국과 동방 사이는 연진으로 가로막혔으나  
녹원의 학림은 2천 년의 세월을 이어왔네.  
이 땅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오니 경사가 아니겠는가,  
동진의 깃발과 서건의 바람이 결국 한 시대에 만나게 되었네.  

여기에 기록된 의상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의상은 영휘 초년(650)에 당나라에 가서 지엄선사를 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부석사의 본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의상의 행적은 이와 다소 차이가 있다.

본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출가했으며, 영휘 원년 경술(650)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고구려까지 갔다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으로 인해 되돌아왔다. 이후 용삭 원년 신유(661)에 당나라로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움을 청했고, 총장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천화(입적)하자 함형 2년(671)에 신라로 귀국했다. 장안 2년 임인(702)에 의상은 세상을 떠났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하건대, 의상이 지엄과 더불어 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불재를 올리며 천궁의 불아를 청했던 시기는 신유(661)에서 무진(668) 사이의 7~8년 동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조 고종이 강화도로 들어간 임진(1232)에 이미 천궁의 7일 기한이 끝났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도리천의 1주야는 인간 세계의 100년과 같으므로, 의상이 당나라에 처음 갔던 신유(661)부터 본조 고종 임진(1232)까지는 실제로 57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천궁의 7일 기한이 채워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고종의 경자(124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700년이 차며, 그제야 천궁의 7일 기한이 완성된다. 개경으로 환도하던 지원 7년 경오(1270)를 기준으로 하면, 730년의 시간이 경과한 셈이다. 따라서 천제가 말했던 대로 7일 후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가정한다면, 심감선사가 환도 당시 가져다 바쳤던 불아는 진짜 불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지원 연간 봄, 왕은 환도 전에 대궐 안에 각 종파의 유명한 승려들을 모아 불아와 사리를 빌기 위해 정성과 성의를 다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이는 7일 기한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지원 21년 갑신(1284)에는 국청사의 금탑을 보수했는데, 이때 충렬왕은 장목왕후와 함께 묘각사를 방문하여 신도들과 함께 이를 축하하고 찬미했다. 절차가 끝난 후 시주받은 불아와 낙산의 수정 염주, 그리고 여의주를 군신 및 신도들과 경배한 뒤 금탑 안에 봉안했다.

나 또한 그 자리에 참여하여 이른바 불아라고 불리는 것을 직접 확인해 보았는데, 그것은 길이가 약 3치 정도로 보였으며 사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 모든 내용을 무극, 즉 일연의 제자가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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