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의 두 성인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
옛날, 의상 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오던 중,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 어딘가의 굴 속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이곳을 "낙산"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서역에 있는 "보타낙가산"과 관련이 있다. 그곳은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이곳 또한 백의대사의 진신이 깃든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의상은 일주일 동안 재계한 뒤, 새벽에 좌구를 물 위에 띄웠다. 그러자 용천팔부라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들이 나타나 그를 굴로 안내했다. 굴에서 공중을 향해 예를 올리자 수정 염주 한 꾸러미가 주어졌고, 의상이 이를 받아 밖으로 나오던 중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 한 알을 건네주었다. 의상은 다시 7일간 재계하며 기도했고, 마침내 관음보살의 진신을 뵐 수 있었다. 관음보살은 의상에게 산 꼭대기에 쌍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지으라고 말했다.
법사가 굴 밖으로 나오자, 실제로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있었다. 이에 금당을 세우고 관음보살의 상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 모습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대나무는 금세 사라졌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이곳이 관음보살 진신의 거처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낙산사라 정하고, 의상은 자신이 받은 두 개의 보석을 성전에 봉안한 뒤 떠났다.
그 후에 원효 법사가 이곳에 머물러 예배를 드리려 왔다. 처음 남쪽 교외에 들어서자 흰옷을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는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벼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여인은 벼가 아직 익지 않았다고 답했다. 원효는 계속 길을 가다 다리 밑에서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을 발견했다. 그는 물을 달라고 청했으나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내밀었다.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깨끗한 냇물을 떠 마셨다.
그러던 중 들판의 소나무 위에 있던 파랑새 한 마리가 원효에게 다가와 그를 부르며 가지 말라고 말했다. 곧 그 새는 사라졌고,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이후 원효가 절에 도착하자 관음보살상 밑에서 자신의 신발 한 짝을 발견하게 됐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만났던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불렀다.
원효는 관음보살의 진용을 다시 보기 위해 성굴로 들어가려 했으나, 풍랑이 심해져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이후, 굴산조사 범일은 태화 연간(827-835년) 동안 당나라로 건너가 명주 개국사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왼쪽 귀가 없는 한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은 조사에게 자신의 고향이 명주의 경계인 익령현 덕기방이라며 후일 돌아가면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범일은 이후 여러 사찰들을 다니며 법을 구했고, 염관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당나라 회창 7년(847년), 그는 본국으로 돌아와 굴산사를 세우고 불법을 널리 전파했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 보름밤, 한승이 꿈을 꾸었다. 전에 만났던 스님이 창문가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 개국사에서 이미 조사께 승낙을 받은 지 오래인데, 어찌 이리 늦으십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익령 경계를 찾아가 그 스님이 있었던 장소를 수소문했다. 낙산 아래의 마을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덕기였다. 그녀에게는 나이가 겨우 여덟 살 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 소년은 마을 남쪽의 돌다리 근처에서 놀다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노는 아이들 중 한 명에게서 금빛이 납니다."
아이는 그 말을 전하며 어머니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이를 조사에게 알렸다. 조사도 크게 놀랐고 동시에 기뻐했다. 소년이 놀던 다리 밑을 찾아가 보니, 물속에 있는 돌부처 하나를 발견하였다. 돌부처를 건져 올려 보니 왼쪽 귀가 끊어져 있었는데, 모습이 전에 꿈에서 보았던 스님과 흡사했다. 이 돌부처가 바로 정취보살의 불상이었다.
조사는 절을 짓기 위해 간자(점술 도구)를 만들어 적합한 위치를 점쳤고, 낙산 위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그곳에 불전 세 개를 짓고 정취보살의 불상을 봉안하였다.
약 백 년 후 큰 들불이 일어나 산까지 번졌으나, 유독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피해 원형을 유지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계축 갑인연간(1253-1254년), 두 성인의 형상과 두 보물을 양주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 군사가 양주성을 심하게 공격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절의 주지였던 선사 아행은 은함에 두 보물을 넣고 도망치려 했으나, 절에 머물고 있던 승려 걸승이 보물을 땅속 깊이 묻으며 맹세했다.
"만약 내가 이 전란 속에서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 두 보주는 세상에 영영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이 보물을 나라에 바치겠습니다."
결국 갑인년(1254년) 10월 22일에 양주성이 함락되었고, 아행은 전란 속에서 목숨을 잃었으나 걸승은 살아남았다. 적군이 물러난 후 걸승은 땅속에 묻었던 보물을 꺼내어 명주도 감창사에 바쳤다. 당시 감창사는 낭중 이녹수가 맡고 있었으며, 그는 이 보물을 창고에 잘 보관한 후 후임자들에게 인계하였다.
무오년(1258년) 11월, 지림사 주지였던 대선사 각유가 왕에게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는 국가의 중요한 신물입니다. 양주성이 함락될 당시, 절 승려 걸승이 성내에 묻었다가 적군이 물러간 뒤 파내어 감창사에 바쳤으며, 지금까지 명주영 창고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명주성조차 지켜낼 수 없는 형편이니 이 보물을 어부(御府)로 옮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 병사 10명과 걸승을 명주성으로 보내 두 보주를 수도로 옮겨 내부에 안치하도록 했다. 당시 사신으로 파견된 10명은 각각 은 한 근과 쌀 다섯 섬씩을 상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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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에 세규사라는 절이 있었다. 본사에서는 조신이라는 승려를 보내어 장원을 관리하도록 했다. 조신은 장원에 머무는 동안 김혼공의 딸을 보고 그녀에게 깊이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여러 차례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서 그녀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남몰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에 조신은 불당에 나가 관음보살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러다 기진한 채 옷을 입은 상태로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김 씨 낭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래전 스님을 잠시 뵙고 마음속 깊이 사랑하며 한순간도 잊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혼인해야 했습니다. 이제야 부부의 연으로 하나가 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조신은 큰 기쁨에 휩싸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40년간 함께하며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집안은 단출한 네 벽뿐이었고, 제대로 된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다. 결국 빈궁한 삶 속에서 가족을 이끌고 여러 지역을 떠돌며 구걸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10년이 지나도록 오두막 같은 삶은 계속되었고, 낡고 해진 옷마저도 겨우 몸을 가렸다.
어느 날 명주의 해현령을 지나는 중, 맏아들인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기아로 쓰러져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부부는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나머지 네 가족과 함께 우곡현으로 향해 허름한 초막을 짓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는 잔혹했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기아와 추위로 인해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열 살 된 딸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인근 마을에 밥을 구걸하러 갔다가, 마을 개에게 물려 다친 몸을 질질 끌며 돌아왔다. 아이의 고통스러운 신음 앞에서 부부는 목이 메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힘겹게 말했다.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합니다. 그땐 당신의 얼굴이 아름다웠고, 젊었으며, 우리가 입은 옷조차 깨끗했지요. 작은 음식 한 조각이나 옷 한 벌이라도 서로 나눠 입고 먹으며 그렇게 산 지도 어느새 5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마음은 더 깊어졌고 사랑은 더욱 단단히 얽혔습니다. 참으로 깊은 인연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쇠약해져가는 우리 몸은 병들었고, 굶주림과 추위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이제는 남의 집 곁방이나 초라한 음식을 얻기도 힘들어졌어요. 하늘 아래 이 많은 집들을 지나며 구걸하는 것 또한 산처럼 무겁게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모습엔 미처 마음을 쓸 여유도 없으면서, 어떻게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붉었던 얼굴의 아름다움과 밝았던 웃음은 이슬 내린 풀잎 같고, 당신과 내가 맹세했던 지란 같은 약조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덧없습니다. 당신이 저 때문에 더 큰 근심을 안게 된다는 사실이 더 아픕니다."
부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떼었다.
"돌아보면 옛날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처지에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모든 새들이 굶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짝을 잃은 난새가 거울 앞에서 외롭게 짝을 부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인간의 정으로는 춥다고 외면하고 덥다고 다가서는 일이 쉽진 않지요.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일입니다. 헤어짐과 만남은 모두 운명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니, 저는 이제 우리가 각자의 길로 가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들은 조신의 마음 속엔 자유에 대한 희미한 기쁨이 스쳤다. 각자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떠나기로 결심한 그는 출발에 앞서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부인이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
이렇게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희미하게 흔들렸고, 어느새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아침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백발로 변한 것을 깨닫고, 세상사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린 채 망연자실했다. 더 이상 괴롭게 살아가는 것조차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단함을 모두 겪어버린 듯 마음속에서 재물을 탐하는 욕망도 녹아 사라져 버렸다.
이로 인해 그는 관음보살의 상 앞에 서기가 부끄러워졌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돌아와 해현에 묻혀 있던 아이를 파보았더니 그것이 바로 석미륵이었다. 아이를 물로 씻어 정갈히 하여 가까운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자신에게 맡겨졌던 장원의 임무를 내려놓았다. 또한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정토사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으며 지나간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찌 조신사의 꿈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들이 세속적인 즐거움만을 알며 그것에 만족하고 애쓰지만, 이는 단지 깨달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이에 시를 지어 경계의 뜻을 더했다.
깊이 마음에 맞는 작은 즐거움에 빠져 한가롭게 살더니
어느덧 근심 속에서 홀연히 늙어버렸네
황량한 부귀가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낱 꿈임을 깨달아야 하리라
수신(修身)의 성공과 실패는 성의(誠意)에 달려 있으니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지 않아야 할 것이네
어찌 가을밤 한 꿈만 보고 살겠는가?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한 곳에 다다르기를 바라야겠네
■ 어산의 부처 그림자
고대 만어산의 설화와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자성산 또는 아야사산으로 불리던 산이며, 근처에는 가라국이 있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바닷가에 닿아 사람이 되었고, 이 인물이 바로 수로왕으로, 그는 그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영토 내에는 옥지라는 연못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또한 만어산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다섯 명의 나찰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독룡과 왕래하며 서로 소통했다. 이로 인해 번개와 폭우가 잦아졌고, 4년 동안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아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왕은 이를 해결하고자 주술을 사용했으나 효력이 없었고, 결국 부처를 초청하여 설법을 펼쳤다. 그 결과 나찰녀들이 다섯 가지 계율(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의 금지)을 받아들였고, 이후 재해가 사라졌으며 산과 동해가 평온을 되찾았다. 지역 곳곳에는 돌들이 가득하게 되었는데, 이 돌들은 각각 쇠북이나 경쇠 소리와 같은 맑은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한편 대정 12년 경자(1180년), 고려 명종 11년에 만어사가 세워졌다. 당시 불교 고승인 보림은 한 글을 올리며 만어산의 기이한 풍경에 대해 언급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산과 북천축 가라국 부처의 특징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옥지 연못 근처에는 여전히 독룡이 살고 있다. 둘째, 강가에서 올라오는 운기가 산마루까지 이어지며 그 구름 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셋째, 부처 영상의 북서쪽 반석에는 물이 항상 고여 마르지 않으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았던 장소로 여겨진다.
보림의 언급 이후 직접 참배한 사람들은 두 가지 놀라운 현상을 확인했다고 전한다. 그 첫째는 지역의 돌들 중 약 3분의 2가 금속처럼 맑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며, 둘째는 멀리서 보이면 가까이에서는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없어지는 돌들의 기묘한 특성이다.
또한 가자함의 《관불삼매경》 제7권에는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부처가 야건가라국 고선산에서 독룡과 나찰을 다스린 이야기로, 나찰 다섯이 여룡으로 변해 독룡과 사귀며 우박과 재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역병과 기근이 지속되자 왕은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시 바라문 출신의 범지가 왕에게 이르길, 가비라국의 정반왕 아들이 깨달음을 이루어 석가모니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했다. 왕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부처에게 예를 올리고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노라 결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 만어산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어난 신비로운 사건들과 불교적 전설들을 전하며, 지역의 역사와 신앙적 가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들에게 육신통(六神通)을 얻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불파부제(佛波富帝)의 요청에 응했다. 이때 세존의 이마에서 빛이 솟아올라 만여 개의 대화불(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보냈다. 용왕과 나찰녀는 온몸을 땅에 던져 부처께 계율을 받을 것을 청했다. 이에 부처는 즉시 그들을 위해 삼귀오계(三歸五戒)를 설법했다. 그 설법을 모두 들은 용왕은 부처 앞에 꿇어앉아 합장하며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제가 또다시 악한 마음을 품어 아누보리(일체의 지혜)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범천왕이 다시 와 부처를 예우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미래의 모든 중생을 위해 중생들을 교화하소서. 이 작은 용만을 위해 머무시지 마십시오."
백천의 범천왕들 또한 같은 간청을 올렸다. 이후 용왕은 여러 칠보로 만든 대를 여래께 바쳤으나, 부처는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이 대는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 너는 지금 나찰이 있는 석굴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하도록 하라."
이 말을 듣고 용왕은 매우 기뻐했다. 여래는 용왕에게 약속했다.
"내가 너의 청을 받아들여 그 굴속에서 1,500년을 지내겠다."
부처는 말을 마치자 곧 몸을 솟구쳐 돌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돌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져 사람들이 부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용들이 나타나 부처를 멀리서 찬탄하며 합장했고,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도 밖으로 빛을 발산했다. 이로 인해 모든 용들은 부처의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때 세존은 결가부좌한 채 석벽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멀리서 보면 그의 모습이 보이다가도 가까이 가면 사라졌다. 여러 천신들이 부처의 영상을 공양하자, 부처의 영상 또한 설법을 펼쳤다.
부처가 설법 중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가 바위 위를 밟자 금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승전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동진 시대의 고승 혜원은 천축국에 있는 부처의 영상을 보았다고 했다. 이는 옛날에 용들을 위해 남긴 영상으로, 북천국 월지국 나갈가성 남쪽 고선인의 석실 안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법현의 <서역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갈국의 국경에 다다르면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순 정도 떨어진 곳에 석실이 있으며, 이는 박산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 석실 안에는 부처가 남긴 영상이 있는데, 10여 보 떨어져 보면 실제 부처님 모습처럼 환하게 빛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진다고 한다. 여러 나라의 왕들이 화공을 보내 그 모습을 모사하려 했지만,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전하는 말로는 현겁(賢劫)의 1천불이 모두 이곳에서 영상을 남길 것이라고 한다.
그 영상에서 서쪽으로 약 백 보 떨어진 곳에는 부처께서 세상에 머물 때 머리와 손톱을 깎았던 장소도 존재한다고 한다.
성함(星函)의 <서역기> 제2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한 용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소를 몰며 왕에게 소젖을 바쳤다. 그런데 어느 날 실수를 저질러 꾸지람을 듣자, 속으로 분노와 원망을 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에게 공양을 드렸다. 이후 그는 솔도파(사리를 봉안하는 탑과 같은 축조물)에 다음과 같은 수기를 남겼다.
‘부디 악룡이 되어 나라를 무너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침내 석벽으로 가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고, 대용왕이 되어 이 굴에 머물며 악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여래는 이를 보고 신통력을 발휘하여 이곳에 도달하였다. 용은 부처를 보자 마음속의 독한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졌고, 불살계(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는 서약)를 받으며 부처에게 간청하였다.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머무르시며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부처가 답했다.
“나는 곧 적멸(열반)에 들 것이다. 하지만 너를 위하여 내 영상을 여기에 남겨둘 것이다. 만약 다시 독하고 분노에 찬 마음이 들거든 반드시 내 영상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그 마음이 곧 소멸될 것이다.”
그 후 부처는 석실로 들어갔다. 멀리서 보면 그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까이 다가가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바위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는데, 이는 칠보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경문에 기록된 내용으로, 대략 위와 같다는 것이다.
해동 사람들은 이 산을 ‘아나사’라고 불렀지만, 원래의 이름은 ‘마나사’로 불러야 한다고 한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물고기’라는 뜻인데, 이는 북쪽 하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따라 산의 이름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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