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지눌 수심결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한 물건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애닯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항상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끼만 먹으면서 대장경을 줄줄 외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바르게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하시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생각도 다 여래의 밝은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들이며, 미래에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찾지 말라. 마음의 바탕은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저절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만 떠나면 곧 당당한 부처이다.
[질문]
만약 불성이 지금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몸 안에 있으므로 범부를 떠날 리가 없는데, 어째서 나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설하여 깨닫게 하소서.
[대답]
그대의 몸 안에 있는데도 그대 자신이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또 이 육신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서 된 것이므로 그 바탕이 둔해서 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깨닫고 알겠는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이 말씀하기를 '지.수.화.풍. 사대는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런데, 다만 그대 눈 앞에 뚜렷이 홀로 밝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그것만이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줄을 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그대 본래의 마음이다.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그것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는가.
그대가 믿지 못하겠다면 옛 성인들이 도에 들어간 인연 두어 가지를 들어 의심을 풀어줄 테니 잘 듣고 믿으라.
옛날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견성한 이가 부처입니다."
"스님께서는 견성을 했습니까?"
"나는 견성을 했습니다."
"그 성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 버젓이 작용하고 있는데도 왕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내게 있단 말입니까?"
"왕이 작용한다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체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 작용할 때는 몇 군데로 나타납니까?"
"그것은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그 여덟 군데를 말해 달라고 하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으면 쥐고, 발에 있으면 걸어다닙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누리를 다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이 열리었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은 말했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큰스님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닦아가야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가려 있으면 허공의 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단박 깨달았다.
옛 성인의 도에 들어간 인연은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간단하다.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법문으로 인해 알아차린 바가 있다면, 그는 옛 성인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질문]
앞에서 말씀한 견성이 진정한 견성이라면 그는 바로 성인입니다. 그는 마땅히 신통 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수도인들은 어째서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대답]
그대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 삿되고 바른 것을 가릴 줄 모르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 곧잘 진리를 말하면서 마음은 게을러 빠져 도리어 분수 밖의 잘못을 범하고 있으니, 다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데에 떨어진 것이다. 도를 배우면서 앞뒤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면서 근본과 지말을 가리지 못하면, 그것은 삿된 소견이지 진실한 공부라고 할 수 없다. 자기 자신만 그르칠 뿐 아니라 남까지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데에는 그 문이 많으니 요약하면 돈오와 점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 돈수가 가장 으뜸가는 근기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차츰 익혀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곧 깨달아 일시에 단박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이것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근기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두 성인이 의지할 길이다.
예전부터 모든 성인들은 먼저 깨달은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에 의해 증득했다. 그러니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해 닦아서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이치는 단박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을 따라 번뇌를 녹일 수 있지만, 현상은 단번에 제거될 수 없으므로 차례를 따라 없애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뜻을 상세히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얼어붙은 못이 모두 물인 줄은 알지만 햇볕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을 깨달았지만 법력으로써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흘러야만 대고 씻을 수 있고, 망상이 다해야만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 광명의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통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익혀감으로써 저절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요망하고 괴이한 짓이며, 성인에게 있어서도 하찮은 일이다. 혹시 나타낼지라도 요긴하게 쓸 것이 못되는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을 때 한량없는 묘용과 신통 변화를 나타낸다'고 하니, 이와 같은 생각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근본과 지말을 알지 못한 탓이다.
앞과 뒤, 근본과 지말을 모르고 불도를 구한다면, 모가 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절벽을 대하듯이 미리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나 부처의 씨앗을 말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깨달음도 믿지 않으며 신통이 없는 이를 보고 업신여긴다. 이는 성현을 속이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질문]
돈오와 점수 두 문이 모두 성인이 의지할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단박 깨달음이라면 왜 차츰 닦을 필요가 있으며, 닦음이 차츰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단박 깨달음이라고 합니까?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주소서.
[대답]
범부가 어리석어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성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가 참 부처인 줄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 없는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 버릇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을 이루게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갓 태어났을 때 모든 감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질문]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대답]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이 따로 있겠는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해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 하러 또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애써 알려고 하면 곧 알 수 없으니 다만 아는 대상이 아닌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질문]
상상의 뛰어난 사람은 들으면 쉽게 알지만 중하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말씀하여 어리석은 이들도 알아듣게 해 주소서.
[대답]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그대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들으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 세상은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런 앎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공적하고 영지한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이며, 또한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이다.
이 마음만 깨달으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경지를 올라 걸음마다 삼계를 뛰어넘고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이타를 갖추고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그대가 이와 같다면 진짜 대장부이니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질문]
제 분수에 따르면 어떤 것이 공적 영지의 마음입니까?
[대답]
그대가 지금 내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한 마음인데, 어째서 돌이켜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는가. 내 이제 그대의 분수를 따라 바로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 테니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잘 들으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만약 이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사람이 일단 죽게 되면 몸은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혀는 말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며,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를 못하는가.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는 그 성질이 공하여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분명히 알며 어둡지 않고 한량없는 묘용한 작용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름이로다’라고 한 것이다. 또 진리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그대에게 한 길을 가리켜 근원에 돌아가게 하리라.
“그대는 지금 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 보라. 거기에도 많은 소리가 있는가?”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말하기를,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허공과 같지 않은가?”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실체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이미 모양이 없는데 어디에 크고 작음이 있겠으며, 크고 작음이 없는데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안팎이 없고, 안팎이 없으므로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으므로 피차가 없다. 피차가 없으므로 가고 옴이 없으며, 가고 옴이 없으므로 생사가 없고, 생사가 없으므로 옛날과 지금이 없으며, 옛날과 지금이 없으므로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없으므로 범부와 성인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으므로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함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므로 모든 이름과 말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없어지니 모든 감관과 대상과 망념, 나아가서는 갖가지 모양과 온갖 이름과 말이 다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본래부터 공적하고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영지가 어둡지 않아 무정한 것과 같지 않고 성품이 스스로 신기롭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한 청정한 마음의 실체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원 각성이다. 이것을 깨달아 지키는 이는 그대로 앉아 움직이지 않고 해탈할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등지는 자는 육도에 나아가 한량없이 헤맬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한 마음이 어리석어 육도로 나아가는 자는 가는 사람이고 움직이는 사람이며, 법계를 깨달아 한 마음으로 돌아온 이는 오는 사람이고 고요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다. 그래서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이라고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고 해서 덜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성인의 지혜에 있어서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 있어도 어둡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성인이라 해서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 해서 덜하지도 않는다면, 부처님과 조사가 보통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보통사람과 다른 점은 스스로 그 마음을 살피는 데에 있다.
그대가 이 말을 믿고 의문이 단박 풀리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진정한 견해를 일으켜서 몸소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긍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음 닦는 사람의 알아 깨닫는 곳이고, 따로 계급과 차례가 없기 때문에 돈이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인중에서 부처의 과덕에 계합하여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룬다’고 한 말과 같다.
[질문]
이 이치를 깨달으면 다시 계급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무엇 때문에 깨달은 뒤에 다시 닦으면서 차츰 익히고 차츰 이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답]
깨달은 뒤에 차츰 닦는 이유는 앞에서 이미 누누이 설명하였는데 아직도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거듭 설명하겠다.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들으라.
범부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도를 유전하면서 나고 죽음에 ‘나’라는 관념에 굳게 집착하여 망상과 뒤바뀜과 무명의 종자와 익힌 버릇이 오랫동안 한데 어울려 그 성품을 이루었다. 금생에 이르러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닫더라도, 그 오랜 버릇을 갑자기 끊어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역경과 순경을 당하면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고, 바깥 대상에 대한 번뇌가 이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지혜로써 공부를 더하고 힘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박 깨치면 부처와 같으나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어서, 바람은 멎었지만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드러났지만 망상이 그대로 침노한다’고 한 말과 같다.
또 종고선사도 말씀하기를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일을 깨치고는 아주 쉽다는 생각을 내어 더 닦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헤매면서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한번 깨쳤다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려두어서야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피어 망상이 문득 일어날지라도 아예 따르지 말고, 덜고 또 덜어 무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경이 된다. 천하 선지식이 깨친 뒤에 소 먹이는 행을 닦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뒤에 닦는다고 하지만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으려 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으려 해도 닦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는 것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온갖 행을 두루 닦더라도 오로지 무념으로 근본을 삼으라’ 하였고 규봉 스님께서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이치를 통틀어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성품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가 본래 갖추어져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고 여기에 의지해 닦는 것을 최상승선이라 하고, 또 여래의 청정한 선이라 한다. 만약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 저절로 차츰 백천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전해 오는 것이 바로 이 선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하나만 없어도 안된다.
어떤 사람은 선악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억제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미혹이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성문들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둑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살생.도둑질.음행.거짓말 등이 성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피면 일어나도 일어남이 없어서 그 자리가 곧 고요함이니 어찌 다시 끊을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깨달음이 더딜까를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으라. 깨달으면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외부의 번뇌가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제호(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음식. 불성에 비유한 말)가 될 것이다. 미혹이란 그 근본이 없음을 살피면 허공의 꽃인 삼계는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허깨비인 육진은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서 살피고 돌아보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면, 사랑과 미움이 저절로 사라지고 자비와 지혜가 밝아질 것이다. 죄업은 자연히 소멸되고 공덕이 늘어나 번뇌가 다할 때 생사도 곧 끊어질 것이다.
미세한 번뇌의 흐름조차 아주 끊어지고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뚜렷이 홀로 드러나면,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해 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달이 허공에 떠오르면 그 그림자가 물 위에 두루 비치는 것과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 있는 중생을 건지면서 근심없이 즐거울 것이다. 이를 가리켜 크게 깨달은 세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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